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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국제 -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國際學術심포지엄 Religious Interactions Between the Japanese Empire and her Colonies 종교를 통해 본 제국일본과 식민지 ■ 日時 : 2014년 8월 7일 (목) 10:00-18:00 ■ 場所 : 翰林大學校 國際會議室 ■ 主催 :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 後援 : 韓國硏究財團 This work was supported by the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 Grant funded by the Korean Goverment. (2014S1A8A4A01022936) 초대의 글 3 초대의 글 여름방학도 반이 끝나고 어느덧 8월을 맞이하였습니다만, 무더위 속 건승하시리라 믿습니다.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는 2008년도부터 교육부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제국일본의 문화권력-학지(學知)와 문화매체》라는 연구주제로 ‘중점연구소사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만, 이번에 2단계 마지막 3차년도 연구의 일환으로《종교를 통해 본 제국일본과 식민 지》라는 주제로 국제심포지엄을 준비하였습니다. 《제국일본의 문화권력-학지(學知)와 문화매체》 연구의 2단계 주제는 ‘주변부의 공통성과 독자성’입니다. 즉 제국일본의 중심부에서 형성된 문화권력이 제국의 주변부로 확장되면서, 권 력과 反권력, 수용과 저항의 역동적인 상호작용 속에서 어떻게 중층화(重層化)되고 균열되는 지를 포착하려는 것입니다. 이번 국제심포지엄에서는 제국일본의 중심부에서 형성, 변용된 종 교들, 특히 신도(神道)와 불교계 신종교들이 어떠한 경위로 주변부인 조선과 대만에 확장ㆍ유 입되었으며 식민지에 파급되는 와중에 어떠한 변용을 겪는지에 주목하는 한편, 식민지의 종교 들이 이러한 중심부의 ‘종교적’ 영향력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바쁘시더라도 부디 참석하시어 함께 자리를 빛내주시기를 바랍니다. 2014년 8월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소장 서 정 완 배상 4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ご招待の挨拶 拝 啓 時下ますますご清祥のこととお慶び申し上げます。 翰林大学校日本学研究所では、2008年度より韓国・教育部の財源による韓国研究財団の助成を得て 《帝国日本の文化権力-学知と文化媒体》という研究テーマで「重点研究所事業」を遂行しております が、この度、第2段階最後の第3年次研究の一環として《宗教から見た帝国日本と植民地》というテーマ で国際シンポジウムを準備致しました。 《帝国日本の文化権力-学知と文化媒体》研究第2段階のテーマは、「周辺部の共通性と独自性」 であります。すなわち、帝国日本の中心部で形成された文化権力が帝国の周辺部に拡大するにつれて権 力と反権力、受容と抵抗という力動的な相互作用のなかでどのように重層化され、また亀裂するのかを捉え ようとする試みであります。今回のシンポジウムでは帝国日本の中心部で形成され変容した宗教、特に神道 と仏教系統の新宗教がどのような経路で周辺部である朝鮮と台湾に拡張され、流入されたのか、また植民 地に波及する過程でどのような変容を経たのかに注目する一方、植民地の宗教がこのような中心部の「宗 教的」影響力にどのように対応したのかを考えてみたいと思います。 ご多忙のこととは存じますが、何卒ご臨席賜りますようご案内申し上げます。 2014年 8月 翰林大学校日本学研究所 所長 徐 禎 完 행사일정 5 행 사 일 정 2014년 8월 7일 (목) / 한림대학교 국제회의실 일정 / Program 09:30~ 접 수 10:00 개 회 사회 / 조정우 한림대 개회사 서정완 한림대 일본학연구소장 10:10~ 제1부 제국의 종교/사상의 유입과 대응 사회 / 송석원 경희대 발표1 식민지기 조선에서의 천리교 포교에 대하여 가와세 다카야 교토부립대 : 기관지 『みちのとも』를 중심으로 10:50~ 발표2 11:30~ 지정토론 12:30~ 중 13:30~ 開闢의 탄생과 일본의 ‘종교철학’ 허 수 한림대 제점숙 동서대 / 김정인 춘천교대 식 제2부 주변부의 종교들: 교육을 둘러싼 경합 발표3 학교의식에 나타난 식민지교육 사회/ 임성모 연세대 히우라 사토코 데이쿄대 : 현대일본 ‘국가신도’ 논쟁과 관련해서 14:10~ 발표4 14:50~ Tea break 15:10~ 발표5 15:50~ 지정토론 16:50~ Tea break 제3부 17:00~ 1920년대 북간도 용정에서 전개된 중학교 설립운동 식민지조선의 종교계 사립전문과 ‘유교대학’ 구상 진 타이꾸어 연변대 정준영 서울대 박규태 한양대 / 서재길 국민대 / 조형근 한림대 제국-식민지체제 : 주변부에서의 시선 사회 / 서정완 한림대 종합토론 참석자 전원 / 강태웅 광운대 박양신, 홍선영, 조정우 한림대 18:00 폐 회 6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PROGRAM 日程 / Program 09:30~ 10:00 受 付 開 会 開会の辞 2014年 8月 7日 (木) / 翰林大學校 國際會議室 司会/ 趙廷祐 翰林大 徐禎完 翰林大 日本学研究所長 第 1 部 帝国の宗教/思想の流入と対応 司会/ 宋錫源 慶熙大 10:10~ 10:50~ 11:30~ 12:30~ 発 表 1 植民地期朝鮮における天理教の布教について : 機関誌『みちのとも』を中心に 川瀬貴也 京都府立大 発 表 2 開闢の誕生と日本の「宗教哲学」 許洙 翰林大 指定討論 諸点淑 東西大 / 金正仁 春川教育大 中 食 第 2 部 周辺部の宗教:教育をめぐる競合 13:30~ 14:10~ 14:50~ 15:10~ 15:50~ 16:50~ 17:00~ 18:00 司会/ 任成模 延世大 発 表 3 学校儀式に見る植民地の教育 :現代日本の「国家神道」論争とのかかわりから 樋浦郷子 帝京大 発 表 4 1920年代の北間島龍井における中学校設立運動 金泰國 延辺大 Tea break 発 表 5 植民地朝鮮における宗教系私立専門学校と 鄭駿永 ソウル大 「儒教大学」構想 指定討論 朴奎泰 漢陽大 / 徐在吉 国民大 / 趙亨根 翰林大 Tea break 第 3 部 帝国ー植民地体制:周辺部からの眼差し 司会 / 徐禎完 翰林大 総合討論 参加者全員 / 姜泰雄 光云大·朴羊信·洪善英·趙廷祐 翰林大 閉 会 목차 7 목 차 第 1 部 제 1 발표 ▣ 식민지기 조선에서의 천리교 포교에 대하여 : 기관지 『みちのとも』를 중심으로 / 가와세 타카야 (교토부립대 역사학과) ························································································· 11 제 2 발표 ▣ 『開闢』의 탄생과 일본의 ‘종교철학’ / 허 수 (한림대 한림과학원) ··········································································································· 45 ■ 지정토론 / 제점숙 (동서대 일본어학과) · 김정인 (춘천교육대 사회교육학과) ···················································· 65 第 2 部 제 3 발표 ▣ 학교의식에 나타난 식민지교육 : 현대일본 ‘국가신도’ 논쟁과 관련해서 /히우라 사토코 (데이쿄대) ·············································································································· 73 제 4 발표 ▣ 1920년대 북간도 용정에서 전개된 중학교 설립운동 / 진 타이꾸어 (연변대 인문사회과학학원 역사학부) ·········································································· 97 제 5 발표 ▣ 식민지조선의 종교계 사립전문과 ‘유교대학’ 구상 / 정준영 (서울대 규장각) ·············································································································· 115 ■ 지정토론 / 박규태 (한양대 일본언어문화학과) · 서재길 (국민대 국문학과) · 조형근 (한림대 일본학연구소) ······ 139 第 3 部 ▣ 종합토론 ································································································································· 143 참가자 PROFILE ·························································································································· 147 8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目 次 第 1 部 第1發表 ▣ 植民地期朝鮮における天理教の布教について :機関誌『みちのとも』を中心に / 川瀬貴也 (京都府立大) ················································································································27 第2發表 ▣ 日本「宗教哲学」の導入と天道教のメディア戦略 / 許洙 (翰林大) ··································································································································45 ■ 指定討論 / 諸点淑 (東西大) · 金正仁 (春川教育大) ······················································································65 第 2 部 第3發表 ▣ 学校儀式に見る植民地の教育:現代日本の「国家神道」論争とのかかわりから / 樋浦郷子 (帝京大) ···························································································································81 第4發表 ▣ 1920年代の北間島龍井における中学校設立運動 / 金泰國 (延辺大) ·······························································································································95 第5發表 ▣ 植民地朝鮮における宗教系私立専門学校と「儒教大学」構想 / 鄭駿永 (ソウル大) ····························································································································113 ■ 指定討論 /朴奎泰 (漢陽大) / 徐在吉 (国民大) / 趙亨根 (翰林大) ·······························································115 第 3 部 ▣ 綜合討論········································································································································119 參加者 PROFILE ································································································································123 식민지 조선에서의 천리교 포교에 대하여 : 기관지 『みちのとも』를 중심으로 가와세 다카야 일본 교토부립대 문학부 역사학과 식민지 조선에서의 천리교 포교에 대하여 11 식민지 조선에서의 천리교 포교에 대하여 -기관지 『미치노토모(みちのとも)』를 중심으로- 가와세 다카야 (川瀬貴也) 京都府立大 歷史學科 <목 차> 1. 들어가며 2. 통감부 ・ 조선총독부의 종교정책 개요 3. 천리교의 조선 포교 – 『미치노토모』에서 보는 그 실태 4. 나가며 – 전망과 과제 1. 들어가며 일본의 종교들은 제국 일본의 조선침략과 보조를 맞추어 19세기 말부터 한반도로 도항하기 시 작했다. 천리교는 일본의 신종교 중에서 가장 빨리 한반도로 건너가 현재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 하고 있어, 그 신앙의 계승 등에 대한 연구가 축적되어 있다.1) 본고에서는 우선 통감부와 조선총독부의 종교정책을 개관하고, 이어서 천리교의 기관지였던 『미치노토모』의 한반도 포교에 관한 기사를 중심으로 당시 천리교의 포교 실태, 그리고 식민지나 신앙에 대한 천리교도의 의식에 대해 1930년대 초까지를 대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1) 한국 사회에서의 천리교 연구로서 이원범 ・ 남춘모 지음, 『한국속 일본계 종교의 현황』(대왕사, 2008); 李賢京, 「韓国天理教三世信者の信仰継承」, 李元範 ・ 櫻井義秀編, 『越境する日韓宗教文化』(北海道大学出版会, 2011); 陳宗 炫, 『韓国人の日系新宗教受容の構造-天理教を事例として』(東北大学大学院文学研究科修士論文, 2014) 등을 참조. 12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2. 통감부ㆍ조선총독부의 종교정책 개요 러일전쟁 종결 후 일본은 1905년에 제2차 한일협약을 체결시켜, 한국을 보호국화하고 통감부 를 설치했다. 통감부가 발포한 종교 관련 법령으로는 1906년 11월의 통감부령 ‘종교의 선포에 관한 규칙’(전8조)를 들 수 있다. 이 법령의 개요를 살펴보면, 제1조․ 제2조에서 ‘내지’의 모든 종 교의 포교자에 대해 통감의 인가를 받을 것을 정하고 있다. 제2조에 ‘제국신민’이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법령은 기본적으로 일본인 식민자에 대한 것으로, 보호국화 이전부터 활동을 하고 있던 구미의 기독교 선교단이나 조선인 종교자는 적용 대상 외였다.2) 더욱이 이 법령에서 사용하고 있는 ‘신도(神道)’란 ‘교파신도’3)와 ‘신사(神社)신도’가 혼동된 것이었다. 이때는 아직 ‘국가신도’적인 정책은 행해지지 않았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한반도에는 일본인 이 민이 연이어 도항하였고,4) 그들은 자주적으로 신사를 건립했다. 이들 ‘거류민 신사’는 본래 국가 신도 정책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었으나, 후에 통제의 대상이 되고, 국가신도 정책의 말단으로서 역할하게 된다. 한편, 1910년 일본은 한국을 병합했는데, 조선총독부가 본격적인 종교정책에 착수하는 것은 1911년 6월에 발포한 ‘사찰령(寺刹令)’에서부터이다. 사찰령의 내용을 개관하면, 그 골자는 사원 의 병합, 이전 ․ 폐지 ․ 명칭의 변경 및 사원의 재산에 관한 처분 등에 대해 모두 조선총독의 허가 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었다. 또 같은 해 ‘사찰령시행규칙’이 발포되어 ‘사찰령’과 같은 날 시행되 었다. 사찰령시행규칙의 내용은 우선 조선 내의 큰 사찰 30개를 본산(本山)으로 지정하고(제2조), 전국 1300여개의 사원과 30개의 본산(후에 31개)의 본말(本末) 관계를 규정하고, 위로부터 아래 로 관리가 미칠 것을 요점으로 하는 것이었다.5) 이어서 1915년 8월에 ‘포교규칙’(전19조)가 발포되고, 10월부터 시행되었다. 이 ‘포교규칙’은 포교를 시도하는 모든 종교를 대상으로 한 법령이었다. 우선 제1조에 “종교로 칭하는 것은 신도, 불도(佛道) 및 기독교를 말한다”고 나오는 것이 주목된다. 공인 종교는 이 3교로 명문화된 것이 다. 이 법령은 한반도에서의 종교활동 전반을 조선총독부의 관리 하에 두는 것을 최대 목적으로 2) 김태훈은 신자료를 제시하며 “조선인 종교자도 대상이었다”고 하였다. 金泰勳, 『「淫祠邪教」から 「世界宗教」 へ天理教の近代体験』(立命館大学博士論文, 2011), 103-104쪽. 3) 1945년 이전 종교행정에서 공인되었던 신도 계열의 신종교. 전부 13파가 있었으며, 흑주교(黑住敎), 금광교(金光 敎), 천리교도 들어가 있다. 4) 木村健二, 『在朝日本人の社会史』(未来社, 1989), 7-29쪽. 통계에 따르면 1876년부터 1904년까지 연평균 2,686 명이 도항했으며, 1910년의 한국병합 시에는 약 17만명의 일본인 거류민이 존재했다. 5) 韓晳曦, 『日本の朝鮮支配と宗教政策』(未来社, 1988), 67-71쪽. 식민지 조선에서의 천리교 포교에 대하여 13 하고 있다. 이 법령은 일본인 이외의 외국인(구미로부터의 기독교 선교단 등), 조선인에게도 적용 되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각 교단의 조선 재주(在住) 포교관리자를 선정케 하고, 그 해임권을 장 악한 점(제3~7조)이다. 그때까지 적용되어 온 통감부 시대의 ‘종교의 선포에 관한 규칙’에서는 행 정측에 관리자의 ‘인가권’은 존재했으나, 그 ‘해임권’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찰령’과 ‘포교규칙’에 의해 모든 교단의 최고위 대표자 인사가 조선총독에 의해 좌우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 한반도에서 탄생하고 있던 신종교 교단(행정은 이를 ‘유사종교’, ‘종교유사단체’로 부름)도 이 ‘포 교규칙’의 적용을 받음이 명기된 것도 주의를 끈다.(제15조) 또한 ‘포교규칙’과 동시에 전20조로 구성된 ‘신사사원규칙’이 발포되어, 조선 내에 신사나 사원 을 설립할 시의 기준이 정해졌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신사사원규칙’이라고 하여 신사와 불교 사원을 같은 범주에 넣은 점이다. 일본 본국에서는 이미 1900년에 내무성 사사국(社寺局)이 분할 되어 신사는 내무성 신사국, 종교행정은 종교국이 담당하였고(이 종교국은 1914년에 문부성으로 이관), 신사와 불교 사원은 다른 범주의 것, 즉 ‘신도 비종교론’이 관료기구 속에 형식으로서 실 현되어 있었다. 일본인 이민을 주된 대상으로 한 ‘신사사원규칙’이 뜻밖에도 당시의 공인 이데올 로기였던 ‘신도 비종교론’을 법령의 이름으로 은밀히 배반하는 형태가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조 선총독부가 불교 사원이나 신사를 모두 지배를 위한 말단시설로 간주하고, 양자의 차이를 거의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정리하자면 병합 후의 종교정책은 ‘본말제도’ 등의 도입으로 조선 불교를 어용화하는 한편, 종 교법령의 적용 범위를 확대하여(구미의 기독교 선교단이나 종교유사단체) 내지의 공인 종교(신도, 불교)를 완만하게 침투시킬 것을 기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내지’와 같은 종교상황으로 이 행시키려고 한 ‘동화주의’, 일종의 ‘내지연장주의’였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와 2대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하에서 소 위 ‘무단정치’가 행해져 조선인에 대해 고압적인 통치가 행해지고 있었으나, 그 귀결인 1919년의 ‘3 ․ 1독립운동’의 충격은 상당히 컸다. 특히 이 운동의 중심인물이 천도교도나 기독교도, 불교도 등 ‘종교인’이었다는 것을 총독부는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1919년 8월에 3대 총독에 취임한 사이 토 미노루(斎藤実)는 그때까지의 무단정치를 수정하여 소위 ‘문화정치’를 표방하고, 총독부의 체 제를 변혁하려고 했으나, 이것도 실은 동화정책이나 경찰력의 강화 등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한편, 그 틀 속에서 어느 정도의 자유를 인정하고, 친일 분자를 육성하는 일 등에 힘을 쏟았다.6) 종교 관계자도 당연히 ‘친일 분자’로서 육성하고자 했다. 3 ․ 1독립운동 이후 총독부의 종교정책도 전환하게 된다. 우선 종교정책 개정의 일환으로 1919 6) 姜東鎭, 『日本の朝鮮支配政策史研究』(東京大学出版会, 1979) 참조. 14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년 8월에 학무국 아래 새로이 ‘종교과’가 설치되어 종교행정에 관한 사무를 담당했다. 그리고 ‘포교규칙’도 1920년에 개정되었다. 새로 첨가된 것이 제12조와 제14조이다.7) 이들 조 문은 단속에 관한 조문이며, 총독부의 종교에 대한 감독권의 강화가 목적임은 명백하다. 대일본 제국헌법 제28조8)의 ‘신교(信敎)의 자유’와 마찬가지로 “안녕질서를 방해할 우려가 있다”고 간주 될 때는 탄압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문화정치’를 슬로건으로 한 사이토 총독과 정무총감 미즈노 렌타로(水野錬太郎)는 자주 기독 교 선교사와 회합을 갖고 적극적으로 회유책에 힘썼다.9) 사이토와 미즈노의 선교사 회유책은 대 체로 성공했으며, 선교사의 ‘친일화’는 촉진되었다. 그러나 그런 한편 총독부는 ‘채찍’도 잊지 않았다. 예를 들면 학무국장 시바타 젠자부로(柴田善 三郎)는 당시 기독교계 학교에서 문제가 되고 있던 ‘어진영(御眞影)문제’에 대해 여러분이 제국의 국민성 및 제도에 대한 연구가 불충분하기 때문에 걸핏하면 기독교주의의 국민성 또는 자국의 제도, 풍속, 습관을 옮겨 와서 곧바로 제국 영토 내에 적용시키려 하고, 그로 인해 여러 가지 오해를 낳아 곤란한 문제를 야기할 우려가 없지 않다. 그 중에서도 여러분이 폐하의 어진영에 경례하는 것을 일종의 예배로 오인하여 기독교도로서 이에 반대하려는 것은 우리 국민성을 이해하지 못함이 심하다고 할 것이다.10) 라고 천황의 초상에 대한 경례를 ‘내지’의 신사참배 시에 사용된 ‘신사 비종교론’의 논리를 그대 로 ‘수입’하여 반대를 일축하였다. 총독부는 이 논리로 계속 기독교 측을 설득했으나, 이 문제는 수년 후 ‘신사참배문제’를 둘러싸고 더 치열해지게 된다. 총독부 내부의 개혁이나 법령에 관해 말하면, 신사 행정이 1925년 1월에 학무국 종교과로부터 내무국 지방과로 이관된 점이 크다. 이 조치에 의해 관료기구로서 ‘신사 비종교론’을 선언한 것 이나 진배없기 때문이다. 또한 1936년 8월에는 ‘신사사원규칙’이 ‘신사규칙’과 ‘사원규칙’으로 분 리되고, 법규상으로도 ‘신사와 종교의 분리’가 명확해졌다. 이 ‘신사규칙’에서는 창설에 필요한 숭 경자(崇敬者) 수를 그때까지의 30명에서 50명으로 올리고, 도리이(鳥 居)나 사무소(社務所) 등 신 7) 제12조, 제14조는 천도교나 기독교 교회가 3・1독립운동에서 큰 역할을 한 것에 비추어 책정된 것이었다. 그 경 위에 대해서는 朝鮮總督府, 『朝鮮に於ける新施政』(1920), 84-86쪽 참조. 8) 제28조는 “일본신민은 안녕질서를 방해하지 않고 신민된 의무에 배치되지 않는 한에서 신교(信敎)의 자유를 갖는 다”이며, ‘안녕질서’의 해석에 따라 신교의 자유는 처음부터 제한되어 있었다. 9) 姜東鎭, 앞의 책, 79-81쪽. 10) 柴田善三郎, 「在鮮外国宣教師に望む」, 朝鮮総督府, 『朝鮮』1920년 11월호, 5쪽. 식민지 조선에서의 천리교 포교에 대하여 15 사의 다양한 시설을 필수 조건으로 하였다. 이처럼 신사 설립의 기준을 올리는 것은 한반도에 신 사를 침투시키는 정책으로서는 역행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이것은 신사의 난립을 막고 신사에 위엄을 유지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신사는 ‘숭경 구역 및 숭경자 호수(戶數)‘의 신고 의무, 그리고 숭경자의 ‘총대회(總代會, 대표자 모임)’를 둘 것도 의무화되었는데, 이는 훗날 ‘애국반(愛 國班)’11)으로 이어지는 인보(隣保)관리체제의 기초가 되었다.12) 이상으로 법령을 중심으로 식민지 조선에서의 종교정책을 개관하였다. 3. 천리교의 조선 포교 - 『미치노토모』에서 보는 그 실태 이 장에서는 천리교 기관지 『미치노토모』13)의 기사나 천리교 내부에 남아 있는 기록, 선행 연 구를 중심으로 천리교의 한반도 포교가 어떤 성격과 역사를 갖고 있었는지를 개관한다. 3-1. 천리교의 조선 포교와 그 논리 우선 기록상 천리교의 조선 포교는 청일전쟁 직전인 1893년에 고치현(高知縣)의 신자 사토미 지타로(里見治太郎), 사토미 한지로(里見半次郎) 부자가 부산으로 건너가 포교활동을 한 것이 시 작이라고 되어 있다.14) 본래 그들은 규슈(九州) 방면으로 포교하려 왔으나, 그대로 지인을 의지 하여 부산으로 건너가 3, 4년 정도 활동했다고 한다. 본부에도 포교사의 파견을 의뢰하였고, 본 부로부터 “자 마음이 분발해서 한다면 언제라도(1893년 10월 19일)”라는 ‘오사시즈(おさしづ)’15) 를 받았다. 신자가 된 조선인을 데리고 고치로 돌아와 조선어를 배웠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16) 11) 1938년 발족한 ‘국민정신총동원운동조선연맹’(1940년에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개칭)의 말단조직. 1939년 2월 에는 조선 전토에서 결성되었다. 12) 高谷美穂, 「植民地朝鮮における神社政策の展開と実態」, 姜徳相先生古希退職記念論文集刊行委員会編, 『日朝関 係史論集』(新幹社, 2003), 363-373쪽. 13) 1891년 12월에 창간되어 현재까지 발간되고 있는 천리교의 기관지. 『道の友』, 『道乃友』등 표기는 때때로 바뀌 었지만, 1928년 이후는 『みちのとも』. 본고에서는 『미치노토모(みちのとも)』로 표기한다. 14) 高野友治, 『天理教伝道史Ⅹ(海外編)』(道友社, 1975), 2-4쪽. 15) ‘오사시즈’란 넓은 의미에서는 교조 나카야마 미키(中山みき)와 교단간부였던 이부리 이조(飯降伊蔵)에게 내린 ‘신탁(神託)’을 가리킨다. 특히 교조 사후는 교단 내 ‘본석(本席)’이라는 지위에 선 이부리에게 천리교 신자는 중 요한 결정을 내릴 때 신의(神意)를 확인하기 위해 의견을 묻고, 그 때 내린 구술의 가르침을 ‘오사시즈’라고 부 른다. 그것을 모아 정리한 『おさしづ』는 천리교 교전(敎典)의 하나로 꼽힌다. 16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1894년의 『미치노토모』(1894년 11월, 제36호)에는 「신도와 해외포교」라는 기사가 있으며, 조선 으로 포교를 시도해야 한다는 논설이 게재되어 있는 것을 보더라도 청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인의 눈이 조선을 향하고, 부산 등에서 일본인의 활동이 활발해졌으며, 천리교도 그 시류를 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17) 그러나 19세기 말까지는 천리교 신자도 한반도에서 안정된 생활기반을 가질 수 없었다. 더욱이 국내에서는 내무성의 ‘비밀훈령’18)에 의해 활동 자체가 압박을 받았으며, 그 에 따라 본격적인 포교는 20세기에 접어든 러일전쟁 전후부터 전개된다. 1902년에는 후쿠오카 (福岡)에서 나카무라 준페이(中村順平)라는 포교사가 부산으로 건너가 일본인 거류민과 조선인 중에서 약간의 신자를 얻었다. 1904년에 개설된 부산포교소는 한반도에서 최초의 천리교 교회였 다. 그러나 위에서 든 초기의 조선 포교자는 ‘불법입국’이나 ‘의약방해’ 등의 이유로 ‘퇴한(退韓) 명령’을 몇 번이나 받은 인물이며, 일본의 관헌측에서 보면 일본 세력의 진출에 오히려 방해가 되는 ‘반문명적’인 존재로 인식되었다.19) 1903년에는 가가와현(香川縣)의 신자 수 명이 서울로 건너가(그들의 대부분은 목수이며, 당시 일을 찾아 조선으로 건너갔다), 이듬해 목욕탕을 개업하고, 그 2층에서 포교를 시작했다. 오쿠마 고마코(大熊こま子)와 가타오카 고조(片岡好造) 남매는 많은 신자를 획득하여 훗날 ‘경성대교회’ 의 기초를 쌓았다.20) 초기 천리교의 한반도 포교는 상기와 같이 개인적인 정열로 불타는 포교자가 교회의 지원도 그다지 받지 않고 건너간 사례가 많다. 이는 일본 본국에서도 자기 혼자 낯선 땅에 가는 ‘단독포 교’라는 스타일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21) 또한 사토미 한지로에게 내린 앞의 ‘오사시즈’를 보 더라도 알 수 있듯이, ‘신의’를 최고로 여기고 법질서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신자의 행동이 상 찬(賞讚)된 구절조차 있다. 『미치노토모』에는 “사토미 한지로 씨는 분연히 조선국을 향해 포교를 시도했다. (중략) 실로 그의 이런 거동은 포교가의 귀감이 되어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다”22)는 기 16) 『天理教高知大教会史』第一巻(1981). 17) 大谷渡, 「天理教の朝鮮布教」, 『天理教の史的研究』(東方出版, 1996), 157쪽. 18) 1896년 4월에 나온 내무성 훈령으로, 경찰에 의한 단속이 강화되었다. 19) 李元範, 『日本の近代化と民衆宗教-近代天理教運動の社会史的考察』(東京大学博士論文, 1995), 121쪽. 20) 경성대교회 약사(略史)는 金子圭助, 『天理教伝道史概説』(天理大学出版部, 1992), 162-163쪽; 天理大学おやさと 研究所編, 『天理教事典(教会史編)』(天理教道友社, 1989)의 해당 항목(218-222쪽)을 참조. 교회 자신에 의한 역 사는 京城大教会編, 『ものだね-京城の母大熊こま子の道』(天理教京城大教会, 1998) 참조. 21) 시마조노 스스무(島薗進)는 천리교는 단독포교자와 같은 카리스마를 많이 갖고 있어, 이 점이 메이지 중기 이후 발전의 기초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島薗進, 「天理教の都市布教-浜松市の場合」, 『続都市社会の宗教』(東京大学宗 教学研究室, 1984), 108쪽. 22) 『みちのとも』1893년 12월호, 12쪽. 식민지 조선에서의 천리교 포교에 대하여 17 재도 있어, 그들처럼 무모해 보이는 단독포교가 교단 내에서 상찬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허 나 그러한 분위기도 전술한 1896년의 ‘비밀훈령’으로 위축되어 버렸다.23) 1906년에는 통감부령 ‘종교의 선포에 관한 규칙’이 시행되었으므로, 그에 따라 천리교 본부도 ‘한국포교관리자’를 설치하고, 간부 교도 중 한 사람인 마쓰무라 기치타로(松村吉太郎)24)가 1908 년 그에 취임했다. 이는 천리교 본부가 한반도에서 곤궁에 빠진 개인 포교자를 통솔하고, 각기 소속 교회의 지원 하에 포교활동을 중앙집권적으로 전개하는 방향으로 전환했음을 의미했다. 마 쓰무라의 한국포교관리자 취임을 알리는 기사가 게재된 『미치노토모』에는 “한국에서 포교하려는 자는 이력서를 첨부하고 상급 교회25)를 경유하여 교장(敎長)의 인가를 얻어 관리자에게 신고할 것”26)이라고 나온다. 당시의 포교자는 부산, 인천,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일본 국 내에서의 생활이나 포교가 여의치 않아 바다를 건넌 자도 많았다. 그 점은 당시 천리교 포교사 는 “남을 도우러 와있는지, 자신이 도움을 받으러 와있는지 영문을 모르겠습니다”27)라고 통감부 관리로부터 비판을 받은 데서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같은 1908년 11월에 천리교가 일 파 독립28)을 달성하여 독자적인 종교 활동을 벌일 수 있게 된 것도 조선포교의 조직화에 박차를 가했을 것이다. 1910년 한국병합이 이뤄지고, 서울(경성)에서 포교관리소 건설이 시작되었다. 이 어서 1911년에 ‘천리교조선포교규정’과 ‘조선포교감리제규정’이 정해지고,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아 경성에 조선포교관리서가 설치되었다. 병합 전후의 『미치노토모』논설에서는 ‘뒤떨어진’ 조 선인을 정신적으로 지도한다는 취지를 서술하였다. 예를 들면 다음에 인용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논설이다. 천리교 포교사 제군에게 바란다. 제군이 내지에서 하고 있는 저 진지하고 열성적인 ‘봉사활동’적 생활을 저 한민(韓民) 사이로 옮겨, 직접 친히 그들과 정신생활을 함께 하고, 그들의 사대적(事大的) 이고 고루한 정신에 이 새로운 위대한 ‘봉사활동’의 대(大)도의를 고취하고, 그들을 화육하여 우리 23) 李元範, 앞의 박사논문, 126쪽. 24) 교조 일가인 나카야마 가(家)와는 인척 관계에 있으며, 교단 내의 다양한 직책을 역임. 초대 신바시라(眞柱-천 리교의 최고책임자. 교주) 나카야마 신노스케(中山真之亮)의 측근이기도 했다. 다카야스(高安)대교회(오사카부大 阪府 야오시八尾市) 회장. 25) 천리교는 피라미드형 조직형태를 채용하여, 본부ㆍ대교회를 정점으로 각 지방의 분(分)교회가 조직되어 있다. 즉 부모 자식과 같은 ‘교회의 계열’이 중시된다. 26) 「韓国布教者の心得」, 『みちのとも』1908년 11월호. 大谷, 앞의 책에서 재인용. 27) 松村吉太郎, 『道の八十年』(養徳社, 1950), 251쪽. 28) 그때까지 천리교는 ‘신도본국(神道本局)’ 부속의 한 종파로 취급되어 자유로운 종교 활동도 할 수 없었고, 교의 (敎義) 면에서도 큰 제약을 받았다. 18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신도처럼 하늘을 즐기고, 땅을 즐기고, 사람을 즐기는 생생하고 활발한 신의 생민(生民)으로 만들기 를.29) 이러한 논설은 당시 다양한 일본 종교의 조선포교 시에 사용된 전형적인 논리였다.30) 즉 일본 은 선진국으로서 정치, 경제면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식민지를 지도할 ‘책무’가 있으며, 그 정 신적인 향상을 담당하는 것은 일본 종교라는 논리이며, 이는 말할 것도 없이 각 종교가 자신의 존재의의를 행정측에 인정시키기(혹은 탄압을 면하기) 위한 논리였다. “조선인도 우리 제국 신민 의 일원이 된 금일, 시설상, 교육상 하루라도 빨리 충량한 신민으로서 감화, 유도하지 않으면 안 될 급무가 있습니다”31)라는 논설도 전형적인 천리교측으로부터의 ‘과잉적응’의 하나로 봐도 좋을 것이다. 천리교도도 당시 일본인 일반과 마찬가지로 조선인 멸시관을 갖고 있었음은 『미치노토 모』의 그 밖의 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32) 또한 행정측도 어떤 의미에서 노골적으로 천리교 에 ‘동화정책’의 일익을 담당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예를 들면 다음의 글이 대표적인 것이다. 그래서 제군은 자기 각자의 책임이 크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교조의 교(敎)를 세운 취지를 깊이 이해하여 천리교는 세계일렬(一列) 세상을 구제(濟世救護)할 대종교임을 잊지 말고, 조선인을 내 지인인 우리들과 같은 사상, 같은 풍습으로 동화시키는 것을 근본의 대목적으로 삼아 분투ㆍ노력하는 것이 포교규칙의 정신에 가장 잘 순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다른 생각 없이 이 한 길을 향해매진 하는 것이 실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33) 그러나 한편으로 본래 ‘곡저구제(谷底救濟)’라고 했듯이 하층민의 구제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 던 천리교에는 조선인 특히 여성이라는 “가장 아래의 민”부터 포교해야한다는 논조도 존재했다. 예를 들면 고지마 시바후네(小島柴舟)라는 인물은 외관상 여성은 항상 내방(內房)에 틀어박혀 있어 무세력인 것처럼 보이나, 실은 세력 있고 훌륭한 자로, 그들은 실로 일가의 중추이다. 특히 중류 이하에서 그러하다. 교조가 상류를 제2로 하고, 우선 29) 「韓人の救済」, 『みちのとも』1909년 6월호. 30) 예를 들면 진종(眞宗) 오타니파(大谷派)의 ‘한국병합’과 ‘조선포교’의 정당화 논리에 대해서는 졸저 『植民地朝鮮 の宗教と学知』(青弓社, 2009), 33-34쪽 참조. 31) 澤田善次郎, 「朝鮮布教の根本解決」, 『みちのとも』1917년 9월호, 90쪽. 32) 李元範, 앞의 박사논문, 171-184쪽. 33) 渡邊彰, 「朝鮮布教に就て」, 『みちのとも』1916년 12월호, 105쪽. 와타나베(渡邊)는 조선총독부의 직원으로 『天 道教と侍天教』(1919) 등 종교 관계 조사보고서를 몇 편인가 집필한 인물. 식민지 조선에서의 천리교 포교에 대하여 19 무학으로 숭고한 가르침에 접할 수 없는 하류사회의 구제를 목표로 하여 기운차게 일어서신 주지(主 旨)에서 보더라도 이들 문맹인 여성부터 하는 것이 대개 교조의 마음을 이해한 것이 아닐까.34) 라고 서술하고 있는데, 이렇듯 조선인에 대한 공감도 존재하였으며, 그것이 그들 포교의 기초에 있었음도 확실하다. 한국병합에 의해 일본인은 점점 많이 한반도로 이주하게 되었고, 천리교 신자나 포교사도 해마 다 증가해갔으나, 1919년 3 ․ 1운동의 충격은 커서 조선인 신자 수가 1919년에는 전년에 비해 2,500명 가까이 감소했음을 통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본문 말미의 표1 참조). 이사실은 천리교 로서도 상당한 위기감을 갖고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천리교는 1916년에 설립을 인가받은 채로 동결되었던 ‘교의강습소’를 1919년 10월에 개설했다.35) 이 시설에서는 특히 조선인 교도를 종교 적 지도자로 육성하는 것이 목표였으며, 수학 기간이 6개월이었다. 1929년 이후는 일본인의 입 학을 허용하지 않고 조선인의 천리교 교사를 양성하는 기관이 되었다. 앞 장에서 서술한 대로 1920년에 ‘포교규칙’이 개정되었는데, 천리교 본부에서는 이것을 규제 완화, 교세 확대의 기회로 간주했다. 당시 조선포교관리자인 하루노 기이치(春野喜市)는 “이 개정 규칙의 발포는 모름지기 본교 포교사의 활약에 좋은 기회를 부여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36)고 하여, 천리교가 조선인 포교의 실적을 올림으로써 조선총독부의 천리교에 대한 지원도 이끌어낼 것을 기도하고 있었 다.37) 그들은 종교적인 활동의 일환으로서 ‘봉사활동’에도 힘을 쏟았다. 예컨대 1922년 가을부터 겨울에 걸쳐 평양에서 장티푸스가 유행했을 때, 경성천리교청년회는 환자에 대한 간호를 신청했 으며, 그들의 기록에는 많은 환자의 기적적인 회복과 신자의 헌신적인 활동이 천리교의 옳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기술되어 있다.38) 이러한 활동도 교세 확대와 더불어 조선 사회에서 천리교 의 지위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34) 小島柴舟, 「どうすれば速に朝鮮を天理教化することが出来るか」, 『みちのとも』236호, 1911년 7월, 40쪽. 35) 吉川文太郎, 『朝鮮の宗教』(朝鮮印刷株式会社, 1921), 301-303쪽. 36) 春野喜市, 「朝鮮布教規則改正と鮮民教化の急務」, 『みちのとも』342호(1920.5), 75쪽. 37) 李元範, 앞의 박사논문, 164쪽. 38) 国井泉編, 『平壤の腸チブスと天理教徒の活動』(1922). 이것은 당시 경성천리교청년회 회장이었던 구니이(国井)의 자비 출판인 듯하다. 38쪽의 팸플릿이다. 20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3-2. 천리교와 조선의 관계를 둘러싸고 – 외국어학교, 포교, 조선인관 일본 본국에서도 1925년에 해외 전도를 담당할 인재를 육성할 목적으로 ‘천리외국어학교’가 설 립되었는데, 거기에는 ‘조선어’ ‘지나어 제1(北京官話)’ ‘지나어 제2(광동어)’ ‘말라이(馬來)어’ ‘러 시아어’의 5학과가 설치되었다. 일본의 사립학교에서 처음으로 조선어를 전공하는 학과를 둔 것 은 특필할 만하다. 또한 가정으로 들어갈 여성 포교사를 양성할 목적에서 남녀공학으로 한 점39) 도 주목할 만하다(남녀공학제는 2년 후에 폐지되었으나 여학교는 존속). 설치된 코스는 일본 주 변의 언어이며, 이는 천리교는 우선 가까운 데서부터 확대해간다는 이념에 따른 것이었다고는 하 나, 제국 일본과 보조를 맞추었다는 측면은 부정할 수 없다. 단 조선어를 공적인 장소에서부터 서서히 축소시켜 가려는 조선총독부의 방침과는 반대로 조선어에 의한 포교를 줄곧 시도한 점도 지적해야 한다. 예를 들면, 一. 포교자는 조선어를 충분히 연구할 것(외국인 선교사처럼). 一. 조선인에게 일본국어를 충분히 가르칠 것. 一. 포교자는 민족 개성을 철저하게 알 것. 一. 포교자가 되려는 자는 교의의 해설에 깊은 주의를 기울이는 동시에 걸핏하면 향토적 종 교로서 설명하려는 것을 배척하고 세계적 종교로서의 입장에서 말할 것.40) 이라는 포교방침이 조선 포교의 책임자 입에서 나오고 있다. 그 한편으로 방언으로 쓰인 교조의 가르침을 번역하기가 곤란하다는 점도 표명되고 있다.41) 어떤 종교라도 포교지의 언어 습득 및 가르침의 번역은 필수의 과제이지만, 천리교는 교조가 방언으로 가르침을 주고 있어 이식의 곤란 이 보다 더 의식되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조선인 차별에 대한 분노의 소리도 『미치노토모』에 게재되어 있다 순진하고 애교 있는 귀여운 그들에 대한 일본인의 태도는 자 어떨까요. 그들에 대해 일본인의 오만 한 사람을 사람으로 생각지 않는 듯한 태도, 취급을 도처에서 발견하여, 나는 이번 여행 중 일본인이 참을 수 없이 싫어졌습니다. 격정의 나의 가슴에서 불끈불끈 타오른 것은 배일(排日) 배일이라는 멈출 39) 諸井慶五郎, 「外国語学科の教育方針」, 『みちのとも』1925년 3월 5일호(433호), 21쪽. 40) 牧野栄一, 「朝鮮教化の実際」, 『みちのとも』1927년 11월 5일호, 34쪽. 41) 田代澤治, 「海外布教と文書伝道」, 『みちのとも』1925년 2월 5일호(431호), 21쪽. 식민지 조선에서의 천리교 포교에 대하여 21 래야 멈출 수 없는 분노였습니다. 과연 도(御道, 御道란 천리교도가 자신의 신앙을 가리키는 용어-인용 자)의 사람만큼은 달랐다고 여기서 단언할 수 없음은 정말 유감입니다. (중략) 그리고 일본어를 할 수 있는 지나인, 조선인과 접촉하여 말할 기회를 비교적 많이 가졌던 나의 마음에 심어진 “배일사상은 일 본인 스스로가 만든 것이다”라는 확신을 뒤집을 수 없음은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세계 일렬은 형제라 는 신념에 살고, 감로대(甘露臺)42) 건설을 이상으로 멀리 저 땅에서 활약하시는 책임이 무거운 도의 여러분, 또 앞으로 건너가려고 하는 분들에게 나는 마음으로부터 (이 점을) 생각해주시기를 바라고, 지 나인ㆍ조선인을 대신해서 만사 잘 부탁드린다고 말하고 싶습니다.43) 이러한 소리와 더불어 천리교 포교자는 과거 한반도에서 나쁜 짓을 한 자의 자손, 또는 환생이 므로 이번에는 조선을 위해 일하는 것이라는 논설도 게재되어 있다. 조선에서 포교하고 있는 자의 전생의 인연 자각에 대해 나는 이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조선에 와서 이렇게 열심히 고생을 해야 하는 것은 전생에 이 조선의 사람들에게 매우 폐를 끼쳤든가 은혜를 입었던 게 분명합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연구하면 잘 알 수 있듯이, 이 조선에서 중국 연해로 와서 매우 나쁜 짓을 했기 때문이죠. 그 당시의 자손이, 그 인간의 환생자가 이렇게 현재는 포교를 하여 보 은을 하고 있다고 자각했기 때문에, 고생을 해도 조선 사람들의 보은이 적다는 불만은 조금도 갖고 있 지 않다니까요.44) 단 이러한 소리는 역시 소수파였던 것도 사실이다. 대체의 논조는 앞서 몇 가지 사례를 든 대로 제국 일본의 의향에 따라 천리교를 통해 조선인을 일본인화하는 것이야말로 천리교의 사명이라 고 주장하는 것이었다.45) 한편, 천리교는 어떠한 교의와 사상을 가지고 조선포교를 열심히 시도하게 되었을까. 그것을 이하에서 고찰한다. 국가로부터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국가의 의향에 따르는 논설은 『미치노토모』에도 많이 보이 지만, 천리교는 20세기 초까지 공적인 교전으로서는 『미타구라우타(みたぐらうた)』46) 밖에 허용 42) ‘감로대’란 ‘인류 발상의 땅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천리교 본부에 설치되어 있는 대인데, ‘감로대 세계’는 이상 향을 지칭하기도 한다. 43) 田中正雄, 「満鮮を旅して何故泣いたか」, 『みちのとも』1929년 10월 5일호, 44-45쪽. 44) 「海外に於ける最初の教会長大峰仁三郎氏と語る」, 『みちのとも』1930년 12월 20일호, 54-55쪽. 45) 예를 들면 本田恒三, 「朝鮮布教に就て-朝鮮に於ける天理教の使命」, 『みちのとも』1928년 12월 5일호, 57-62쪽 등도 참조. 22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되지 않았고, 1903년에 편찬된 『天理教教典』은 이른바 국가신도로의 복종 하에서 원래의 가르침 이 대폭 삭제된 것이었다. 즉 당시의 천리교에는 『天理教教典』, 『미타구라우타』를 중심으로 하는 ‘겉의 세계’와 이부리 이조(飯降伊蔵)의 탁선(託宣, 오사시즈)이나 포교사의 구술 설교, 병치료 등 의 ‘안의 세계’라는 양면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겉의 세계’의 논리로서는 나카야 마 미키(中山みき)가 교전에 남긴 ‘세계일렬(世界一列)’이라는 말이 인간평등사상으로서 빈번히 인용되었고, 천리교는 모든 사람에게 열린 ‘세계종교’이며, 특히 한국병합 후는 새로 ‘동포’가 된 조선인이 가장 먼저 가르침을 전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졌다. 또한 조선 전도가 시작되었을 무렵 은 교조가 남긴 말로서, 구전으로 전해진 것에 “75년 지나면 일본 전국에 이 가르침이 퍼지고, 그 다음은 전세계에 천리왕명(王命)의 이름이 퍼진다”라는 것이 있으며, 이것이 해외 포교의 공 식적인 슬로건으로 채용되었다. 최초는 1922년 마쓰무라 기치타로에 의해 제창되었다고 한다.47) 다른 한편의 ‘안의 세계’는 어떠했는가. 관헌의 감시의 눈을 의식하여 전도활동은 병자를 방문 해서 병을 고치는 것이 중심이 되었다고 생각된다.48) 전술한 ‘오사시즈’에 대해서도 『미치노토 모』와 같은 공식적인 장에서는 일체 활자화되지 않았고, 각지의 교회는 본부에 가서 그것을 받아 와 교회 내에서만 전달했다. 본래 천리교 신자는 식민지의 지배권력에서 보면 ‘이단적’인 존재이 며, 기도에 의한 치병(治病) 행위는 까닥 잘못하면 ‘문명국’ 일본에는 있어서는 안 될 ‘치부’가 되 기 십상인 존재였다. 즉 천리교의 한반도 전도는 ‘문명’을 기치로 행해진 타종교의 전도와는 성 질을 달리 하며, 식민지의 지배원리나 그 논리로부터 벗어난 점이 늘 존재했다. 역으로 그 점이 조선인 신자를 획득케 하고, 전후에도 신앙이 계승된 큰 원인이었던 것이 아닐까.49) 단,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실제 “병이 나으면 조선인 신자는 오지 않게 된다”는 보고가 『미치 노토모』에 반복해서 등장한다. 예를 들면 ‘부산선교소’를 연 오미네 진자부로(大峯仁三郞)는 다음 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도움이 효력을 보고 수호(守護)를 받으면 그들은 모두 기꺼이 참배에 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감사하다, 수호를 받으면 다행이다 라는 정도의 감사의 마음은 갖고 있어도, 내지인의 그것처럼 심신을 모두 가미사마(神様)에게 받쳐 가미의 길을 가고자 하는 마음은 도무지 없는 것 입니 다.50) 46) 천리교 원전의 하나. 기도양식 시 기도 말과 춤의 전거가 된다. 47) 「七十五年(しちじゅうごねん)」, 天理大学おやさと研究所編, 『改訂天理教事典』(1997), 398쪽 참조. 48) 平木實, 「明治期における天理教の朝鮮ㆍ韓国伝教史」, 同 『朝鮮社会文化史研究』(国書刊行会, 1987), 476쪽. 49) 李元範, 앞의 박사논문, 7-8쪽. 50) 大峯仁三郎, 「物質的援助の必要」, 『みちのとも』432호, 1925년 2월, 65쪽. 식민지 조선에서의 천리교 포교에 대하여 23 병만 나으면 천리교건 무당이건 마찬가지라는 인식인 채로는 천리교의 ‘정착’은 어렵다는 것이다. 조선인에게 천리교 포교사는 역시 무당과 같은 존재로서 인식되었다.51) 조선인으로 최초의 교회 장이 된 김선장(金善長)이라는 인물은 “일본의 무당이 되었다”고 가족들로부터 비난을 받았고,52) 천리교 교의강습소에서 통역을 하고 있던 최정현(崔禎鉉)이라는 인물도 천리교의 의례는 조선의 무당과 비슷하다고 말했다.53) 김태훈은 조선민중은 천리교 식의 장의(葬儀) 등 “근대가 되어 형 식이 만들어진 의례”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그것이 일종의 ‘매력’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라 고 시사했는데,54) 확실히 무당과 완전히 같아서 무당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정도까지 천리교는 침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병치료는 천리교의 신자 획득 및 신앙의 ‘입구’에는 필수적인 것이었다고 해도, 그 이후 신앙을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그것 이상으로 천리교의 세계관 을 이해시킬 ‘교의’의 정착이 필요하다고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천리교는 초기 단계 부터 조선어를 배우려고 했고, 강습소나 외국어학교를 설립하려고 했던 것이다. 또한 조선인 신자도 천리교의 일본 중심적인 가르침에 대한 위화감을 표명하고 있는 사례가 있다. 일부분의 교리 “가지는 꺾이고 뿌리는 번성하다”라는 식의 설을 일본이 아닌 나라, 일본인이 아닌 자에게 단적으로 설교하면, 그들은 아마도 무시당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 악감정을 품을지도 모른다. 아 니 조선인은 일본인임에 틀림은 없으나, 당당한 4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배달민족으로, 인정, 풍속, 습관이 매우 굳어져 있으니 ‘도움(おたすけ)’이 아무리 조선에 적합할지라도 우선 상대를 얻지 못하여 도울 수가 없는 것이다.55) 이것은 일본 중심의 가르침에 대한 위화감과 포교 부진의 원인을 설명하는 동시에 조선인으로서 의 긍지도 동시에 표명하고 있는 논설이다. 그는 이어서 본교의 경우는 발생지인 일본의 국체와 적합하지 않은 점이 없지도 않다. 개론하자면 일본의 역사 51) 李元範, 앞의 박사논문, 147쪽. 52) 李元範, 앞의 박사논문, 193쪽. 그가 신앙에 들어간 경위에 대해서는 「朝鮮人最初の教会長 金善長氏の活動振 り」, 『みちのとも』572호, 1930년 12월 20일호, 25-28쪽. 김선장은 1922년에 설립된 ‘미선(美鮮)선교소(경남 마 산)’의 교회장. 이것은 최초의 ‘조선인교회’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었다. 53) 崔禎鉉, 「朝鮮旧習の信仰から見たる天理教の価値」, 天理教教義講習所, 『にほいかけ』4호(1923), 4쪽. 54) 金泰薰, 앞의 박사논문, 115쪽. 55) 金翔鳳, 「朝鮮と天理教」, 『みちのとも』472호, 1924년 10월 20일호, 46쪽. 24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연대(年代)와 본교의 니해기(泥海紀, 천리교의 창성신화. 니해에서 인간이 탄생했다는 것 등이 묘사되어 있다. -인용자)의 연대설은 전혀 다르다. 또 본교의 의식 때 추는 춤과 노래는 일본 유래의 풍속과 맞 지 않아 지금도 때때로 웃음을 사는 형국이다.56) 라고 했다. 조선인 신자는 천리교가 ‘일본의 국체’에서 비어져 나온 부분까지 똑똑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일본과 조선 사이를 중개하는 것은 외국어학교의 조선어 전공자 라고 말했다. 지금은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으니 가까운 장래에 조선어는 소멸할 것이라는 설을 일축하고, “적어도 4천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조선어이므로 조선인 최후의 일인에까지 그대로 있 는 것이다. 모름지기 조선어를 습득해서 교조의 도(道)를 조선 팔도에 널리 퍼지도록 해야 한 다”57)고 맺고 있다. 이상과 같이 천리교는 조선어 습득을 포교의 중요 과제로 삼고 있었음이 타종교와 비교할 때 두드러진 특징이나, 조선민족의 ‘존중’과 제국 일본의 ‘욕망’이 겹쳐진 지점에 그 포교활동이 있 었음은 역시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4. 나가며 – 전망과 과제 이상으로 조선총독부의 종교정책과 천리교의 조선포교에 대한 개요를 서술해왔으나, 남은 과제 도 많다. 우선 자료적 제약에서 오는 문제인데, 기관지 『미치노토모』 이외의 사료 발굴 및 확인 에 의해 좀 더 정밀하게 포교 실태를 규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만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국책에 발맞추면서도 반드시 거기에 모든 것을 내맡긴 것이 아닌 천리교의 실천은 한반도에 분명한 족적을 남겨, 제국 일본의 식민지사의 일부이면서도 그것 에 대한 대안(alternative)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56) 위의 글. 57) 위의 글, 47쪽. 식민지 조선에서의 천리교 포교에 대하여 25 【표 1】 식민지기 조선의 천리교 통계 布教所数 教師数 信者数(日本人) 信者数(朝鮮人) 布教所数 教師数 信者数(日本人) 信者数(朝鮮人) 布教所数 教師数 信者数(日本人) 信者数(朝鮮人) 布教所数 教師数 信者数(日本人) 信者数(朝鮮人) 1907年 1908年 1909年 1910年 1911年 1912年 1913年 1914年 13 24 14 28 817 3,362 420 3,447 1915年 1916年 1917年 1918年 1919年 1920年 1921年 1922年 26 33 38 41 43 45 50 55 64 72 74 76 81 84 91 119 21,583 12,523 13,454 14,773 15,869 17,135 18,409 19,830 7,822 7,650 7,764 5,244 6,146 6,503 5,591 1923年 1924年 1925年 1926年 1927年 1928年 1929年 1930年 62 65 86 90 103 92 96 99 245 283 317 155 227 91 207 219 21,620 24,249 28,296 28,705 28,659 28,978 29,300 27,729 5,818 8,247 8,625 8,347 10,551 12,042 6,541 10,249 1931年 1932年 1933年 1934年 1935年 1936年 1937年 1938年 106 112 134 162 155 160 172 176 242 259 317 393 339 354 376 398 29,594 33,763 35,054 37,152 37,378 36,883 32,893 33,445 12,613 14,857 15,257 17,634 17,757 16,916 15,684 20,318 * 의거한 사료는 다음과 같다. 『朝鮮ニ於ケル宗教及享祀一覧』昭和元~13年調査版 『朝鮮総督府統計年報』明治41~大正12年調査版・ 昭和4年調査版 『朝鮮総督府施政年報』明治44~昭和4年調査版 『最近に於ける朝鮮治安状況』昭和11年5月 식민지 조선에서의 천리교 포교에 대하여 27 植民地朝鮮における天理教の布教について ─機関誌『みちのとも』を中心に─ 川瀬貴也 京都府立大 歷史學科 <目 次> 1. はじめに 2. 統監府・朝鮮総督府の宗教政策の概要 3. 天理教の朝鮮布教 ─『みちのとも』に見るその実態 4. おわりに─展望と課題─ 1.はじめに 日本の諸宗教は、帝国日本の朝鮮侵略と歩調を合わせ、19世紀末から朝鮮半島への渡航を開始 した。天理教は日本の新宗教の中で最も早く朝鮮半島に渡り、しかも現在までその命脈が保たれてい るものとして、その信仰の継承などについての研究が重ねられている1)。 本稿ではまずは統監府・朝鮮総督府の宗教政策を概観し、天理教の機関紙であった『みちのとも (道乃友)』の朝鮮半島布教に関する記事を中心に取り扱い、当時の天理教の布教実態、そして 植民地や信仰に対する天理教徒の意識はどのようなものであったのかということを、1930年代初頭までを 対象に探ってみようと思う。 1) 現在の韓国社会における天理教の研究として、이원범・남춘모 지움『한국속 일본계 종교의 현황』大旺 社、서울、2008年、李賢京「韓国天理教三世信者の信仰継承」、李元範・櫻井義秀編『越境する日韓宗教文 化』北海道大学出版会、2011年、陳宗炫『韓国人の日系新宗教受容の構造─天理教を事例として─』東北大学 大学院文学研究科修士論文、2014年などを参照。 28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1.統監府・朝鮮総督府の宗教政策の概要 日露戦争終結後、日本は1905年に第二次日韓協約を締結させ、韓国を保護国化して統監府を設置し たが、その統監府が発布した宗教関連の法令として、1906年11月の統監府令「宗教ノ宣布ニ関スル規 則」(全8条)が挙げられる。この法令の概要を述べれば、第1条・2条において、「内地」の諸宗教の 布教者に対して統監の認可を受けるべき事が定められている。第2条に「帝国臣民」とあるように、この法令 は基本的に日本人入植者に対してのもので、保護国化以前から活動をしていた欧米のキリスト教の宣教団や 朝鮮人宗教者は適用対象外であった2)。しかもこの法令で使用されている 神道 とは、 教派神道3) と「神 社神道」が混同されている。この時はまだ 国家神道 的な政策は行われていなかったと見てよい。しかし、 当時の朝鮮半島には、次々と日本人移民が渡航し4)、彼らは自主的に神社を建立していた。これら 居留 民神社 は元々国家神道政策とは関係のないものであったが、これらの神社が後に統制の対象となり、国家 神道政策の末端の役目を担うことになる。 さて、1910年、日本は韓国を併合したが、朝鮮総督府が本格的な宗教政策に乗り出すのは、1911年6 月に発布した「寺刹令」からである。寺刹令の内容を概観すれば、その柱は、寺院の併合、移転・廃 止・名称の変更及び寺院の財産に関しての処分などに対して、全て朝鮮総督の許可を必要とする内容で あった。さらに同年「寺刹令施行規則」が発布され、「寺刹令」と同日施行された。この寺刹令施行規 則の内容は、まず朝鮮内の大寺30を本山として指定し(第2条)、全国1300余りの寺院と30本山(後に31 本山)との本末関係を規定し、トップダウンの管理が行き届くことを眼目としたものであった5)。 続いて1915年8月に「布教規則」(全19条)が発布、同年10月から施行された。この「布教規則」 は、布教を試みるあらゆる宗教を対象とした法令であった。まず、第1条に「宗教ト称スルハ神道、仏道及 基督教ヲ謂フ」とあることが注目される。公認宗教は、この三教と明文化されたのである。この法令は朝鮮 半島における宗教活動全般を、朝鮮総督の管理下に置くことを最大の目的としていた。この法令は日本人 以外の外国人(欧米からのキリスト教の宣教団など)、朝鮮人にも適用された。より重要なのは各教団の朝 2) 金泰勲は新資料を提示して、「朝鮮人宗教者も対象だった」と述べている。金泰勲『「淫祠邪教」から「世界宗教」へ─天 理教の近代体験』立命館大学博士論文、2011年、103-104頁。 戦前の宗教行政において公認されていた神道系新宗教。全部で13派あり、黒住教、金光教、天理教も組み入れられ ていた。 3) 戦前の宗教行政において公認されていた神道系新宗教。全部で13派あり、黒住教、金光教、天理教も組み入れられ ていた。 4) 木村健二『在朝日本人の社会史』未来社、1989年、7-29頁。統計では、1876年から1904年まで、年平均2,686名が渡 航しており、1910年の韓国併合時には約17万人の日本人居留民が存在した。 5) 韓皙曦『日本の朝鮮支配と宗教政策』未来社、1988年、67-71頁。 식민지 조선에서의 천리교 포교에 대하여 29 鮮在住の布教管理者を選定させ、その解任権を掌握したこと(第3~7条)である。それまで適用されてきた 統監府時代の「宗教ノ宣布ニ関スル規則」では、行政側に管理者の「認可権」は存在したが、その管 理者の「解任権」は存在しなかったのである。「寺刹令」と「布教規則」により、あらゆる教団のトップの 人事は朝鮮総督により左右される事となったのである。また、当時の朝鮮半島に誕生しつつあった新宗教教 団(行政は「類似宗教」「宗教類似団体」と呼んだ)もこの「布教規則」の適用を受ける事が銘記され ていることも注意を引く(第15条)。 また、「布教規則」と同時に、全20条よりなる「神社寺院規則」が発布され、朝鮮内に神社や寺院を 設立する際の基準が決められた。ここで注意すべきは「神社寺院規則」とあるように、神社と仏教寺院が 同じカテゴリーに入れられている事である。日本本国においては既に、1900年に内務省社寺局が分割さ れ、神社は内務省神社局、宗教行政は宗教局が担っており(この宗教局は1914年に文部省に移管)、 神社と仏教寺院は別のカテゴリーのもの、即ち 神道非宗教論 は官僚機構の中で形式として実現されてい た。日本人移民を主な対象とした 神社寺院規則 が、端なくも当時の公認イデオロギーであった「神社非 宗教論」を、法令の名で密かに裏切る形になっていたのである。それは、朝鮮総督府が仏教寺院も神社 も、支配のための末端施設と見なして、両者に違いを殆ど認めていなかったからでもあるだろう。 まとめるなら、併合後の宗教政策は、「本末制度」などの導入により朝鮮仏教を御用化しつつ、宗教法 令の適用範囲を広げ(欧米のキリスト教宣教団や宗教類似の団体)、内地の公認宗教(神道・仏教) を緩やかに浸透させることを企図したものであったといえよう。つまり「内地」と同じような宗教状況へ移行させよ うとした 同化主義 、一種の「内地延長主義」であった。 初代総督寺内(てらうち)正毅(まさたけ)と二代総督長谷川(はせがわ)好道(よしみち)の下、いわゆる「武 断政治」が行われ、朝鮮人に対して高圧的な統治が行われていたが、その帰結であった1919年の「三・ 一独立運動」の衝撃は大きく、特にこの運動の中心人物が天道教徒やキリスト教徒、仏教徒ら「宗教 人」であったことは、総督府に深刻に受け止められた。1919年8月に第三代総督に就任した斎藤(さいとう) 実(まこと)は、それまでの武断政治を改め、いわゆる「文化政治」を標榜し、総督府の体制を変革しようとし たが、これも実は同化政策や警察力の強化などを中心としたものであった。一方、その枠の中でのある程度 の自由を認め、親日分子を育成することなどに力を注いだ6)。宗教関係者も当然その「親日分子」として育 成されようとした。 三・一独立運動から総督府の宗教政策も転換する事になる。まず、宗教政策改正の一環として、1919 年8月に学務局の下に新たに「宗教課」が設けられ、宗教行政に関する事務を担当した。 そして 布教規則 も1920年に改定されている。新たに加えられたのが、第12条と第14条である7)。これら 6) 姜東鎮『日本の朝鮮支配政策史研究』東京大学出版会、1979年、参照。 30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新たに付け加えられた条文は、取り締まりに関する条文であり、総督府の宗教に対する監督権の強化が目的 であることは明白である。大日本帝国憲法第28条8)の「信教の自由」と同様に、「安寧秩序を妨げる恐れ がある」と見なされたときは、その弾圧は避けられないものとなった。 「文化政治」をスローガンとした斎藤実総督と政務総監水野(みずの)錬(れん)太郎(たろう)は、よくキリスト 教宣教師と会合も持ち、積極的に懐柔策に努めた9)。斎藤と水野の宣教師懐柔策はおおむね成功し、宣 教師の「親日化」は促進された。 しかし一方、総督府は「鞭」も忘れず、例えば学務局長柴田(しばた)善(ぜん)三郎(ざぶろう)は当時キリ スト教系学校で問題になりつつあった「御真影問題」について、 諸氏が帝国の国民性及(および)制度に対する研究の不十分な為稍(やや)もすれば基督教主義の国民性又は 自国の制度風俗習慣を移して直に帝国領土内に適用せむとし為(た)めに種々の誤解を生じ困難なる問題を惹起 する虞(おそれ)なしとせず就中(なかんづく)諸氏が陛下の御真影に敬礼することを一種の礼拝と誤認し基督教徒と して之に反対せんとするが如きは我国民性を解せざるも亦(また)甚だしと云はざるべからず10) と天皇の肖像への敬礼を、「内地」の神社参拝の際用いられた「神社非宗教論」のロジックをそのまま 「輸入」して、反対を一蹴している。総督府はこの論理でキリスト教側を説得し続けたが、この問題は、数 年後「神社参拝問題」をめぐって熾烈さを増すことになる。 総督府内部の改革や法令に関して述べると、1925年1月に学務局宗教課から、内務局地方課に神社行 政が移管されたことが大きい。この措置により、官僚機構として 神社非宗教論 を宣言したに等しいからであ る。また1936年8月には 神社寺院規則 が 神社規則 と 寺院規則 に分離され、法規上も 神社と宗教の 分離 が明確となった。この 神社規則 では、創設に必要な崇敬者数をそれまでの30名から50名に引き揚 げ、鳥居や社務所など様々な神社の施設を必須のものとした。このように神社設立のハードルを上げることは 朝鮮半島に神社を浸透させる政策としては一見逆行しているように見えるが、これは神社の乱立を防ぎ、神社 に威厳を保たせるための措置であった。また神社は 崇敬区域及び崇敬者戸数 の申告義務、そして崇敬 者の 総代会 を置くことも義務づけられ、これは後の 愛国班11) に繋がるような隣保管理体制の下地になっ 7) この第12条、14条は、天道教やキリスト教教会が三・一独立運動に大きな役割を果たしたことに鑑み策定され たものであった。その経緯については朝鮮総督府『朝鮮に於ける新施政』1920年、84-86頁、参照。 8) 帝国憲法第28条は「日本臣民ハ安寧秩序ヲ妨ケス及臣民タルノ義務ニ背カサル限リニ於テ信教ノ自由ヲ有ス」と いうものであり、「安寧秩序」の解釈により信教の自由は最初から制限されていた。 9) 姜東鎮前掲書、79-81頁。 10) 柴田善三郎「在鮮外国宣教師に望む」、『朝鮮』朝鮮総督府、1920年11月号、5頁。 11) 1938年発足した「国民精神総動員運動朝鮮連盟(1940年に「国民総力朝鮮連盟」と改称)」の末端組織。1939 식민지 조선에서의 천리교 포교에 대하여 31 た12)。以上、法令を中心に、植民地朝鮮における宗教政策を概観した。 2.天理教の朝鮮布教─『みちのとも』に見るその実態 本章では、天理教機関誌『みちのとも』13)の記事や、天理教内部に残る記録や先行研究を中心に、 天理教の朝鮮半島布教がいかなる性格と歴史を持っていたか、ということを概観する。 2-1 天理教の朝鮮布教とそのロジック まず、記録の上では、天理教の朝鮮布教は、日清戦争の直前である1893年に、高知県の里見(さとみ) 治(じ)太郎(たろう)・里見半次郎という親子の信者が釜山に渡り布教活動したのが始まりとされている14)。もと もと彼らは九州方面に布教に来たが、そのまま知り合いを頼って釜山に渡り、3,4年ほど活動したという。本 部にも布教史の派遣を依頼し、本部からも さあさあ心勇んですれば何時なりと(明治26(1893)年10月19 日) という おさしづ15) をもらってもいた。信者となった朝鮮人を伴って高知に戻り、朝鮮語を学んだという記 録も残っている16)。1894年の『みちのとも』(1894年11月、第36号)には、「神道と海外布教」という記 事があり、朝鮮への布教を試みるべきであるとの論説が掲載されているのを見ても、日清戦争を契機に、日 本人の目が朝鮮に向かい、釜山などでの日本人の活動が活発となり、天理教もその時流に乗ったと見ること ができるだろう17)。しかし、19世紀末までは天理教信者も朝鮮半島で安定した生活基盤を持つことができ ず、しかも国内では内務省による「秘密訓令18)」により活動自体が圧迫を受けており、本格的な布教は20 年2月には朝鮮全土で結成された。 12) 高谷(たかたに)美穂「植民地朝鮮における神社政策の展開と実態」、姜徳相先生古希・退職記念論文集刊行 委員会編『日朝関係史論集』新幹社、2003年、363-373頁。 13) 1891年12月に創刊され、現在まで続く天理教の機関誌。『道の友』『道乃友』など、表記はたびたび変わるが、1928 年以降は『みちのとも』。本稿では『みちのとも』と表記する。 14) 高野友治『天理教伝道史X(海外編)』道友社、1975年、2-4頁。 15) 「おさしづ(おさしず)」とは、広い意味では教祖中山みきと教団幹部であった飯降伊蔵(いぶりいぞう)に下さ れた「神託」を指す。特に教祖死後は、教団内の「本席」という地位に就いた飯降に、天理教信者は重要な決定 を下すときは神意を確かめるために伺いを立て、そのとき下った口述の教えを「おさしづ」と呼ぶ。それをま とめた『おさしづ』は天理教の教典の一つとされる。 16) 『天理教高知大教会史 第一巻』1981年。 17) 大谷(おおや)渡(わたる)「天理教の朝鮮布教」、『天理教の史的研究』東方出版、1996年、157頁。 32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世紀、日露戦争前後からとなる。1902年には福岡から中村順平という布教師が釜山に渡り、日本人居留 民と朝鮮人に若干の信者を得た。1904年に開設された釜山布教所は天理教の朝鮮半島における最初の教 会であった。しかし上に挙げた初期の朝鮮布教者は、「不法入国」や「医薬妨害」などの理由で「退韓 命令」を何度も出されたような人物であり、日本の官憲から見れば、日本勢力の進出には却って邪魔になる 「反文明的」な存在として認識されていた19)。 1903年には香川県の信者数名ががソウルに渡り(彼らの多くは大工で、当時仕事を求めて朝鮮に渡って いる)、翌年風呂屋を開業し、その二階で布教を開始した。大熊こま子と片岡好造の姉弟は多くの信者を 獲得し、後の 京城大教会 の基礎を築いた20)。 初期の天理教の朝鮮半島への布教は、上記のように個人的な情熱に燃えた布教者が、教会の支援もそ れほど受けずに渡っていった事例が多い。これは、日本本国においても、自分の身一つで見知らぬ土地に 赴く 単独布教 というスタイルが一般的でもあったからである21)。また、里見半次郎に下された上記の「おさ しづ」を見ても分かるように、「神意」を至上のものとし、法秩序には無頓着な信者の行動が賞賛されてい た節さえある。『みちのとも』には、「里見半次郎氏は奮然朝鮮国に向かつて布教を試みられたり(中略) 実に同氏の此(この)挙のごときは布教家の亀鑑となるも敢へて過当にあらざるなり22)」との記載もあり、彼等の ような無鉄砲とも思える単独布教が教団内で賞賛されていたことが分かる。だが、そのような雰囲気も先述の 1896年の「秘密訓令」で萎んでしまった23)。 1906年には統監府令 宗教ノ宣布ニ関スル規則 が施行されたので、それにともなって天理教本部も 韓国 布教管理者 を設置し、幹部教徒の一人であった松村吉(きち)太郎24)が1908年それに就任した。このこと は、天理教本部が、朝鮮半島で困窮している個人布教者を統率し、それぞれが所属教会の支援のもとで 布教活動を中央集権的に行うという方向に転換したことを意味していた。松村の韓国布教管理者就任を知ら 18) 1896年4月に出された内務省の訓令で、警察による取り締まりが強化された。 19) 李元範『日本の近代化と民衆宗教─近代天理教運動の社会史的考察』東京大学博士論文、1995年、121頁。 20) 京城大教会の略史は、金子圭助『天理教伝道史概説』天理大学出版部、1992年、162-163頁、天理大学おやさ と研究所編『天理教事典(教会史編) 』天理教道友社、1989年、の当該項目(218-222頁)を参照。教会自身 による歴史は、京城大教会編『ものだね─京城の母大熊こま子の道』天理教京城大教会、1998年、参照。 21) 島薗進は、天理教は単独布教者のようなカリスマを多く抱え、明治中期以降の発展の基礎になったと指摘し ている。島薗進「天理教の都市布教─浜松市の場合」、『続 都市社会の宗教』東京大学宗教学研究室、1984 年、108頁。 22)『みちのとも』1893年12月号、12頁。 23) 李元範前掲博士論文、126頁。 24) 教祖一家の中山家とは姻戚関係にあり、教団内の様々な役職を歴任。初代真柱(しんばしら)(真柱とは、天 理教の最高責任者。教主。)中山眞之亮(しんのすけ)の側近でもあった。高安(たかやす)大教会(大阪府八 尾市)会長。 식민지 조선에서의 천리교 포교에 대하여 33 せる記事が掲載された『みちのとも』には、 韓国に布教せんとする者は、履歴書を添て上級教会25)を経由 し教長の認可を得て管理者に届け出べし26) とある。当時の布教者は、釜山、仁川、ソウルを中心に活動 していたが、日本国内での生活や布教の行き詰まりから海を渡るものも多かったのである。そのことは当時天 理教の布教師は 人を助けに来ているのか、自分が助かりに来ているのか訳が分かりません27) と統監府の役 人から批判されたことからも察せられよう。また、同年1908年11月に、天理教は一派独立28)を果たし、独自 の宗教活動ができるようになったことも、朝鮮布教の組織化に拍車を掛けたであろう。1910年韓国併合が行 われ、ソウル(京城)において布教管理所の建設が開始された。続いて1911年に「天理教朝鮮布教規 定」と「朝鮮布教監理諸規定」が定められ、改めて朝鮮総督府の認可を受けて、京城に朝鮮布教管理 署が設置された。併合前後の『みちのとも』の論説においては、「遅れた」朝鮮人を精神的に指導する旨 が述べられた。例えば、以下に引用するものなどが代表的な論説である。 吾人は天理教の布教師諸君に望む、諸君が内地に於てなしつつある其の真摯熱誠なる「ひのきしん(「ひのき しん」とは、天理教用語で奉仕活動を指す─引用者注)」的生活を、彼等韓民の間に移して、直接に親しく 彼等と精神生活を共にしつつ、彼等の事大的に固陋なる精神に此の新らしき偉大なる「ひのきしん」の大道義を 鼓吹し、彼等を化して我徒の如く、天を楽み、地を楽み、人を楽しむところの生々活発なる神の生民たらしめんこ とを29) このような論説は、当時の様々な日本宗教の朝鮮布教の時に用いられる典型的なロジックであった30)。つま り、日本は先進国として、政治・経済面だけではなく、精神的にも植民地を指導する「責務」があり、その 精神的な向上を担当するのは日本宗教である、とのロジックであり、これは言うまでもなく各宗教が、自分の 存在意義を行政側に認めさせる(もしくは弾圧を免れる)ためのロジックであった。「鮮人も我が帝国臣民の 一員になつた今日、施設の上より、教育の上より、一日も速かに忠良なる臣民として感化誘導せねばならぬ 急務あるのであります31)」という論説も典型的な天理教側からの「過剰適応」の一つと見て良いだろう。天 25) 天理教はピラミッド状の組織形態を採用し、本部・大教会を頂点に、各地方の分教会が組織されている。つ まり、親子のような「教会の系列」が重視される。 26)「韓国布教者の心得」、『みちのとも』1908年11月号。大谷前掲書より再引用。 27) 松村吉太郎『道の八十年』養徳社、1950年、251頁。 28) それまでの天理教は「神道本局」附属の一宗派として扱われ、自由な宗教活動もできず、教義面でも大きな 制約を受けていた。 29)「韓人の救済」、『みちのとも』1909年6月号。 30) 例えば、真宗大谷派の「韓国併合」と「朝鮮布教」の正当化のロジックについては、拙著『植民地朝鮮の宗 教と学知』青弓社、2009年、33-34頁、参照。 31) 例えば、真宗大谷派の「韓国併合」と「朝鮮布教」の正当化のロジックについては、拙著『植民地朝鮮の宗 34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理教徒も、当時の日本人一般と同様な朝鮮人蔑視観を保持していたことは、そのほかの『みちのとも』の記 事でも確認できる32)。また行政側も、ある意味露骨に、天理教に「同化政策」の一翼を担うように要求して いる。例えば、 そこで諸君は自己銘々の責任の大なることを常に念頭に置き、教祖立教の本旨を体認して、天理教は世界一 列済世救護の大宗教であると云ふことを忘れず、朝鮮人を内地人の吾々と同じ思想、同じ風儀に同化することを 根本の大目的として、奮励努力せらるるのか(ママ)(が)、布教規則の精神に、最も良く順応したる所作である と考を定め、他念なくこの一途に向て猛進せらるるのが、誠に肝要であると思ひます33)。 というようなものが代表的なものである。 しかし一方で、元々「谷底救済」というように、下層民の救済をスローガンとして挙げていた天理教には、 朝鮮人、特に女性という「一番下のもの」から布教するべし、という論調も存在した。例えば小島柴舟という 人物は、 外観によると婦人は常に内房に籠居させられて居て無勢力のようだが、其実、勢力たるや、スバラシイ者で彼 等は実に一家の中枢である。殊に中流以下に於て然りである。教祖が上流を第二とし、先づ無学にして崇高な る教へに就き得ざる下流社会の救済を目標として、猛然立たれた主旨よりするも、此等文字なき婦人よりするは蓋 し教祖の心を得た者ではあるまいか34)。 と述べているが、このような朝鮮人への共感も存在し、それが彼等の布教の基礎にあったことも確実なので ある。 韓国併合により、日本人はますます朝鮮半島に移住するようになり、天理教信者や布教師も年々増加して いったが、1919年の3・1運動の衝撃は大きく、信者数も1919年には朝鮮人信者が前年に比べ2500人近く 減少していることが統計からも分かる(末尾の表1参照)。このことは天理教としても相当な危機感を持って受 け止められたであろう。天理教は、1916年に設立を認可されたまま凍結されていた「教義講習所」を、1919 年10月に開設した35)。この施設では特に朝鮮人教徒を宗教的指導者として育成することが目標とされ、半 教と学知』青弓社、2009年、33-34頁、参照。 32) 李元範前掲博士論文、171-184頁。 33) 渡邊彰「朝鮮布教に就て」、『みちのとも』1916年12月号、105頁。渡邊は朝鮮総督府の職員で、『天道教 と侍天教』(1919年)など、宗教関係の調査報告書をいくつか執筆した人物。 34) 小島柴舟「どうすれば速に朝鮮を天理教化することが出来るか」、『みちのとも』236号、1911年7月、40頁。 식민지 조선에서의 천리교 포교에 대하여 35 年の修学期間が設けられ、1929年以降は日本人の入学を許さず、朝鮮人の天理教教師を養成する機関と なった。前章で述べた通り、1920年に「布教規則」が改定されたが、天理教本部では、これを規制緩 和、教勢拡大のチャンスと見なした。当時の朝鮮布教管理者である春野喜市は「この改正規則の発布は 当(まさ)に本教布教師の活躍に、好機を与へられたものと見ることが出来る36)」と述べ、天理教が朝鮮人 布教の実績を上げることにより朝鮮総督府の天理教への応援を取り付けることも企図していた37)。宗教的な 活動の一環としての「奉仕活動=ひのきしん」にも力を入れ、例えば1922年の秋から冬にかけて、平壌で 腸チブスが流行したとき、京城天理教青年会は、その患者に対する看護を申し出ており、彼等の記録で は、数々の患者の奇跡的な回復及び信者の献身的な活動が天理教の正しさを証明するものとして記述さ れている38)。このような活動も、教勢拡大と共に、天理教の社会における地位を高めようとしたものだったと 言えるだろう。 2-2 天理教と朝鮮の関係をめぐって ─外国語学校、布教、朝鮮人観 日本本国においても、1925年に海外伝道を担う人材を育成するという目的で「天理外国語学校」が設 立され、そこには「朝鮮語」「支那語第一(北京官話)」、「支那語第二(広東語)」「マライ(馬 来)語」「ロシア語」の5学科が設置された。日本の私立学校で、初めて朝鮮語を専門とした学科を置 いたことは特筆される。また、家庭に入り込む女性布教師を育てる目的から男女共学にした点39)も注目に値 する(男女共学制は二年後に廃止されたが女学校は存続)。設置されたコースは、日本の周辺の言語で あり、これは天理教はまず近くから広めていく、という理念に沿ったものであったとは言え、帝国日本と歩みを共 にしたという側面は否めない。ただし、朝鮮語を公的な場所から徐々に縮小させていこうとする朝鮮総督府の 方針とは裏腹に、朝鮮語による布教をずっと試みていたことも指摘せねばならない。例えば、 一、布教者は朝鮮語を充分に研究すること(外国人宣教師の如く) 一、朝鮮人に日本国語を充分に教へること 35) 吉川文太郎『朝鮮の宗教』朝鮮印刷株式会社、1921年、301-303頁。 36) 春野喜市「朝鮮布教規則改正と鮮民教化の急務」、『みちのとも』342号、1920年5月、75頁。 37) 李元範前掲博士論文、164頁。 38) 国井泉編『平壌の腸チブスと天理教徒の活動』1922年。これは当時京城天理教青年会会長だった国井の自費 出版のようである。38頁のパンフレットである。 39) 諸井慶五郎「外国語学校の教育方針」、『みちのとも』1925年3月5日号(433号)、21頁。 36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一、布教者は民族個性を徹底的に知ること 一、布教者たらんとする者は其教義の解説に当り深甚の注意を払うと共にともすれば郷土的宗教として 説明しやうとすることを排して世界的宗教としての立場から話すこと40) という布教方針が、朝鮮布教の責任者の口から語られているのである。その一方で、方言で書かれた教祖 の教えの翻訳の困難さも表明されている41)。どのような宗教でも、布教先の言語習得および教えの翻訳は必 須の課題だが、天理教は教祖がヴァナキュラーvernacularな言語で教えを語っているので、移植の難しさは より意識されていたのだろう。 また、朝鮮人への差別に対する憤りの声も『みちのとも』に掲載されている。 無邪気な、愛きょう者の可愛い彼等に対する日本人の態度はまあどうでありませうか。彼等に対して日本人のごうま んな横柄な人を人とも思わぬ様な態度、扱ひを至る所見せつけられ私は本旅行中日本人が堪(たま)らなく厭(いと) はしくなりました。むらむらと激情の私の胸に燃え上がつたものは排日排日といふ止むに止まれぬ憤怒でした。遉(さ す)が御道(「御道(お道)」とは天理教徒が自分の信仰を指す用語─引用者注)の人だけは違つたものだ と此処に言ひ切る事が出来ないのは何と残念な事でせう。(中略)而し、日本語を操り得る支那人朝鮮人と語り 接する機会を比較的多く持つた私の心に植え付けられた所の「排日思想は日本人自らが作るものである」といふ 確信を翻(ひるが)へす事が出来ないのを如何ともなし得ません。世界一列は兄弟と云ふ信念に生き、甘露台42)建 設を理想として遙々(はるばる)彼の地に活躍される責任重きお道の皆様又今後行かれんとする方々に私は心から 考へて頂き支鮮人に代つて万事御願ひ申し度(た)いのでございます43)。 このような声とともに、天理教の布教者は過去に朝鮮半島でひどいことをした者の子孫、又は生まれ変わり であるから、今回は朝鮮のために働くのだ、という論説も掲載されている。 朝鮮に布教しているものの、前生の因縁自覚に就て私はかうした考を持つてゐるのですよ。この朝鮮に来てかう して、一生懸命に苦労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は、前生にうんとこの朝鮮の人に迷惑をかけてゐたか御恩になつて ゐたかに相違ないのですよ。我が国の歴史を研究しても良く分るやうに、随分この朝鮮から支那の沿海に来て大 変にひどい事をして置きましたからね、その当時の子孫が、その人間の生れ変りのものがこうして現在は布教させて 40) 牧野栄一「朝鮮教化の実際」、『みちのとも』1927年11月5日号、34頁。 41) 田代澤治「海外布教と文書伝道」、『みちのとも』431号、1925年2月5日号、21頁。 42)「甘露台」とは、「人類発祥の地を示すもの」として天理教本部に設置されている台だが、「甘露台世界」 は理想郷をも指す。 43) 田中正雄「満鮮を旅して何故泣いたか」、『みちのとも』1929年10月5日号、44-45頁。 식민지 조선에서의 천리교 포교에 대하여 37 貰つて御恩報じをしてゐると自覚しましたから、苦労又も、朝鮮の人々の御恩報じが少ないと云ふ不足は、少しも 持てないわけですからね44)。 ただしこのような声はやはり少数派であったことも事実である。たいていの論調は、先にいくつか事例を挙げ た通り、帝国日本の意向に従って、天理教を通じて朝鮮人を日本人化することこそが天理教の使命、とする ものであった45)。 さて、天理教は、どのような教義や思想から、朝鮮布教を熱心に試みるようになったのだろうか。それを以 下で述べる。 国家からの弾圧を避けるために、国の意向に沿うような論説は『みちのとも』にも多く見られるが、天理教 は20世紀初頭まで公的な教典としては『みかぐらうた46)』しか許されておらず、1903年に編纂された『天理 教教典』はいわば国家神道への服従のもと、元々の教えが大幅に削除されたものであった。つまり、当時の 天理教には、『天理教教典』『みかぐらうた』を中心とする「表の世界」と、飯降伊蔵の託宣(おさし づ)や布教師の口述説教、病気治しなどの「裏の世界」という両面があったと見ることが妥当であろう。 「表の世界」のロジックとしては、中山みきが教典に残した「せかい一れつ(世界一列)」という言葉が人 間平等思想として頻繁に引用され、天理教は全ての人に開かれた「世界宗教」であり、特に韓国併合後 は、新しく「同胞」となった朝鮮人は第一に教えを伝えるべき対象とされた。また、朝鮮伝道が開始された頃 は、教祖が残した言葉で口伝で伝わったものに「七十五年たてば、日本あらあらすます。それから先は、世 界隅から隅まで天理(てんり)王命(おうのみこと)の名を流す(75年が経てば、殆ど日本全国にこの教えは広ま り、そこから先は全世界に天理王命の名前が広がる)」というものがあり、これが海外布教に当たっての公 式なスローガンとして採用された。最初は1922年、松村吉太郎によって唱えられたという47)。 もう一方の「裏の世界」はどうであったか。そして官憲の監視の目を気にして、伝道活動は病人を訪ねて はそれを治すことが中心になっていたと思われる48)。先述の「おさしづ」についても、『みちのとも』のような 公式な場では一切活字にされず、各地の教会は本部に赴きそれを受け取り、教会内でだけ伝達した。そも そも天理教信者は、植民地の支配権力からすれば「異端的」な存在であり、祈りによる治病行為は下手を 44)「海外に於ける最初の教会長 大峰仁三郎氏と語る」、『みちのとも』1930年12月20日号、54-55頁。 45) 例えば、本田恒三「朝鮮布教に就て─朝鮮に於ける天理教の使命」、『みちのとも』1928年12月5日号、57-6 2頁なども参照。 46) 天理教原典の一つ。祈祷儀式の際の祈りの言葉と踊りの元になる。 47)「七十五年(しちじゅうごねん)」、天理大学おやさと研究所編『改訂 天理教事典』1997年、398頁、参照。 48) 平木實「明治期における天理教の朝鮮・韓国伝教史」、同『朝鮮社会文化史研究』国書刊行会、1987年、47 6頁。 38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すれば、「文明国」日本にはあるまじき「恥部」ともなりかねない存在であった。つまり天理教の朝鮮半島に おける伝道は、「文明」を旗印に行われた他宗教の伝道とは性質を異にし、植民地の支配原理やそのロ ジックからはみ出たところが常に存在し、逆にそれが朝鮮人信者を獲得させ、戦後も信仰が継承された大きな 原因だったのではあるまいか49)。 ただし、ここで問題が出てくる。実際「病気が治るとすぐに朝鮮人信者は来なくなってしまう」との報告が 『みちのとも』誌上で繰り返し語られている。例えば「釜山宣教所」を開いた大峯(おおみね)仁三郎(じんざ ぶろう)は お助けがあがり御守護を頂けば彼等は皆喜んで参拝に来るのです。けれども彼等は助けて頂ければ有難い、 御守護を頂ければ結構である位の感謝の念は有るにしても、内地人のそれのやうに心身共に神様に捧げて神一 條の道を通らして頂かうと云ふやうな心は更にないのであります50)。 と述べているが、病気さえ治れば、天理教だろうが、巫堂(무당)だろうが同じという認識のままでは、天 理教の「定着」は難しいということである。朝鮮人からは天理教の布教師はやはり巫堂のような存在として認 識されており51)、朝鮮人で最初の教会長になった金善長という人物は「日本の巫堂になった」と家族から非 難され52)、天理教教義講習所で通訳を務めていた崔禎鉉という人物も天理教の儀礼は朝鮮の巫堂と似てい ると述べているのである53)。金泰勲は朝鮮民衆は、天理教式の葬儀などの「近代になって形作られた諸儀 礼」に朝鮮人は「新しいもの」を発見し、それが一種の「魅力」になったのではないか、と示唆している が54)、確かに巫堂と全く同じで、取り替えの利くものならば、あそこまで天理教は浸透できなかったであろう。 ともかく、病気治しは天理教の信者獲得及び信仰の「入り口」には必須のものだったとしても、それ以降信 仰をつなぎ止めるためには、それ以上に天理教の世界観を理解させる「教義」の定着が必要だったと認識さ れていたのである。それゆえに、天理教は初期の段階から朝鮮語を学ぼうとしたし、講習所や外国語学校を 設立しようとしたのである。 また、朝鮮人信者も、天理教の日本中心的な教えにに対する違和感を表明している事例がある。 49) 李元範前掲博士論文、7-8頁。 50) 大峯仁三郎「物質的援助の必要」、『みちのとも』432号、1925年2月、65頁。 51) 李元範前掲博士論文、147頁。 52) 李元範前掲博士論文、193頁。彼が信仰に入ったいきさつについては、「朝鮮人最初の教会長 金善長氏の活 動振り」、『みちのとも』572号、1930年12月20日号、25-28頁。金は1922年に設立された「美鮮宣教所(慶 尚南道馬山)」の教会長。これは初の「朝鮮人教会」と呼べるものであった。 53) 崔禎鉉「朝鮮旧習の信仰から見たる天理教の価値」、天理教教義講習所『にほいかけ』4号、1923年、4頁。 54) 金泰勲前掲博士論文、115頁。 식민지 조선에서의 천리교 포교에 대하여 39 一部分の教理「枝は折れ根は栄え」と云ふ様な説などを日本にあらざる国へ、日本人にあらざるものに、単的 に説いたなら、彼等は如何に無視される様な気がして悪感を抱くかも知れない。否、朝鮮人は日本人に相違はな いが、堂々たる四千年の歴史を誇張してゐる倍達民族で、人情風俗習慣が極めて固まつてゐるから「おたす け」が如何に朝鮮には適合しても、先づ相手を得ずして、授ける事が出来ないのである55)。 これは、日本中心の教えに対する違和感と布教の不振の原因を説明するのと同時に、朝鮮人としての矜持も 同時に表明している論説である。彼は続けて、 猶、本教の如きは、発生地たる日本の国体に適合せざる点がないでもない。概論すれば日本の歴史年代 と、本教の泥海紀(天理教の創成神話。泥海から人間が誕生したことなどが描かれている─引用者注)の年 代説とは全然相異なる。又本教の神楽歌おどりは日本由来の風俗に合はざる為め、今でも間々笑はれる有様で ある56)。 と、朝鮮人信者は、天理教が「日本の国体」からはみ出す部分もしっかりと認識していた。そして最後に彼 は、日本と朝鮮の間を取り持つのは、外国語学校の朝鮮語専攻の者であると述べる。今は日本語を教えて いるから近い将来に朝鮮語は消滅するとの説を一蹴し、「苟(いやしく)も四千年の歴史を以てゐる朝鮮語で あるから、朝鮮人の最後の一人迄には其の儘あるものである。須らく鮮語を習得して、御教祖の道を朝鮮八 道に行き亘(わた)らしめねばならぬ57)」と締めくくっている。 以上のように、天理教は朝鮮語の習得を布教の重要課題としていたことは、他宗教との比較の上で際立っ た特徴であるが、朝鮮民族の「尊重」と帝国日本の「欲望」が重なった地点にその布教活動があった、 ということはやはり否定できないだろう。 55) 金翔鳳「朝鮮と天理教」、『みちのとも』472号、1924年10月20日号、46頁。 56) 同上。 57) 同上、47頁。 40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3.おわりに ─展望と課題─ 以上、朝鮮総督府の宗教政策と、天理教の朝鮮布教の概要を追ってきたが、残された課題も多い。ま ず、資料的制約から来るものであるが、機関誌『みちのとも』以外の史料の発掘及び確認により、もっと精 緻な布教実態を解明することが求められよう。 ただ、以上見てきたように、国策により沿いつつ、必ずしもそれに全てを委ねたわけではない天理教の実践 は、朝鮮半島に確かな足跡を残し、帝国日本の植民地史の一部でありつつ、それに対するalternativeを提 示していると思われる。 식민지 조선에서의 천리교 포교에 대하여 41 【表 1】植民地期朝鮮の天理教の統計 布教所数 教師数 信者数(日本人) 信者数(朝鮮人) 布教所数 教師数 信者数(日本人) 信者数(朝鮮人) 布教所数 教師数 信者数(日本人) 信者数(朝鮮人) 布教所数 教師数 信者数(日本人) 信者数(朝鮮人) 1907年 1908年 1909年 1910年 1911年 1912年 1913年 1914年 13 24 14 28 817 3,362 420 3,447 1915年 1916年 1917年 1918年 1919年 1920年 1921年 1922年 26 33 38 41 43 45 50 55 64 72 74 76 81 84 91 119 21,583 12,523 13,454 14,773 15,869 17,135 18,409 19,830 7,822 7,650 7,764 5,244 6,146 6,503 5,591 1923年 1924年 1925年 1926年 1927年 1928年 1929年 1930年 62 65 86 90 103 92 96 99 245 283 317 155 227 91 207 219 21,620 24,249 28,296 28,705 28,659 28,978 29,300 27,729 5,818 8,247 8,625 8,347 10,551 12,042 6,541 10,249 1931年 1932年 1933年 1934年 1935年 1936年 1937年 1938年 106 112 134 162 155 160 172 176 242 259 317 393 339 354 376 398 29,594 33,763 35,054 37,152 37,378 36,883 32,893 33,445 12,613 14,857 15,257 17,634 17,757 16,916 15,684 20,318 * 依拠した史料は以下の通り。 『朝鮮ニ於ケル宗教及享祀一覧』昭和元~13年調査版 『朝鮮総督府統計年報』明治41~大正12年調査版・昭和4年調査版 『朝鮮総督府施政年報』明治44~昭和4年調査版 『最近に於ける朝鮮治安状況』昭和11年5月 42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M E M O》 『開闢』의 탄생과 일본의 ‘종교철학’ 허수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開闢』의 탄생과 일본의 ‘종교철학’ 45 『開闢』의 탄생과 일본의 ‘종교철학’ 허 수 (許洙) 翰林大 翰林科學院 <목 차> 머리말 1. 종교적 사회운동과 개벽의 신체 2. 개벽의 자아, 3대 主義의 형성 3. 일본 ‘종교철학’의 專有와 消去 맺음말 머리말 근대 한국인의 정체성 형성에 일본의 근대지식은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본 발표는 이 질 문에 답하는 첫 시도로, 식민지 조선의 대표적인 계몽적 종합월간잡지 개벽(1920~1926)이 미디어 주체로 형성되는 과정에서 일본의 ‘종교철학’이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규명하고자 한다. 1990년대부터 식민지기의 사회 변화를 한국의 근대 형성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연구가 본격화되었다. 이에 따라 서양 근대문물의 수용 창구로서 일본에 주목하고 서구 및 일본과 식 민지 조선 간의 문화적 교섭양상을 규명하는 시도들이 이루어졌다. 발표자는 이 문제를 개벽 과 관련하여 살펴본 바 있다. 그리하여 서양 및 일본 근대사상이 개벽 지면에 소개되는 양 상, 천도교의 종교사상과 외래 사상의 접합 양상, 개벽 편집인이자 천도교 이론가인 李敦化 (1884~1950)가 일본의 ‘現象卽實在論’ 철학을 도입하여 천도교의 종교적 사회개조론을 형성 한 과정 등을 규명하였다.1) 그런데 이런 연구는 - 비록 이돈화가 개벽의 편집인으로서 그 46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논조에 큰 영향을 끼쳤으나 - ‘현상즉실재론’ 철학의 영향관계를 이돈화라는 ‘개인’ 차원에 국한하여 살펴보았으므로 그 철학이 한국에 끼친 영향을 제한적으로만 고찰한 한계가 있었다. 본 발표는 개벽이 미디어 주체로 탄생ㆍ지속하는 데 ‘현상즉실재론’ 철학이 깊숙히 개입하 였다는 가설을 세우고 이를 검증하고자 한다. 개벽을 미디어 주체로 간주한다는 것은 첫째, 개벽의 내용을 현실의 단순한 반영이나 주도층의 정치적 입장으로 환원시키지 않고, 매체로 서의 복합성과 상대적 통일성을 가진 것으로 파악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둘째, 주체형성은 창 간이라는 일회적 사건으로 완료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재생산 과정을 수반한다는 사실을 내포한다. 그것은 개벽이 사회적 매체로 인정받고자 ‘종교성의 억제와 정치성의 억압’을 감 수하였던 사실과 관계 깊다. ‘첫째’와 관련해서는 그동안 식민지 매체 연구에서 많은 성과가 나온 바 있다.2) ‘둘째’와 관련한 본격적 연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실정이다. 발표자도 선 행연구에서 개벽 매체의 성격을 규명하기 위하여 ‘둘째’와 유사한 관점을 제시한 바 있으 나,3) 그것은 분석적 범주로 사용되지 못하고 ‘인상기적 설정’에 머문 한계가 있다. 본 발표에서는 목차공간과 기사배열 등 개벽의 ‘신체’와 그 영역에 발표된 글들을 살펴보 고, 나아가 ‘主義’ 등 개벽의 ‘자아’에 해당하는 핵심적인 논설의 지향을 분석한다. 나아가 ‘신체’와 ‘자아’를 포괄하는 개벽의 미디어 주체 형성에 ‘현상즉실재론’ 철학이 연관된 양상 과 그 의의를 고찰하여 한국에서 근대가 형성되는 한 단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1) 허수, 이돈화 연구, 역사비평사, 2011, 2장ㆍ3장 참조. 2) 대표적인 연구성과로는 다음이 있다. 최수일, 개벽 연구, 소명출판, 2008 ; 임경석ㆍ차혜영 외, 개벽에 비 친 식민지 조선의 얼굴,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2007. 3) “식민지 시기에 창간된 미디어 ‘주체’로서의 개벽은, 근대 주체일반이 ‘去勢의 위협’을 통과하는 경험과 비슷하 게, 탄생 과정에서 식민지 조선 사회로부터 ‘정치성의 억압’, ‘종교성의 억제’를 강요받았다.”(허수, 「표상공간 속 의 쟁투 - 개벽의 표지 ・ 목차 분석」, 식민지 조선, 오래된 미래, 푸른역사, 2011, 114쪽). 『開闢』의 탄생과 일본의 ‘종교철학’ 47 1. 종교적 사회운동과 개벽의 신체 도개벽반은 ‘문화정치’기 천도교계가 주도한 종교적 사회운동의 간판 매체였다.4) 도개벽반은 1920 년 6월 신문지법에 의한 잡지로 발간되었으나, 창간호부터 잇달아 2회나 총독부에 압수당하는 등, 발행금지 34회, 정간 1회, 벌금 1회, 발행정지 1회를 받아서 결국 1926년 8월 폐간되었다.5) 도개벽반주도층은 항상 식민당국의 검열을 의식해야 했다. 이른바 ‘정치성의 억압’은 도개벽반이 식 민지기 미디어 주체로 탄생 ・ 지속하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관문이었다. 도개벽반이 통과해야 할 또 하나의 관문은 ‘종교성의 억제’였다. 천도교청년회가 도개벽반의 발간 주체였지만 종교계 잡지인 도천도교회월보반와 달리 계몽적 종합월간지를 지향하였으므로, 도개벽반의 논조에서 종교적 색채는 가급적 억제되고 사회적 公器로서의 면모를 갖추고자 애썼다. 그런데 사실상 정치성과 종교성은 도개벽반을 도개벽반답게 만든 요소이기도 했다. 그 근원에는 ‘종교적 사회개조’의 지향이 있었다. 도개벽반의 창간을 주도한 천도교청년층은 이미 1910년대 말 부터 종교적 사회개조를 지향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폐해와 참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그들은 두 가지 차원에서 자신들을 여타 세력과 구별하였다. 과학과 경쟁의 폐해가 만연한 사회 를 개조하려면 평화적 원리를 가진 종교가 나서야 하고, 종교 중에서는 시대에 뒤떨어진 舊종교 대신 새 시대에 걸맞게 ‘사상적 포괄성’을 갖춘 천도교가 적임자라는 것이다.6) 4) 그동안 도개벽반은 도동아일보반와 더불어 ‘문화정치’기에 문화운동을 주도한 2대 중심기관으로 인식되었다. 이런 평 가를 전면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본 발표에서는 도개벽반을 당시 천도교가 전개한 ‘종교적 사회운동’의 핵심적인 역량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도개벽반을 문화운동의 중심기관으로 보는 시각은 도개벽반의 의의를 민족운동과의 원근 법 속에서 보는 민족운동론적 관점의 산물이다. 이 관점에서는 1920년대 문화운동과 자치운동의 성격을 ‘先실력 양성 後독립’에 입각한 실력양성운동으로 간주하고 이를 일제의 식민통치를 전면 부정하지 않는 타협적인 것으 로 평가한다.(박찬승, 도한국근대정치사상사연구반, 역사비평사, 1992). 그것은 도개벽반이 당대 민족운동에서 차지한 위치와 역할을 보여주는 의의가 있다. 그러나 도개벽반주도층의 주관적 지향을 사회현실과 결부시켜 개성적으로 드러내기는 어려운 한계도 있었다. 이런 한계를 보완하려면 도개벽반을 근대 전환기 동학 ・ 천도교라는 신흥 종교 집단의 형성 및 활동과정에서 조망하는 통시적 접근이 필요하다. 그러한 실천활동의 핵심은 종교적 사회운동이 었다. ‘종교적 사회운동’이라는 관점에는 종교적 신념의 사회적 확산이 가진 개혁적 함의와, 당대 사회에 신앙의 자유를 요구한 인정투쟁의 성격이 병존해 있다. 이는 ‘근대성 형성’의 관점에서 한국 종교의 형성과 근대적 정 립, 그리고 對사회적 실천을 살펴보는 접근에 속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천도교청년회가 주도하여 발간한 도 개벽반은, 1860년 동학의 창립과 1894년 동학농민전쟁, 1904~5년의 개화운동과 천도교로의 개칭에 뒤이어 ‘문화 정치’기 천도교의 종교적 사회운동이 물질화된 형태였다고 말할 수 있다. 5) 誠巖學人, 1969, 「開闢誌」에 對하여 - 「開闢」의 影印本에 붙이어-」 → 도개벽반1 영인본(도서출판 박이정本) 해 제, 4쪽에서 재인용. 6) ‘썩어빠진 옛 종교로는 금일 문화의 人心思想을 지배하지 못할 것’이어서 그 자격은 ‘최신 진리를 포용하고 온갖 종교의 이상을 종합한 新宗敎’의 몫이었다(이돈화, 「개조와 종교」, 도천도교회월보반112, 1919.12, 4쪽). 이때의 48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이와 관련하여 이돈화는 현대종교란 ‘神 ・ 우주와 인간의 관계’뿐 아니라 ‘개인과 사회의 관계’도 종합적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7) 또한 천도교 교리는 ‘현대적 최후 大사상’이며 ‘현대 제반 활동, 즉 종교 ・ 철학 ・ 과학 ・ 도덕 ・ 정치 등 각종 활동을 통일 조화’한다고 설명하였다.8) 종교적 사회개조의 지향은 도개벽반의 창간 동기이자 목적이 되었다. ‘정치성의 억압’과 ‘종교성 의 억제’는 그러한 지향의 과도한 분출을 꺼린 정치 ・ 사회로부터 압력을 받은 결과였다. 그러나 정치성이 법 테두리 내에서 ‘順治’되면 독자들의 외면을 받기 마련이듯이, 과도한 사회화로 종교 성이 표백된다면 도개벽반의 존재의의를 확보하기 어려웠다. 도개벽반에게서 종교적 사회개조의 지향 은 완전한 억압도, 완전한 허용도 불가능했다는 점에서 그것은 도개벽반의 ‘욕망’ 에 해당하였다. 도개벽반에서 그러한 욕망은 ‘사상적 포괄성’을 사회일반적 언어로써 확보하는 노력으로 나타났 다. 도개벽반의 신체는 목차상의 위치와 기능에 따라 ‘계몽의 영역’ ・ ‘소통의 영역’ ・ ‘대중의 영역’ 으로 분할되었다.9) 발간 초기에 도개벽반주도층은 ‘소통의 영역’을 빌어 사상의 자원들을 소개하 였다. 도개벽반창간호부터 15호까지 니체, 루소, 제임스, 입센, 엘렌케이, 러셀, 카펜터, 플로베르 등 서구 근대사조를 소개하는 기사가 거의 빠짐없이 실렸다.10) 이와 동시에 창간호부터 9호까지 이돈화는 외래사조를 수용하는 구심점으로 ‘인내천’에 관한 논설을 연재하였다.11) 한편, 도개벽반의 핵심 공간인 ‘계몽의 영역’에서는 ‘인내천’의 종교적 관점으로 사회현안을 포괄 하는 착목점이 제시되고 있었다. 인식의 측면에서 그들은 ‘神과 인간’, ‘사람과 세계’, 그리고 ‘개 인과 사회’의 두 항들을 각각 ‘상호동일성’의 관계로 파악하는 한편, 실천의 측면에서는 사회문제 의 해결방안을 ‘활동주의 도덕’으로 추구하였다. 이런 노력은 ‘계몽의 영역’ 중에서도 특히 ‘권두 언/사설’과 대표논설12)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상호동일성’에 관한 인식을 다음 인용 ‘신종교’란 천도교를 가리켰다. 7) 이돈화, 「종교의 兩측면」, 도천도교회월보반91, 1918.2, 10쪽. 8) 夜雷(이돈화), 「迷의 신앙으로 覺의 신앙에」, 도천도교회월보반97, 1918.9, 5쪽. 9) “‘계몽의 영역’은 ‘주요논설’이 밀집해 있는 목차 앞 부분의 공간을 가리키는데 대체로 설문조사와 같은 ‘非논설’ 류 기사로 시작하는 ‘소통의 영역’과 경계를 이루면서, 편집진의 對사회적 발언 ・ 주장을 담고 있다. ‘소통의 영 역’은 앞으로는 ‘계몽의 영역’과, 뒤로는 ‘대중의 영역’과 경계를 맞대고 있으며 설명문 ・ 각종 조사 ・ 일반논설 ・ 시사 등에 관한 기사를 통해 독자들과 좀 더 자유로운 형식의 사회적 소통을 도모하는 곳이다. ‘대중의 영역’은 주로 문예작품이나 평론 기사 등을 모아놓은 목차의 마지막 공간을 가리키는데, 창작물이나 번역물, 독자투고 작 품 등을 게재함으로써 독자의 관심을 끌고 잡지의 대중적 기반을 확대해 가는 곳이다.”(허수, 도식민지 조선, 오 래된 미래반, 91쪽). 10) 허수, 도이돈화 연구반, 94쪽. 11) 허수, 도이돈화 연구반, 107쪽. 『開闢』의 탄생과 일본의 ‘종교철학’ 49 문에서 살펴보자. 1) a. 哲人은 말하되 다수 인민의 聲은 곧 神의 聲이라 하였나니 ... 神은 無何有의 一物로 붙어 진 화를 시작하였도다. ... 사람은 신의 진화한 자로 (「창간사」, 도개벽반1, 2쪽) 2) b. 사람과 세계는 결코 나누어 볼 것이 아니었다. 사람으로 된 세계, 세계로 된 사람 둘이 아니 오 오직 하나일 뿐이었다. ... 세계를 앎이 곧 사람을 앎이요 또한 자기를 앎이었다. ((사설), 「세 계를 알라」, 도개벽반1, 3쪽) 3) c. 사회는 개인의 집단이 아니오 자기의 延長이다. 우리가 사회를 위하야 일할 最徹底한 관념은 이와 같이 사회를 超個人我로 보아 사회를 자기의 인격 내에 섭취함에 至하야 始生할 것이다. 우리의 참 인격은 無限大이다. 자기인 동시에 사회이며 우주이다. 고로 우리는 사회를 통하야 始로 자기의 全貌를 窺하는 것이다. (김기전, 「사회 봉공의 근본의의」, 도개벽반10, 6~7쪽) 창간사(a)에서는 ‘인민(사람)은 곧 神’이라는 사실을 제시한 뒤 그 동일성을 ‘진화’로써 매개하 였다. 창간호 사설(b)에서는 ‘사람은 곧 세계’라 하면서 이로부터 ‘앎’ 즉 인식의 중요성을 환기시 키고 있다. 도개벽반10호에 실린 김기전의 논설(c)에서는 ‘개인(자기)은 곧 사회’라는 점을 내세웠 는데, ‘인격’을 양자의 매개항으로 언급하였다. 그러므로 세 인용문에서 서로 짝을 이루는 두 항 의 내용과 양자를 매개하는 요소들은 각각 다르지만, ‘신=인간’, ‘사람=세계’, ‘개인=사회’처럼 두 항을 상호동일성으로 인식하는 태도는 공통적이었다. 이러한 상호동일성의 인식은 ‘사람=하늘’이 라는 천도교의 ‘人乃天’적 사유와 맞닿아 있다. 다음으로 사회현안에 대한 실천적 개입지점을 ‘활동주의 도덕’으로 제시하는 대목을 다음 인용문 에서 살펴보자. 4) a. 目下 人人의 주의를 惹하는 者는 노동 문제이엇다. 그리하야 此 문제가 單히 경제적 문제가 아닌 事는 頗히 注意를 加할 者인데 즉 경제문제가 도덕문제와 명료히 결합하였던 것은 何人이 든지 疑치 못할 사실이었다. ... (「社說, 人道正義 發展史로 觀한 今日以後의 모든 問題」, 도개벽반 4, 7쪽) 5) b. 과연-조선인의 민족성은 善이니라. ... 원래-人의 心은 一의 靈體이나 ... 종교도덕적 방면으 로 나타날 時는 이를 善이라 칭하며 ... 금후의 세계는 반드시 도덕 승리의 세계가 되리라. 도덕 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세계가 되리라. (이돈화, 「조선인의 민족성을 논하노라」, 도개벽반5, 4~8쪽) 12) 여기서 ‘대표논설’은 권두언과 사설을 제외하고 제일 첫머리에 위치한 논설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하였다. 50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6) c. 由來의 도덕관은 사람의 본능의 慾, 즉 靜的 방면을 **[억압-인용자]함이 과도하였스며 又 실제활동의 原力을 위축함이 多大하였도다. ... 고로 吾人은 大食主義上에서 도덕의 관념을 左 와 如히 개정코저 하노라. ... 도덕의 이상적 목표는 究竟 活動主義에 置치 아니치 못할 것. (이 돈화, 「大食主義를 論하노라 (其一)」, 도개벽반7, 11~12쪽) 7) d. 사람이 적어도 社會의 一員으로 社會的 生活을 하며 社會的 恩澤을 입고 社會的 幸福을 받 는 以上에는 그에 따라 社會의 奉供이라는 卽 社會를 爲하야라는 公平한 道德性을 가지지 아니 하야서는 아니되겠다. (이돈화, 「민족적 체면을 유지하라」, 도개벽반8, 2~3쪽) 도개벽반4호의 사설(a)에서는 노동문제가 도덕문제와 결부되었다고 보았고, 도개벽반5호의 이돈 화 논설(b)에서는 이러한 도덕을 ‘善’과 일치시키고 나아가 ‘善’을 조선인의 민족성으로 설정함으 로써 ‘도덕’을 조선의 민족성으로 본질화하였다. 도개벽반7호의 논설(c)에서 이돈화는 ‘大食主義’ 라는 용어를 만들어 활동주의 도덕을 제시하였다. 그는 도개벽반8호의 논설(d)에서 도덕의 문제를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하는 맥락에서 사회에 봉사하는 ‘사회적 도덕성’을 강조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봤듯이 도개벽반주도층은 도개벽반의 초기 신체를 공간적으로 분할한 뒤 ‘소통의 영 역’에서는 내 ・ 외부 사상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면서 ‘계몽의 영역’에서는 ‘상호동일성’의 인식과 ‘활동주의 도덕’의 실천지점을 제시하였다. 이는 사회 현안과 이론적 자원의 접점을 예비적으로 마련하는 의의를 가진 것으로, 이를 통해 ‘사상적 포괄성’에 한걸음 다가서고자 시도하였다고 생 각된다. 2. 개벽의 자아, 3대 主義의 형성 도개벽반의 ‘사상적 포괄성’을 위한 작업은 초기 신체에서 공간별 역할 분담과 예비적인 시도를 한 것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천도교의 종교사상에 뿌리를 두면서도 계몽적 종합월간지로서의 보 편성을 具備하여 ‘도개벽반다움’을 창출해야 했다. 이런 노력은 ‘主義’의 형성으로 나타났는데 그것 은 말하자면 도개벽반의 자아를 창출하는 일이었다. 이미 도개벽반3호의 사설에서 도개벽반주도층은 “新紀元 하에 立한 吾人의 主義를 제시하야써 新 喜悅에 충만한 독자 여러 형제와 더불어 느낌을 같이 하고저 하노라”고하여 이런 속내를 내비쳤 다.13) ‘主義로써 永生을 얻는다’라는, 다소 비장한 각오도 천명되었다.14) 이러한 다짐과 약속은 13) (사설), 「吾人의 新紀元을 宣言하노라」, 도개벽반3, 1920년 8월, 4쪽. 『開闢』의 탄생과 일본의 ‘종교철학’ 51 빈 말에 그치지 않았다. 도개벽반이 폐간되기까지 각 호에 실린 권두언/사설을 포함한 최초의 3개 논설 중에서 ‘주의’를 표제어로 다룬 기사를 목차공간별로 살펴보면 【표 1】과 같다. 【표 1】 도개벽반의 3개 논설 중 ‘主義’를 다룬 기사의 배치양상 호 6 7 10 17 23 25 31 40 42 45 46 55 58 67 발간 년월 20.12 21.01 21.04 21.11 22.05 22.07 23.01 23.10 23.12 24.03 24.04 25.01 25.04 26.03 권두언/사설 사상과 주의(1) *** 주의의 싸움(1) *** - 계몽의 영역 대표논설 사람性주의(2) * 公論의 人, 主義의 人(2) * 인류상대주의(2) * 汎인간적민족주의(2) *** 세력균형주의(2) 赤子주의(1) * 자유주의(1) 주요논설15) 문화주의(3) * 大食주의(3) * 사람性의 자연주의(3) * 爲他주의(3) ** 인격주의(3) 최수운주의(3) 사회주의학설대요(2) 비고 : - 표 안의 제목은 키워드이다. 발표순서별 전체 제목은 각주에서 밝혔다.16) - 키워드 다음의 괄호 안 숫자는 앞에서 몇번 째 기사인가를 나타낸 것이다. - ‘*’표시된 기사 7개는 이돈화, ‘**’ 1개는 김기전, ‘***’ 3개는 필자 미상의 글이다. 총 16개 기사 중 ‘권두언/사설’ 2개와 이돈화 논설 7개, 김기전 논설 1개, 그리고 이돈화의 글 로 여겨지는 「범인간적 민족주의」 1개를 합산한 11개는 도개벽반주도층의 글로 볼 수 있다. 따라 서 도개벽반주도층이 ‘주의’ 형성에 얼마나 커다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는가를 알 수 있다. 이 11개 중에서 보통명사적 용법이나 당시 유행하던 ‘문화주의’ 등의 용어를 제외하면, ‘대식주의’, 14) (권두), 「영원의 生이냐 영원의 死이냐」, 도개벽반12, 1921년 6월, 1쪽. 15) 여기서 ‘주요논설’은 ‘계몽의 영역’에 실린 논설 중에서 ‘대표논설’을 제외한 나머지 기사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 용하였다. 16) 白頭山人(이돈화), 「文化主義와 人格上 平等」 ; 滄海居士(이돈화), 「大食主義를 論하노라 (其一)」 ; 李敦化, 「사 람性의 解放과 사람性의 自然主義」 ; 李敦化, 「時代精神에 合一된 사람性主義」 ; 金起瀍, 「部分的 生活로부터 全的 生活에 聖者流의 驕慢한 爲他主義를 排除함」 ; 李敦化, 「空論의 人으로 超越하야 理想의 人, 主義의 人 이 되라」 ; 李敦化, 「人類相對主義와 朝鮮人」 ; 崔承萬, 「人格主義」 ; (필자미상), 「汎人間的 民族主義」 ; 李昌 林, 「새삼스럽게 吟味되는 朝鮮의 崔水雲主義」 ; 사가이·도시히꼬 講演, 「唯物史觀과 唯心史觀, -社會主義學說 大要(其三)」 ; (필자미상), 「甲申年來의 「思想」과 壬戌年來의 「主義」」 ; 若嬰生, 「勢力均衡主義와 國際協調主義 」 ; 李敦化, 「赤子主義에 돌아오라, 그리하야 生魂이 充溢한 人種國을 創造하쟈」 ; (필자미상), 「主義의 싸움이 냐 勢力의 싸움이냐, 根本으로 問題되는 主義者의 試練不足」 ; 拏山(金明植), 「自由主義와 中産階級」 52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사람성의 자연주의’, ‘사람성주의’, ‘인류상대주의’, ‘적자주의’, ‘범인간적 민족주의’의 6개는 당 시에 새로 만든 造語로 볼 수 있는데, 그 대부분이 이돈화의 논설에서 나왔다. 즉 도개벽반의 ‘주 의’ 형성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이돈화였던 것이다. 이돈화가 도개벽반에서 ‘主義’를 형성하는 과정에 대해서 발표자는 선행연구에서, 그가 ‘사람성주 의 → 범인간적 민족주의 → 적자주의’로 나아갔으며, 이런 ‘주의’의 계기적 형성과정은 각각, 당 시 유행하던 주요 사조들, 즉 문화주의, 민족주의, 사회주의에 대한 수용과 차이화를 동반하면서 진행되었음을 밝힌 바 있다.17) 본 발표에서는 이전의 연구성과에 기대면서도 본 발표에서 주목 하는 부분, 즉 1장에서 살펴본 도개벽반의 신체공간과 ‘상호동일성’ 인식 및 ‘활동주의 도덕’ 등과 의 관련성에 유의하면 ‘주의’의 형성 문제를 고찰하고자 한다. 첫째, 3대 ‘주의’가 도개벽반의 신체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살펴보면 【표 2】와 같다. 【표 2】 3대 ‘주의’가 도개벽반의 신체에서 차지하는 위치 권두/사설 창간사(1) 계몽의 영역 대표논설 조선인의 민족성(5)19) 사람性주의(17) 민족興替의 분기점(20)23) 新死生觀(20)24) 주요논설 문화주의(6) 大食주의(7) 사람性자연주의(10) 소년에게(17-21)22) 소통의 영역 內 外 인내천의 연구(1-10) 니체(1-2)18) ... ... 러셀(11)20) 현대윤리사상 (16-17)21) 公論의 人, 主義의 인(23) 汎인간적민족주의 (31) 국민생활(22)25) 민족개조론(23)26) 실행적 해방에(32)27) 천도교인내천주의 (45)29) 사회주의학설대요28) (40-45) 의문(48)31) 천국행(49)32) 赤子주의(55) 민족과계급(51)33) 사회주의운동 (46)30) 17) 허수, 도이돈화 연구반, 3장ㆍ4장 참조. 사회사상사(51-56)34) 『開闢』의 탄생과 일본의 ‘종교철학’ 53 주의의 싸움이냐(58)35) 사람의 힘과 돈의 힘(58) 사람성과 의식태(59)36) 프롤레타리아철학 (65-68)37) 갑오동학과 계급의식(68)38) 생명의 의식화(69)39) 계급의식의 이론(69)40) 비고 - 기사제목의 키워드를 표시한 것이다. 키워드 뒤의 괄호 속 숫자는 도개벽반의 호수이다. 연재기사는 첫 기사 게재 호수와 최종 기사 게재 호수만 ‘-’로 표시하였다. - 노란 색 칠한 기사는 이돈화가 쓴 글이다. ‘범인간적 민족주의’는 이돈화의 글로 추정되어 색깔을 달리하여 표시 하였다. - 소통의 영역을 ‘內’와 ‘外’로 표시한 것은, 기사 내용이 천도교적인 것은 ‘내’에 그 이외의 것은 ‘외’로 나누어보 기 위한 편의적인 구분으로, ‘소통의 영역’이 실제로 이 두개의 공간으로 나누어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18) 小春(金起田), 「力萬能主義의 急先鋒, 푸리드리히, 니체 先生을 紹介함」, 도개벽반1, 1920년 6월 ; 妙香山人(金 起田), 「新-人生標의 樹立者, 푸리드리취,니체 先生을 紹介함」, 도개벽반2, 1920년 7월. 19) 이돈화, 「朝鮮人의 民族性을 論하노라」, 도개벽반5, 1920년 11월 ; 20) 妙香山人(金起田), 「思想界의 巨星 뻐-츄랜드·러쎌氏를 紹介함」, 도개벽반11, 1921년 5월. 21) 白頭山人(이돈화), 「現代倫理思想의 槪觀, 東洋式 倫理思想의 變遷」, 도개벽반16, 1921년 10월 ; 白頭山人(이돈 화), 「東洋式의 倫理思想 變遷槪觀(續), 家庭倫理의 一端」, 도개벽반17, 1921년 11월. 22) 魯啞子(이광수), 「少年에게」(1~5), 도개벽반17~21, 1921년 11월~1922년 3월. 23) 「民族興替의 分岐點」, 도개벽반20, 1922년 2월. 24) 이돈화, 「吾人의 新死生觀, 意識과 死生=生命과 死生=靈魂과 死生」, 도개벽반20, 1922년 2월. 25) 魯啞(이광수) 譯, 「國民生活에 對한 思想의 勢力- (르.본 博士 著 「民族心理學」의 一節)」, 도개벽반22, 1922년 4월. 26) 李春園(이광수), 「民族改造論」, 도개벽반23, 1922년 5월. 27) 「煽動的 解放으로브터 實行的 解放에 解放號 첫머리에 쓰는 것이라」, 도개벽반32, 1923년 2월. 28) 사까이 ・ 도시히꼬, 「社會主義 學說 大要」, 도개벽반40, 1923년 10월 ; 사까이 ・ 도시히꼬, 「社會主義와 資本主義 의 立地, 社會主義學說 大要(其二)」, 도개벽반41, 1923년 11월 ; 사까이 ・ 도시히꼬, 「唯物史觀과 唯心史觀, -社 會主義學說 大要(其三)」, 도개벽반42, 1923년 12월 ; 사까이 ・ 도시히꼬, 「唯物史觀의 「要領記」, 社會主義學說大 要=其四」, 도개벽반43, 1924년 1월 ; 堺利彦, 「歷史進化의 事實的 說明. 社會主義學說講論(終結)」, 도개벽반 45, 1924년 3월. 29) 이돈화, 「世界三大宗敎의 差異點과 天道敎의 人乃天主義에 對한 一瞥」, 도개벽반45, 1924년 3월. 30) 小春(金起田) 抄, 「世界社會主義運動의 史的 記述」, 도개벽반46, 1924년 4월. 31) 이돈화, 「疑問」, 도개벽반48, 1924년 6월. 32) 이돈화, 「天國行」, 도개벽반49, 1924년 7월. 33) 大山郁夫, YS(李星泰)譯, 「民族과 階級, 現代 政治에 在한 民族과 階級과의 關係」, 도개벽반51, 1924년 9월. 34) 玉川生(吳尙俊), 「近世社會思想史」, 도개벽반51, 1924년 9월 ; 玉川生(吳尙俊), 「싼·씨몬의 社會思想과 푸리에의 新社會案, 그들은 이러케까지 우리에게 사색할 것을 주엇다, 近世社會思想講述(其二)」, 도개벽반52, 1924년 10 월 ; 玉川生(吳尙俊), 「溫情主義의 오벤과 社會主義의 오벤, 『社會思想史』의 其3」, 도개벽반54, 1924년 12월 ; 54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표 2】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성주의’와 ‘범인간적 민족주의’, ‘적자주의’처럼 핵심적인 ‘주 의’는 모두 ‘대표논설’로 배치되었다. 핵심 중의 핵심공간인 ‘대표논설’자리는 도개벽반적 자아의 産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3대 ‘주의’는 대표논설 이외의 공간, 즉 ‘계몽의 영역’ 내의 ‘주요 논설’과 이웃 ‘소통의 영역’에 실린 기사들과 긴밀하게 연계되었다. 예컨대 이돈화는 ‘사람성주의’ 형성과정에서, 먼저 외곽지대인 ‘소통의 영역’에 「인내천의 연구」를 연재하여 사회사상의 구심점 을 마련하는 한편, 그가 포괄하고자 하는 일본의 문화주의 철학을 ‘계몽의 영역’ 중 ‘주요논설’로 소개한 뒤, 이 양자와 동료 김기전 등이 소개한 외래사상을 선택적으로 접합시켰다. 그 계기적 과정은 ‘대식주의’ → ‘사람性의 해방과 사람性의 자연주의’ → ‘사람性주의’로 전개되었다. 주목할 부분은 그가 포괄하려는 대상인 ‘문화주의’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상적 모체인 ‘인내 천주의’가 각각 ‘계몽의 영역’과 ‘소통의 영역’으로 서로 구분되어 소개된 점이다. 자신들의 종교 적 입장을 낮추고 사회적 방면의 사상을 앞세우는 도개벽반주도층의 태도가 ‘주의’의 형성과정에 서도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러다가 양자를 종합한 ‘주의’가 형성되면 이는 ‘대표논설’이라는 특권 적 위치에 발표하였다. 이런 방식은 나머지 2개의 ‘주의’ 형성과정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범 인간적 민족주의’의 형성과정에서는 ‘인내천의 연구’에 상응하는 기사는 없었지만 민족에 관한 논의를 포함한 이광수의 여러 논설을 ‘계몽의 영역’ 중 ‘주요논설’ 공간에 소개한 뒤 마침내 도개 벽반의 민족담론이라고 할 ‘범인간적 민족주의’는 ‘대표논설’로 발표하였다.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대응이라고 할 ‘적자주의’의 형성과정에서도 이돈화는 ‘소통의 영역’에서 천도교의 인내천주의적 입장을 언급하는 한편, 당시 유행하던 사회주의에 관한 사항은 주로 ‘계몽의 영역’의 ‘주요논설’ 공간을 이용하여 소개하였다. 그리고 ‘적자주의’는 이와 별도의 공간인 ‘대표논설’로 발표하였 다.41) 비록 ‘주의’의 형태로는 나타나지 않았으나 사회주의에 대한 대응은 ‘적자주의’ 이후에도 玉川生(吳尙俊), 「「오웬」의 計圖한 協和合力의 村, 『社會思想史』의-其4」, 도개벽반56, 1925년 2월. 35) 「主義의 싸움이냐 勢力의 싸움이냐, 根本으로 問題되는 主義者의 試練不足」, 도개벽반58, 1925년 4월. 36) 이돈화, 「사람性과 意識態의 關係, 「機械意識」 「階級意識」 「超越意識」」, 도개벽반59, 1925년 5월. 37) J Die'zen 原著 崔火雲 譯, 「푸로레타리아 哲學, 안톤·판에콕에 의한 序論」, 도개벽반65, 1926년 1월 ; J Die'ze n 原著 崔火雲 譯, 「칸트 哲學과 불조아 思想, 푸로레타리아 哲學(其二)」, 도개벽반67, 1926년 3월 ; J Die'zen 原著 崔火雲 譯, 「헤-켈 哲學과 데이켄, (푸로레타리아 哲學 (其3))」, 도개벽반68, 1926년 4월. 38) 이돈화, 「甲午東學과 階級意識」, 도개벽반68, 1926년 4월. 39) 이돈화, 「生命의 意識化와 意識의 人本化」, 도개벽반69, 1926년 5월. 40) 裵成龍, 「階級意識의 理論」, 도개벽반69, 1926년 5월. 41) 물론 3대 ‘주의’의 도출과정에서 외부 사조와 천도교 사상 간 접합의 중간단계가 제시된 것은 ‘주의’별로 조금씩 차이가 있다. ‘사람성주의’의 경우 그 중간단계는 ‘주요논설’에 제시된 데 반해, 나머지 2개의 ‘주의’에서는 그것 이 ‘대표논설’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 차이는 본문에서 설명한 그러한 차이에 비해 중요한 부분은 아니다. 『開闢』의 탄생과 일본의 ‘종교철학’ 55 계속되었는데, 이 경우에도 그 전개형식은 이전의 3대 주의와 유사함을 <표 2>로부터 알 수 있다. 둘째, ‘주의’의 형성에서 이돈화는 유행하던 주류사상을 비판적으로 흡수하는 방식을 취하였는 데, 그 기준은 역시 ‘상호동일성’과 ‘활동주의 도덕’이었다. 먼저 문화주의부터 살펴보자 이돈화가 소개한 문화주의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8) a. 인격있는 人으로 여러가지 자유로 발전케 하는 事가 즉 문화라 할 것이다. 즉 ... 여러 가지 人의 활동력이 자유로 발달하야 向上에 向上을 가하는 발전이었다. 따라서 此 문화로써 생활의 중심으로 하는 사상을 즉 문화주의라 할 것은 多言을 不要할 것이었다. (12쪽) 9) b. 如斯한 문화는 ... 경험적 내용을 초월한 선천적 기초의 上에 立한 것일지며 ... 선험적 자아 즉 인격에 치중치 아니치 못할지로다. ... 그리하야 此와 如한 인격의 上에는 평등관이 성립치 아니치 못할 것이로다. (13쪽) 10) c. 보통의 도덕이 일상 행위의 규정에 관한 실제적 의의라 함에 대하야 인생의 순수한 이상적 생활을 문화라 云하는 어구로써 표현함이 편리치 아니할까 생각함 (12쪽)42) 인용문 ‘a’와 ‘b’ 내용을 다시 간추리면 문화주의란, ‘인격을 가진 인간이 문화를 통하여 끊임 없이 향상 ・ 발전하려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c’는 문화주의에서 ‘도덕’이 실천적 ・ 윤리적 위 상을 가졌음을 밝힌 것으로 보인다. 이돈화에게 사람을 부단히 향상진보시키는 문화의 위상과, 사람들에 대한 실제적 규범이 되는 도덕의 기능은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서는 문화주 의의 도덕은 너무 정태적이어서 여기에 활동적ㆍ충동적 요소를 가미할 필요가 있었다. 사람과 문 화 간에 놓인 거리감도 그가 가진 ‘상호동일성’에 맞게 수정되어야 했다. 그 결과로 도출한 것이 ‘사람성주의’였다. 여기선 ‘사람-문화(혹은 이상)’의 관계가 ‘사람-자연’의 관계로 바뀌었다. 이때 ‘자연’은 사람 외부에 있는 별도의 목적지가 아니라 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는 순수함을 가리켰다. 출발지는 곧 도착지였다는 점에서 여기에는 ‘상호동일성’의 인식이 투영되었다. 다만 출발점이 현실의 인간이라면 도착지는 실재적 인간이라는 차이는 있었다. 이 격차로부터 끊임없는 실천적 노력의 동기가 발생한다. 그러한 실천에 적합한 논리로 이돈화는 ‘도덕’ 개념 대신 러셀의 ‘창조 충동’ 개념을 끌어들였다. 대신 ‘도덕’ 개념은 사회적 층위에서 이기주의(=개인)와 이타주의(=사 회)를 조화하는 것으로 그 역할을 바꾸었다. ‘汎인간적 민족주의’는 민족주의의 양면성에 유의하면서 사회사상적 층위에서 민족주의와 인류 42) 白頭山人(이돈화), 「文化主義와 人格上 平等」, 도개벽반6호 56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주의를 조화시키고자 한 노력의 산물이다. 전자를 이기주의, 후자를 이타주의로 파악한 것으로 볼 때, 이것은 ‘사람성주의’의 도덕 개념이 가진, ‘이기-이타’에 대한 조정 역할을 사회사상 방면 에 확대 ・ 적용한 것으로 이해된다. 당시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상호 경쟁 ・ 갈등하던 현실을 고려한다면 이때 민족주의의 대립항으로 제시된 ‘인류주의’는 사회주의를 염두에 둔 것으 로 보인다. ‘赤子주의’는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적 차이화 맥락에서 제시되었다. 이돈화는 여기서 “純物質 論者의, 「心理는 物質의 幻影」이라 한 標語는 心理의 一面을 正確히 看做한 代身에, 他 一面에 潛在하야 잇는 非物質的 創造心을 忘却한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그의 논설 전체를 읽어보면 ‘순물질론자’는 맑스주의자를 가리켰다. 적자주의는 ‘상호동일성’ 인식에 관한 내용은 아니고, ‘활 동주의 도덕’이라는 실천적 층위에 상응하는 내용이었다. 여기서는 버트란드 러셀의 창조충동론 이 ‘사람성주의’ 단계보다 더욱 강조되어, 과거에 대한 과감한 부정과 비판의 메세지를 無有主義, 再生主義, 生魂, 초월, 충동 등의 표현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赤子’라는 은유로 표시되었다. 충동적 ・ 활동적 요소의 강조는 실천적 층위에만 그치지 않았다. 1여년 뒤 그는 「생명의 意識 化, 의식의 人本化」라는 논설을 발표하였다.43) 이 글에서 그는 ‘사람성주의’가 가진 ‘사람-자연’ 구도를 벗어나 ‘사람-생명’ 구도를 제시하였다. 즉 사람과 생명을 동일시한 것이다.44) ‘사람성주 의’에서는 ‘山野田園的 자연’과 ‘사람성자연’이 구분되었고 양자를 종합한 개념으로 ‘大자연’이 언급되어 조금 복잡하였는데, 이제 그것은 모두 ‘생명’ 개념으로 일원화되었다. 생명은 ‘충동 ・ 본 성’과 ‘의식’의 결합태이기도 했다.45) 43) 이돈화, 「生命의 意識化와 意識의 人本化」, 도개벽반69, 1926년 5월. 44) 이 ‘생명’ 개념의 등장에 베르그송의 영향을 언급하는 연구자도 있지만, 이 시점의 글에서는 확인되지 않고, 다 만 1931년에 출간한 그의 저서 도新人哲學반에서 베르그송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45) 이 논설이 ‘상호동일성’ 인식을 ‘생명’ 개념으로 재구성하면서 ‘사람성주의’를 갱신하였음에도 ‘주의’라는 특권적 이름을 갖지 못한 것은 조금 의아하지만, 이는 도개벽반이 폐간 시점에 임박한 사정 등이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 된다. 도개벽반폐간 이후에도 이돈화는 자신의 사상을 계속 밀고나가 ‘水雲주의’를 주어로 하는 도新人철학반을 형 성하였다. 『開闢』의 탄생과 일본의 ‘종교철학’ 57 3. 일본 ‘종교철학’의 專有와 消去 1,2장에서는 도개벽반주체의 형성에 사용된 ‘상호동일성’ 인식이 천도교의 ‘인내천’적 사유와 관 계있고, 실천방면의 ‘활동주의 도덕’에서는 ‘도덕’ 개념과 ‘활동 ・ 충동’ 개념이 사용되다가 나중에 는 ‘생명’ 개념으로 나아갔음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상호동일성’ 인식과 ‘활동주의 도덕’이라는 실천 방침은 일본의 ‘현상즉실재론’ 철학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다. 그 직접적인 연관성을 살펴보기 전에 천도교 종교사상에서 서구 근대의 ‘철학’ 지식이 끼친 영향 을 살펴보면, 그 시점은 ‘천도교’가 성립된 190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에는 중 앙교단이 주도하여 敎理書들을 많이 편찬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도大宗正義반(1907)에서는 종교를 신앙과 철학, 그리고 제도로 구성되었다고 보았는데, 유독 ‘철학’에 대해서만 ‘인과 천의 관계’로 설명하였다.46) 이와 유사하게 도聖訓演義반(1907)에서도 ‘靈通’, ‘철학’, ‘신앙’에 대한 서술이 중심 내용이었다. 여기서는 도대종정의반와 달리 세 차원 모두 ‘천과 인의 관계’로 파악하였는데, 삼자는 관계설정 도식에서 【표 3】과 같은 차이가 있었다. 【표 3】 도성훈연의반의 ‘哲學圖’와 이돈화의 ‘조선신문화건설 圖案’ 비교 영통도 (a) 도성훈연의반 철학도 (b) 신앙도 (c) 도개벽반 圖案 (d) 비고 - 도성훈연의반(1907), 1~2쪽 → 도한말 천도교 자료집반1, 235~236쪽. - 이돈화, 「신문화건설의 도안」, 도개벽반4, 1920년 9월, 16쪽. 46) “신앙은 天이 天을 遇한 者오, 철학은 人이 天을 見한 者오 제도는 人이 人을 見한 者니”(도大宗正義반, 1907, 2 1쪽 → 崔起榮ㆍ朴孟洙 편, 도韓末 天道敎 資料集반1, 國學資料院, 1997, 102쪽) 58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문제는 이 ‘철학도’가 도개벽반에 실린 ‘신문화건설의 圖案’과 유사하다는 점이다. 도개벽반4호의 「신문화건설의 圖案」에서 이돈화는 조선 신문화건설의 구체적인 절차를 설명한 뒤 그 내용을 간 추린 도식을 <표 3>의 ‘d’로 제시하였다. 이를 「성훈연의」의 철학도(b)와 비교하면, 양자의 기본 구도는 거의 동일함을 알 수 있다. ‘도안’의 상 ・ 하단에 있는 ‘결심’과 ‘융화’를 제외하면, 양자 모두 두 갈래의 비교항이 세 층위에 걸쳐 있으며, 하나의 층위에서 다른 층위로 연결되는 방식이 모두 ‘X’로 교차되고 있다.47) 이런 양상은 도성훈연의반의 ‘영통도’나 ‘신앙도’와는 매우 다르다. 도성훈연의반의 편찬은 이돈화의 윗 세대 이론가인 양한묵이 주도한 것인데, 이미 당시부터 천도교 종교사상을 정리하고 해설하는 데 근대적 ‘철학’이 활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철학’의 활용은 1920년대의 이돈화에게로 이어졌다. 그런데 도성훈연의반의 ‘철학도’와 이돈화의 ‘도안’ 간에는 내용면에서 커다란 차이가 있다. ‘철 학도’가 ‘天眼-人眼’, ‘法相-現相’이나 ‘理-氣’, ‘性-身’ 등 사변적 ・ 사상적 내용을 다루었다면, ‘도안’은 교육과 개량 등 매우 구체적인 사회현안을 다루었다. ‘철학’의 용도에서 양자 사이에 차 이가 나타난 것은 1910년대 말 일본의 ‘현상즉실재론’ 도입과 밀접한 관련을 가졌다. 일본 메이지기 철학의 주류를 이룬 현상즉실재론은 현상과 본질 ・ 실재를 ‘相卽’의 관계로 파악 하며, 현상에 속하는 정신과 물질도 제3자인 실재에 의해 통일하는 입장이다. 따라서 이 입장은 ‘이원론적 일원론’의 사유를 가졌다고도 평가된다. 현상즉실재론과 천도교 종교사상 간의 상관관 계에 대하여 발표자는 선행연구에서 다음을 규명한 바 있다. 첫째, 이돈화는 1915년 5월경 이미 이노우에 테쓰지로(井上哲次郞)48)의 저서 도철학과 종교반(1915.2)49)를 통하여 현상즉실재론에 접 47) ‘도식’에서 ‘보통교육’과 ‘사회교육’이 있고 이것이 각각 농촌개량과 도시중심주의에 연결되며, 그것이 다시 사 상통일과 전문과학으로 연결되는 부분은, ‘철학도’에서 天眼과 法相이 각각 人眼과 現相에 연결되고 그것과 연 결된 理와 性이 각각 氣와 身에 연결되는 구조와 흡사하다. 더욱이 ‘도식’에서는 두 번의 연결고리가 ‘X’로 교 차되는 형식을 취하는데, 이 또한 ‘철학도’에서 ‘轉輪’(‘회전하다’라는 의미)으로 표시된 것과 일치한다. 그 나머 지는 ‘천인합일’이라 되어 있는데 도성훈연의반의 해설을 읽어보면 이 역시 理-氣, 性-身으로 연결되므로 사실상 ‘전륜’ 형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미 위에서 표시해 놓았으므로 중복을 피하여 생략한 것으로 보인다. 48) “이노우에는 니시 아마네(西周), 니시타 키타로(西田機多郞)와 더불어 메이지철학을 대표하고 있으며(伊藤友信 外, 도近代日本哲學思想家辭典반, 東京書籍, 1982, 62쪽), 또한 ‘현상즉실재론’이라는 개념을 만들고 주장하는 등 메이지시기 ‘현상즉실재론’의 대표자로 손꼽히고 있다(船山信一, 앞의 책, 1959, 102쪽). 한편 그는 도쿄대학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교육칙어(敎育勅語)를 해설하는 도칙어연의(勅語衍義)반(1891)를 저술하고(井上哲次郞, 도井上哲次郞自伝반, 富山山房, 1973, 30쪽), 도교육과 종교의 충돌반(1893)에서 크리스트교의 비(非)국가주의적 성 격을 비판하는 등 ‘국권주의적 관념론’의 입장을 가진 인물이다(船山信一, 도明治哲學史硏究반, ミネルヴァ書房, 1959, 14∼15쪽)”(허수, 도이돈화 연구반, 64쪽 각주 86번). 49) 井上哲次郞, 도哲學と宗敎반, 東京: 弘道館, 1915. “도철학과 종교반에서 이노우에의 철학적 입장은 주로 전반부 1 1개의 장에 담겨 있고 그 가운데서도 특히 맨 앞부분에 있는 4개의 장에 집중적으로 표현되고 있다고 생각된 다. ...(중략:인용자) ... 네 장의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제1장 ‘철학의 요구 및 장래’에서는 ‘철 『開闢』의 탄생과 일본의 ‘종교철학’ 59 촉하였다.50) 둘째, 1918년 무렵부터 그는 현상즉실재론의 이원론적 일원론 도식을 ‘종교-사회’의 관계에 적용하여 종교적 사회개조론을 구상하였다. 여기서 이돈화는 현상즉실재론의 ‘본질-현상’, 그리고 현상방면의 ‘정신-물질’에 대한 관계 설정을 각각 ‘종교-사회’, 그리고 사회 방면의 ‘개인 (이기)-사회(이타)’에 관한 관계 설정에 각각 대응시켰다.51) 셋째, 둘째의 사실과 관련하여 이돈 화는 이노우에 저서에 있던 ‘종교-철학-과학’의 구분법에 영향을 받아 이를 자신의 서술에 활용 하다가 1910년대 후반~1920년대 초반이 되면서 점차 서술방식에서 ‘종교-철학-사회’의 구분법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여기서 ‘둘째’의 규명점으로 미루어볼 때, 1910년대 후반 이돈화는 ‘현상즉실재론’이라는 ‘철 학’적 지식을 천도교의 종교적 사회운동의 논리로 전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도개벽반초기 지면 에서 도개벽반주도층이 ‘신=인간’뿐 아니라 ‘사람=세계’ 및 ‘개인=사회’ 등 ‘상호동일성’ 인식을 전 개한 것도 이전 시기의 이러한 전유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주의’ 형성과정도 마찬가지였다. ‘사 람성주의’에서 ‘도덕’으로 ‘이기주의’와 ‘이타주의’를 조화한 대목, 그 연장선상에서 ‘범인간적 민 족주의’가 민족주의라는 ‘이기주의’ 사상을 인류주의라는 ‘이타주의’ 사상과 조화하고자 한 대목 등이 그 사례이다. ‘활동주의 도덕’에서도 현상즉실재론의 영향은 뚜렷하였다. 이노우에는 자신의 저서에서 ‘우리 의 가장 근본적인 정신작용은 의지활동이다’라고 하여 의지를 최우선으로 여겼다.52) 이 의지 개 념은 쇼펜하우어의 ‘의지’에서 비롯한 것으로, 욕동(欲動: Trieb) ・ 충동을 핵심으로 삼았다.53) 또 학이 왜 필요한가’를 종교 및 과학과 대비시키면서 언급하고 있고, 제2장 ‘유물론과 유심론에 대한 실재론의 철 학적 가치’는 유물론과 유심론 ・ 관념론을 종합하는 ‘실재론’의 입장을 명확히 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고 있 다. 제3장 ‘철학상에서 본 진화론’에서는 기존의 진화론 인식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으며, 제4장 ‘의지활동 과 자아개념’에서는 좀더 구체적인 수준에서 의지와 생명 및 자아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이노우에의 현상즉 실재론이, 현상에 대한 과학법칙으로서의 ‘진화론’과 실재에 관한 논리인 ‘의지론’을 상호 결합시키고자 했음을 염두에 둔다면, 각 장은 순차적으로 ‘철학 → 실재론(실재) → 진화론(현상) → 의지 ・ 자아(주체)’가 되어 그의 철학적 입장이 점차 구체적인 단계로 전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허수, 도이돈화 연구반, 112~113쪽). 50) 이돈화 자신은 이노우에의 입장이나 저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를 명확하게 밝힌 바 없다. 그러나 대한제국 말기인 1907년에는 이미 이노우에가 자신의 저서에서 서양 문명을 물질문명으로 보고 일본의 정신 문명은 불 교적인 것으로 보는 입장이 소개되고 있었다( 禪師 一愚 金太垠, 「三國 宗敎略論」, 도태극학보반7, 1907년 2월, 24쪽). 그가 일본 도쿄에서 윤리학자 자격으로 孝 관념에 대해 강연한 내용도 소개되었다(文學博士 井上哲次郞 嘯卬生 譯, 「孝의 觀念 變遷에 對하야」, 도大韓興學報반9, 1910년 1월, 46쪽). 당시 이노우에는 이웃인 한국 식 자층에게 그와 같은 인지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더욱이 도철학과 종교반라는 책은 천도교 이론가였던 이돈화의 관심을 끌었을 개연성은 충분하였다. 51) 그는 ‘종교’를 ‘정신상 위안을 구하는 절대관념’으로 보았고, ‘사회’를 ‘육체상 福利를 구하는 비교사상’으로 생 각했다. 52) 허수, 도이돈화 연구반114쪽에서 재인용 60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한 사람을 부단히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의지활동이야말로 ‘생명활동의 토대’라 보았다.54) 이런 충동적 요소는, 인격과 문화, 그리고 도덕을 중시하는 문화주의를 수용할 당시에는 일시적으로 後景化 된 채 러셀의 창조충동론 등에 반영되었지만, 2장에서 살펴본 대로 ‘적자주의’와 그 이후 로 가면 ‘생명’ 개념으로 더욱 강조되었다. 이처럼 도개벽반의 미디어 주체 형성과 지속과정에서 근대 ‘철학’은 내용과 형식에서 커다란 영 향을 끼쳤다. 특히 일본의 ‘종교철학’인 ‘현상즉실재론’은 주요 개념과 이원론적 일원론 도식의 두 측면에서 도개벽반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렇다면 이 종교철학을 도입한 이돈화의 글이나 도 개벽반에서 그것은 어떻게 소개되고 있었으며 이후 어떤 경로를 걸었을까. 현상즉실재론이 언급되 는 대목은 다음의 세 사례가 대표적이다. 11) a. 일체의 현상은 실재라는 바다의 파도이며, 유한하고 상대적인 현상은 본래부터 무한하고 절 대적인 것에 불과한 것 아니냐. 이것을 근세철학에서는 現象卽實在論이라 부르도다. (夜雷<이 돈화>, 「黙念論」, 도天道敎會月報반104, 1919년 4월, 8~9쪽) 12) b. 원리상으로 보면 唯物은 곧 唯心이오 유심은 곧 유물이 된다하는 것이니, 유심과 유물을 통 하여 오로지 하나인 원리가 그를 지배하게 됨인데 吾人은 此 유일의 원리를 가리켜 실재라 하 는 것이로다. ... 실재를 생각하는 관념상 두 가지의 추상을 그려둘 필요가 있나니 하나는 現象 卽實在의 관념이오 하나는 圓融永遠的 실재라 하는 것이라. 현상즉실재라함은 우리의 眼前에 暎하는 萬有현상의 무엇이나 실재 아님이 없다 함이니 ... 원융적 실재라 함은 우주의 無始無 終이 한가지로 실재가 된다하는 말이니 이를 다시 구체적 예로써 말하면 시간공간이 한가지로 실재가 된다하는 말이라. ... (이돈화, 도人乃天要義반, 1924, 97~98쪽) 13) c. 순수철학상 고찰로 본다면 物心兩種의 이론뿐이 아니오 그외에도 실재론이라는 별종의 이 론이 생겨왔다. 실재론이 무엇이냐하는 것을 一言으로써 말하면 정신과 물질의 두 현상을 제3 의 원리에 의하야 통일하고저하는 철학이다. ... 이제 水雲主義에서 말하는 至氣一元論이라는 것이 유물론이냐 유심론이냐 또는 실재론이냐 하는 것으로부터 말하자면 지기일원론은 확실히 실재론 편에 가까운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돈화, 도新人哲學반, 1931, 31~33쪽) 도천도교회월보반논설(a)에서 이돈화는 ’근세철학에서는 현상즉실재론이라고 부르도다’라고 하여 53) 허수, 도이돈화 연구반, 123쪽에서 재인용. 54) 井上哲次郞, 도哲學と宗敎반, 153쪽. 『開闢』의 탄생과 일본의 ‘종교철학’ 61 ‘현상즉실재론’이라는 용어를 언급하였다. 도인내천요의반(b)에서는 단행본 체제에 맞게 이와 관련 한 내용을 도식까지 인용하며 양적으로는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했으나, ‘현상즉실재’라고만 하여 오히려 제한적인 용어로만 제시하였고, 그것도 ‘원융영원적 실재’와 병렬적으로 언급하였다. 1931년의 도신인철학반(c)에서는 거의 동일한 내용을 아예 ‘현상즉실재’라는 용어도 사용하지 않고 서술의 주안점도 현상과 실재보다는 ‘실재론’이라는 철학적 입장에 대한 일반적 설명 및 동학사 상이 실재론에 속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데 주었다. 이처럼 이돈화의 글에서 ‘현상즉실재론’ 철학에 대한 명시적 언급은 몇 차례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시간이 갈수록 그 언급의 정도는 약화되어 갔다. 시야를 확대하면 그 밖의 이돈화 글이나 도천도교회월보반및 도개벽반기사 전체에서도 ‘현상즉실재론’에 관한 언급은 보이지 않았고, 이노우 에 테쓰지로의 이름은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이런 면모는 도개벽반에 소개된 여타 사상 및 사 상가의 경우에 비하면 매우 이례적이었다. 이돈화의 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도개벽반초기에 소개 된 서구 근대사상의 경우 구체적인 전거를 밝히진 않아도 창간호의 니체로부터 15호의 플로베르 에 이르기까지 ‘누구의 무슨사상’인가는 명백하게 밝혔다. 이 가운에에는 도개벽반의 주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것도 있지만 단편적인 소개에 그친 것도 있다. 혹시 일본학자가 줄 거부감을 우 려했을까 생각해봐도 그렇지 않은 사례를 다음 인용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14) “宗敎의 統一論은 현대를 통하야 동서 一般이나 이제 그 사상을 대표할만한 一意見을 擧證키 위하야 日本에 유명한 彼 浮田和民氏의 장래의 宗敎論 一節을 紹介하건대 氏는 曰 ...”(夜雷 <이돈화>, 「인내천의 연구」, 도개벽반2, 1920년 7월, 67쪽) 15) “이 실로 人世의 최후종교로서 자처한 所以인저. 汎神觀的 又 實在的 종교가 何故로 人乃天的 종교가 되느냐 하면 吾人은 此에 別로 自家의 의견과 동일한 黑岩周六氏의 최후종교론 槪略으 로 특히 독자에게 소개코저 하노라. 氏는 曰” (夜雷<이돈화>, 「인내천의 연구(續)」, 도개벽반5, 1920년 11월, 48쪽) 이노우에 테쓰지로의 종교철학이 다른 사상에 비하여 이돈화의 사상, 나아가 도개벽반에게 훨씬 커다란 영향을 끼쳤음은 살펴본 바와 같다. 이 때 ‘현상즉실재론’의 영향이 잘 드러나지 않은 채 갈수록 희미해져 간 사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도개벽반주도층이 ‘현상즉실재론’의 흔적을 의 식적으로 감추고 지우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 영향이 클수록 그 결과로 생성된 사상적 혼종성 을 감추고 싶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본다면 결국 ‘현상즉실재론’의 도입과 소거는 자아 및 주체의 통일성, 즉 도개벽반의 정체성과 이돈화의 ‘신인철학’ 형성을 위해 필요한 조처였다고 62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할 수 있다. ‘현상즉실재론’은 천도교의 종교적 사회운동을 위하여 종교의 층위와 사회의 층위를 결합하는 임무를 마치고 사라진 매개물이었던 것이다. 맺음말 본 발표에서는 일본의 ‘현상즉실재론’ 철학이 도개벽반의 탄생과 지속에 끼친 영향과 그 성격을 살펴보았다. 주요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도개벽반은 ‘문화정치’기 천도교가 주도한 종교적 사회운동의 간판 매체였다. 도개벽반창간을 주 도한 천도교청년층은 이미 1910년대 말부터 종교적 사회개조를 지향하였다. 그들은 두 가지 차 원에서 자신들을 여타 세력과 구별하였다. 과학과 경쟁의 폐해가 만연한 사회를 개조하려면 평화 적 원리를 가진 종교가 나서야 하고, 종교 중에서는 시대에 뒤떨어진 舊종교 대신 새 시대에 걸 맞게 ‘사상적 포괄성’을 갖춘 천도교가 적임자라는 것이다. 도개벽반은 ‘종교적 사회개조’의 지향이 물질화된 것으로, ‘사상적 포괄성’을 사회일반적 언어로 확보하는 것이 도개벽반의 주된 욕망을 이 루었다. 도개벽반의 신체는 목차상의 위치와 기능에 따라 ‘계몽의 영역’ ・ ‘소통의 영역’ㆍ‘대중의 영역’으 로 분할되었다. 발간 초기에 도개벽반주도층은 ‘소통의 영역’을 빌어 사상의 자원들을 소개하였다. 다양한 서구 근대사조가 소개되었고, 이와 동시에 외래사조 수용의 구심점으로 ‘인내천’에 관한 논설이 연재되었다. 핵심공간인 ‘계몽의 영역’에서는 ‘인내천’의 종교적 관점으로 사회현안을 포 괄하는 일이 이미 시도되었다. 인식의 측면에서 그들은 ‘신과 인간’, ‘사람과 세계’, 그리고 ‘개인 과 사회’의 두 항들을 각각 ‘상호동일성’의 관계로 파악하는 한편, 실천의 측면에서는 사회문제의 해결방안을 ‘활동주의 도덕’으로 추구하였다. 그러나 종교적 관점에서 사회문제를 포괄하는 본격적인 노력은 ‘主義’의 형성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도개벽반다움’을 만드는 것으로 도개벽반의 자아를 창출하는 일이었다. 핵심 중의 핵심공간인 ‘대표논설’자리는 도개벽반적 자아의 産室이었다. ‘주의’의 형성에서 이돈화는 유행하던 주류사상을 비판적으로 흡수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그 기준은 역시 ‘상호동일성’과 ‘활동주의 도덕’이었다. ‘사람性주의’는 ‘문화주의’의 향상ㆍ진보적 태도와 인격적 평등관을 수용하였으나, ‘인격-문화’간 의 간극과 실천원리로서 ‘도덕’이 가진 정태적 측면은 止揚하며 형성되었다. ‘汎인간적 민족주의’ 는 ‘민족주의’가 가진 양 측면에 유의하면서, 이기주의적 입장(민족주의)과 이타주의적 입장(인류 『開闢』의 탄생과 일본의 ‘종교철학’ 63 주의)을 조화하였다.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적 차이화로 제시된 ‘赤子주의’ 및 이와 연동된 ‘생 명’ 논의에서는 인식과 실천의 양 면에서 본능 ・ 충동의 요소가 더욱 강조되었다. 그런데 도개벽반주체의 형성에 사용된 ‘상호동일성’과 ‘활동주의 도덕’이라는 지침은 일본의 종 교철학인 ‘현상즉실재론’과 밀접한 관련을 가졌다. 이돈화는 이노우에 테쓰지로(井上哲次郞)의 저 서 도철학과 종교반를 통해 ‘현상즉실재론’을 도입한 후, 그것이 지닌 종교철학적 논의를 천도교의 종교적 사회운동을 위한 실천 담론으로 專有하였다. 인식의 측면에서 ‘현상즉실재론’의 ‘현상=실 재’라는 입장은 ‘사회=종교’로 치환되었고, 현상 방면의 ‘정신=물질’이라는 입장은 사회 방면에서 ‘이기=이타’로 전환되었다. 그 결과는 도개벽반의 ‘상호동일성’ 인식으로 이어졌다. 실천의 측면에 서 ‘현상즉실재론’은 欲動 ・ 충동을 핵심으로 하는 ‘意志’ 개념을 최우선으로 하였다. 도개벽반에서 意識과 도덕을 중심으로 한 문화주의의 영향을 받을 때에 그것은 ‘활동주의 도덕’으로 제시되었 으며, 이후 시간이 갈수록 충동 등의 요소는 더욱 강화되어 갔다. 이처럼 도개벽반의 탄생과 지속에서 현상즉실재론의 영향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이노우에라는 이 름이나 저서의 전거를 밝히기는 커녕 시간이 갈수록 그 내용에 대한 소개도 소략해 갔다. 이는 다른 이론과 사상가에 대한 관례에 비추어 매우 이례적이었다. 이는 도개벽반주도층이 ‘현상즉실 재론’의 흔적을 의식적으로 지우려 한 결과로 이해된다. ‘현상즉실재론’의 도입과 소거는 도개벽반 의 통일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이었으며, 이 점에서 ‘현상즉실재론’은 종교의 층위와 사회의 층위를 결합하고 사라지는 매개물이었다. 64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M E M O》 제1부 지정토론 65 제 1 부 지정토론 제점숙 동서대학교 일본어학과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사회교육과 66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식민지 조선에서의 천리교 포교에 대해 -기관지 《미치노토모》를 중심으로〓논평〓 제점숙(동서대학교) 먼저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의 ‘종교를 통해 본 제국일본과 식민지’라는 국제학술심포지엄이 라는 귀한 자리에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서정완 소장님을 비롯한 관계자 여러분께 감 사의 말씀드립니다. 더구나 카와세 선생님의 귀한 논고에 대한 논평을 맞게 된 점에 대해서도 깊 은 감사를 드립니다. 논평자가 일본 유학 시 식민지 조선의 일본불교의 종교 활동과 관련된 테마 로 학위논문을 무사히 제출할 수 있었던 것도 카와세 선생님의 많은 가르침 덕분입니다. 이 자리 를 빌어서 다시 한 번 감사말씀 드립니다. 이번 논평을 계기로 더 많은 배움을 얻는 기회로 삼고 자 합니다. 선생님은 이번 발표에서 통감부와 조선총독부의 종교정책의 흐름을 개관하고, 천리교의 기관지 《미치노토모》라는 잡지 기사를 중심으로 천리교의 포교 현황 및 그 논리에 대해 고찰하고 있습 니다. 이 발표를 통해서 확인된 바는, 천리교는 타 종교와는 다른 조선어 습득을 포교의 중요과 제로 삼고 있었으며 식민지 조선의 ‘일본화’정책에 발맞추면서도 반드시 거기에 모든 것을 의지 한 것이 아니었음을 역설합니다. 이른바 조선민족의 ‘존중’과 제국일본의 ‘욕망’이 겹쳐진 지점에 천리교 포교활동이 있었음을 하나의 특징으로 언급하며, 이러한 특징이 있기에 해방 후 천리교가 타종교와는 달리 잔존할 수 있었던 이유로 보고 있는 듯합니다. 기존 천리교 연구자가 식민지조선 천리교의 활동을 전근대(무당), 근대(근대적 장의)에 중점을 두고 논하고 있는 반면에, 선생님은 교의 정착을 위한 조선어 학습이라는 측면에 더 중점을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식민지조선 천리교 활동을 논함에 있어 다양한 측면을 시야에 둔 선생 님의 논고는 이 분야 연구를 진척함에 있어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하에서는 선 생님이 제시한 논지에 대한 저의 서툰 소견을 포함한 몇 가지 질문을 드리는 것으로 저의 논평 을 대신할까 합니다. 이에 대한 선생님의 고견을 부탁드립니다. 선생님의 논고는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식민지조선에서의 통감부와 조선총독부의 종교정책과 관련 부분입니다. 식민지기 조선에서 한국종교든 일본종교든 종교를 논하기 위해서는 이 종교정책에 관련된 부분은 필수불가결합니다. 그리고 특히, 그 중핵 을 이루는 ‘국가신도’를 둘러싼 담론과 정책은, 조선총독부의 식민정책과 맞물려 한일 종교의 활 동에 있어 지대한 영향을 주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음의 질문을 드립니다. 발표원고 첫 번째 장의 1906년 통감부가 발포한 ‘종교의 선포에 관한 규칙’을 설명하고 있는 단락에서 ‘이 법령에서 사용하고 있는 ‘신도(神道)’란 ‘교파신도’와 ‘신사(神社)신도’가 혼동된 것 이었다. 이때는 아직 ‘국가신도’적인 정책은 행해지지 않았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라 논하고 있 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법령에서 사용된 ‘신도’가 교파신도와 신사신도가 혼동된 것으로 단정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또한 ‘국가신도’적인 정책은 무엇을 의미하며, 국가신도적인 정책이 행해지지 않았다고 보는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국가신도정책’은 일반적으로 신사를 매개 로 성립되어진 천황제내셔널리즘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일본인, 식민지인을 교화하려는 하나 의 전전의 사회체제로 등장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또한 일본사회가 서양근대화의 물결 속에 서 일본 토착신앙과 전통 궁중제사를 결합하여 기독교에 저항하려는 하나의 몸짓으로도 이해되 고 있습니다. 이러한 국가신도를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가 바로 신교의 자유를 역이용한 신사비종 교론(神社非宗敎論)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신사를 종교가 아닌 공공도덕으로 규정함으로써 기독교나 불교 등 개인의 종교 신조와는 무관하게 신사숭경을 국민에게 의무화하는 것이 가능했 습니다. 그렇다면 이 국가신도의 성립시기가 언제이고, 그리고 국가신도정책의 범주를 어디까지 를 볼 것인가가 주요 쟁점이 될 것입니다. 통감부에 의한 ‘종교의 선포에 관한 규칙’이 발포된 1906년 일본 국내에서는 신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국민교화정책, 엄밀한 의미에서의 국가신 도체제를 선포했습니다. 이 시기 일본 정부는 신사비종교론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신사숭경은 종교가 아닌 국민 도덕의 범주에 속하는 논리에 기초하여 지역개량정책 등과 결부하여 신사가 국민교화의 지역적 거점 역할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통감부의 ‘종교의 선포에 관한 규칙’에 서 신도는 국가신도가 아닌 교파신도로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요? 즉 당시 일본국내에서는 국가 신도를 종교에서 제외시키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었기에 당연히 그 속에 포함을 시키지 않 았다 여겨집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시기 조선에서의 국가신도정책이 표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 았으나, 국가신도에 대한 개념은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던 시기로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일본 국내의 사정을 염두에 둔다면, 1906년 조선에서의 ‘종교의 선포에 관한 규칙’에서 국가신도, 교 파신도가 구분이 안 되는 그러한 상황은 아니었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 각하시는지요, 고견을 듣고자 합니다. 68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또한 이번 발표에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으로 천리교의 조선에서의 활동관련 내용입니다. 이에 대해 선생님은 그 활동의 논리를 일제 식민지정책의 수단만이 아닌 이른바 조선민족의 ‘존중’과 제국일본의 ‘욕망’이 겹쳐진 지점에 천리교 포교활동이 있었음을 하나의 특징으로 언급하고 있습 니다. 당연 선생님께서 지적한 바와 같이, 당시 일본종교의 조선에서의 활동을 식민지정책을 위 한 하나의 움직임으로 파악할 수 없음을 최근의 한일학자들 간에 다양한 측면에서 다각적 시도 로 활발히 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즉, 일본 종교와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는 조선종교의 활동 을 친일-항일의 이분법적 구도에서 벗어나 근대적 시도로 보려는 관점도 이에 포함된다 생각됩 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이 언급한 천리교의 활동 중 조선민족의 ‘존중’과 제국일본의 ‘욕망’이 중 첩된 지점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을 말씀해주셨음 합니다. 조선민족을 존 중하는 주체는 여기서 천리교로 추정되지만, 천리교교단을 좀 더 구체적 주체로 파악한다면, 일 본제국을 의미하는 것인지, 조선총독부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일본 국내에서 억압받았던 유사종 교단체로서의 천리교를 의미하는지 궁금합니다. 이에 대해서도 함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천리 교가 식민지 조선에서 활동을 전개해 나가지만, 이는 천리교라는 특정 종교 교단의 문제뿐만 아 니라 이러한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천리교 교단 내부의 근대적 종교로서의 몸부림, 일본제국 과의 식민지지배라는 매카니즘 속에서의 상호작용 등 근대적 개념의 형성 과정 속에 창출된 근 대적 행위로 볼 수 있다 생각합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했을 때, 조선민족의 ‘존중’이라 함은 다양 한 근대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 이럴 경우, 식민지권력이 식민지민의 민족성 이나 문화를 존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이에 대해서도 함께 고견을 주시 면 감사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심포지엄 테마인 ‘종교를 통해 본 제국 일본과 식민지’라는 부분과 접목되는 질문일 것 같습니다. 천리교의 식민지 조선에서의 활동은 분명, 일본불교, 내지는 일본 기독교의 조선에서의 활동과는 다른 측면을 내포하고 있음은 선생님이 지적한 바와 같습니다. 일본 국내에 서 전근대적 미신적 존재로 억압 받은 미개한 존재가, 식민지 조선에서는 문명의 옷을 입은 근대 적 종교로 탈바꿈되어 일본제국과 동등한 입장으로 비문명적 존재인 조선인을 대상으로 종교 활 동 및 사회사업을 전개합니다. 이는 억압받는 존재가 식민지라는 공간을 매개함으로써 지배하는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하며, 그 입장이 역전되는 가운데 식민지 조선에서의 천리교 활동은 일본 거류민, 조선인을 대상으로 전개됩니다. 일본 불교의 경우, 메이지 말 폐불훼석이라는 난관을 극 복하기 위해서는 일본정부가 원하는 종교로 탈바꿈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이 때 일본불교는 〈서양-일본-식민지〉를 매개하면서 다양한 시도와 함께 근대적 종교로써의 근대불교로 재창출되 어가는 과정을 경험합니다. 천리교 역시 이와 유사한 설명이 가능하리라 생각됩니다. 천리교의 조선에서의 활동을 파악하기 위해 단지 식민지 공간에서의 활동만을 주시하는 것이 아닌, 일본국 내에서의 활동도 동시 진행적으로 염두에 두고 논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일본 국내에서의 천리 교의 활동이 식민지 조선에 이식되는 부분이 있는 반면, 역으로 식민지 조선에서의 천리교의 활 동이 도리어 일본 국내 천리교에 영향을 주는 측면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일본제국과 식민 지조선 속에서 상호 교차하는 과정에서는, 억압받는 존재로서의 공통적 이해가 있을 수 있고, 식 민지 지배라는 카테고리 속에서는 공모와 균열이 발생할 수 있을 것이고, 또한 피지배자에 대한 멸시와 억압이 존재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다양한 양상 속에 근대적 종교라는 개념화 과 정거치면서 재창출되어지는 것이 근대적 종교로써의 천리교라 논평자는 생각이 듭니다만, 다시말 해, 선생님은 〈식민지-제국〉을 매개한 천리교의 활동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지 여쭤보고 싶고, 또한 이러한 활동이 조선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여쭤보고 싶습니다. 이상으로 미흡하나마 논평을 마무리하면서 가와세 선생님 발표에 대한 어려운 소임을 마칠까 합니다. 70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M E M O》 《M E M O》 72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M E M O》 학교의식에 나타난 식민지교육 : 현대일본 ‘국가신도’논쟁과 관련하여 히우라 사토코 일본 데이쿄대 이공학부 기초종합학과 학교의식에 나타난 식민지 교육 : 현대일본의 ‘국가신도’논쟁과 관련하여 히우라 사토코 (樋浦郷子) 帝京大 <목 차> 들어가는 말 1. 학교의식에 나타난 종교성 1-1 조선교육령하 규정(規程)에 나타난 ‘어영(御影)’(천황황후사진)의 부재 1-2 ‘어진영’부재의 보통학교 학교의식 : 종교적·비종교적 지방화의 제 양상 2. ‘어진영’분석 결론을 대신하여 1. 들어가는 말 1) ‘국가신도’논쟁과 관련한 본 발표의 위치: 첫 번째 논점 ‘국가신도’란, 대체로 패전, 식민지 해방 이전 일본에서의 공적인 신사 신앙의 이념과 제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30년 가까이 이 용어는 분석 개념으로서의 정의가 흔들려 왔다. 하나 는, 1970년 이래 무라카미 시게요시(村上重良)가 제기한 ‘국가신도’1)에 대하여, ‘국가신도’란 관 76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료에 의해 주도된 신사 제도이며 무라카미의 ‘국가신도’론을 과대하다고 보는 관점에서 제한된 용법으로 재인식할 것을 주장하는 입장이다. 또 하나는, 1946년 2월에 나온 ‘신도지령(神道指 令)’(사회생활에서 ‘국가신도’에 관련되는 것의 금지, 정지를 GHQ/SCAP가 정한 것)이 ‘황실제사’ ‘풀뿌리 파시즘’ 등을 미처 파악하지 못한 점을 재검증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현실생활에 입각한 광역의 개념으로 다시금 파악하려는 입장이다.2) 시마조노(島薗)는, ‘국가신도’를 협의로 인식하려는 연구군에 대하여 황실제사와 천황숭경이라 는 논점이 누락된 점, 그리고 천황숭경을 보급시키는 ‘채널’로서 학교, 특히 ‘교육칙어’의 존재가 중요함을 지적하였다. ‘국가신도’ 안에 ‘교육칙어’와 학교의 존재를 위치지은 점에서 시마조노의 작업은 필자의 연구 관심에 있어 시사적인 존재이다.3) 본 발표에서는 시마조노가 제기한 ‘채널’ 기능에 초점을 맞추어 학교교육 내부의 실태를 분명히 함으로써 ‘국가신도’ 연구사를 검토하고자 한다. 2) 발표자의 최근 연구와 문제관심 : 두 번째 논점 발표자는 지금까지 식민지기 조선에서의 신사와 학교의 상호의존성과 내부대립의 구조에 착목 하면서 천황을 숭경토록 하는 행위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 왔다. 여기서 천황을 숭경토록 하는 행위라 부르는 현상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이미 다양한 측면에서 연구가 행해져 왔다. 예를 들면, 일본 국내에 관해서는 메이지유신기의 신도 국교화 정책에 관한 연구, 천황이 전국을 순회하여 신체를 가시화한 ‘순행’ ‘행차’에 관한 연구, 식민지와 관련해서는 식민지지배의 ‘이데올로기’로서의 분석, 그리고 ‘황국신민화【황민화・동화・민족말살】정책(교육)’ 의 검토, 종교행위 특히 신사참배를 기독교 신자에게 강요하는 문제에 관한 역사연구 등이다. 이 상을 염두에 두면서 본 발표는 시점을 약간 상이한 지점 즉, 식민지하 학교교육 내부에서의 종교 성 문제에 두고자 한다. 1) 村上重良『国家神道』岩波書店 1970년. 2) 전자를 대표하는 연구자는 阪本是丸, 大原康男이고 후자의 입장에서 연구하는 이는 高木博志、畔上直樹、島薗 進、子安宣邦 등이다. 3) 島薗進『国家神道と日本人』岩波書店 2010년. 1 학교의식에 나타난 종교성 1-1 조선교육령하 규정(規程)에 나타난 ‘어영(御影)’(천황황후사진)의 부재 ⓵ 일본 내지의 소학교 소학교령 시행규칙 (1900년 8월 21일 일문부성령 제14호 제28조) ⓶ 타이완 공학교 타이완 공학교 규칙개정 (1912년 11월 28일 타이완총독부령 제40호 제44조) 기원절, 천장절 및 1월 1일에는 직원 및 아동, 학교에 기원절, 천장절, 1월 1일 및 시정기념일에 있어서는 참집하여 다음 식을 행한다 직원 및 아동 공학교에 참집하여 다음 순서에 따라 의 1 직원 및 아동 ‘기미가요’를 합창한다 2 직원 및 아동은 천황폐하 황후폐하 어영에 대하여 받들어 최경례를 한다 3 학교장은 교육에 관한 칙어를 봉독한다 4 학교장은 교육에 관한 칙어에 기초하여 성지가 있 는 부분을 회고(誨告)한다 5 직원 및 아동은 그 축일에 상당하는 창가를 합창한 다 어영을 배대(拝戴)하지 않은 학교 및 특히 부현지사의 식을 행한다 1 직원 및 아동 ‘기미가요’를 합창한다 2 직원 및 아동은 천황폐하 황후폐하의 어영에 대하여 받들어 최경례를 한다 3 학교장은 교육에 관한 칙어를 봉독한다 4 학교장은 교육에 관한 칙어에 기초하여 성지가 있는 부분을 회고한다 5 직원 및 아동은 그 축일에 상당하는 창가를 합창한다 인가를 얻어 복사한 어영 혹은 부현지사에게 적당하다 어영을 배대하지 않은 공학교에 있어서는 전항 제2호 고 인정받은 어영을 봉장하지 않는 학교에 있어서는 의 식을 궐한다 전항 제2호의 식을 궐(闕)한다 또 창가를 과하지 않은 학교에 있어서는 제1호 및 제5호의 식을 결할 수 있다 78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⓷조선의 소학교(일본인 대상) 제2차 조선교육령 하의 보통학교 규정 (1922년 2월 10일 조선총독부령 제6호 제46조) ⓸조선의 보통학교 제2차 조선교육령 하의 보통학교 규정 (1922년 2월 15일 조선총독부령 제8호 제43조) 기원절, 천장절 축일 및 1월 1일에는 기원절, 천장절 축일 및 1월 1일에는 직원 및 아동 학교에 참집하여 다음의 식을 행한다 직원 및 아동 학교에 참집하여 다음의 식을 행한다 1 직원 및 아동 ‘기미가요’를 합창한다 2 직원 및 아동은 천황폐하 황후폐하의 어영에 대하 여 받들어 최경례를 한다 3 학교장은 교육에 관한 칙어를 봉독한다 4 학교장은 교육에 관한 칙어에 기초하여 성지가 있 는 부분을 회고(誨告)한다 5 직원 및 아동은 그 축일에 상당하는 창가를 합창 한다 1 직원 및 아동 ‘기미가요’를 합창한다 (해당 조문 없음) 2 학교장은 교육에 관한 칙어를 봉독한다 3 학교장은 교육에 관한 칙어에 기초하여 성지가 있 는 부분을 회고(誨告)한다 4 직원 및 아동은 그 축일에 상당하는 창가를 합창한다 (해당 조문 없음) 어영을 배대하지 않는 학교에 있어서는 전항 제2호의 식을 궐한다. ⓹ 1938년 이후 조선의 소학교 제3차 조선교육령 하의 소학교 규정 (1938년 3월 15일 조선총독부령 제24호 제45조) 기원절, 천장절, 명치절 및 1월 1일에는 직원 및 아동 학교에 참집하여 다음의 식을 행한다 1 직원 및 아동 ‘기미가요’를 합창한다 2 직원 및 아동은 천황폐하 황후폐하의 어영에 대하여 받들어 최경례를 한다 3 학교장은 교육에 관한 칙어를 봉독한다 4 학교장은 교육에 관한 칙어에 기초하여 성지가 있는 부분을 회고(誨告)한다 5 직원 및 아동은 그 축일에 상당하는 창가를 합창한다 어영을 배대하지 않은 학교에 있어서는 전항 제2호의 식을 궐한다 ↙ 통합 1-2 ‘어진영’부재의 보통학교 학교의식: 종교적·비종교적 지방화의 제 양상 1-2-1 Religious Localization : 신단(かみだな), 신찰(神札), 정화(おはらい) 神宮大麻 (신찰) 예1 : 매일신보 1937년 12월 24일 예2:매일신보 1938년 4월 24일 80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표 1】 조선신궁 대불식(大祓式) 참열인 수의 추이 단위 : 명 学校種別 1933年 1934年 1935年 1936年 1937年 帝国大学予科 3 1 1 0 0 高等専門学校 1 11 3 13 43 高等教育機関小計 4 12 4 13 43 中学校 12 2 5 5 7 高等女学校 11 27 34 50 157 高等普通学校 20 10 21 27 107 女子高等普通学校 2 5 8 13 28 実業学校 35 91 38 162 117 師範学校 51 5 0 54 35 各種学校 24 20 50 22 29 中等教育機関小計 155 160 156 333 480 小学校 15 25 49 23 115 普通学校 61 43 29 47 491 初等教育機関小計 76 68 78 70 606 学生と引率者合計(a) 235 240 238 416 1,129 全参列者数(b) 257 273 276 441 1,269 (b)に占める(a)の割合 91% 88% 86% 94% 89% *전거::『朝鮮神宮年報』(朝鮮神宮社務所 편)각 년 판. 인솔자 포함.) 1-2-2 Religious Localization:‘황국신민서사’와 ‘휴대하는 칙어등본(勅語謄本)’ 예1 ‘서사’가 의식에 도입되다 예2 ‘휴대하는 칙어등본’ 전거:1937년 10월 2일 학제 266호 「국민의식강조에 관한 건」 전거:『식민의 유산, 유신의 추억』, (『現行朝鮮教育法規』,학무국, 1942년) 민족문제연구소, 2012년 38쪽 82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2 ‘어진영’분석 【표 2 】 조선에서의 ‘어진영’ 하부(下付)의 실태 *전거:宮内公文書館所蔵『御写真録』각 년 판, 『昭和十二年 朝鮮諸学校一覧』『昭和十八年 朝鮮諸学校一覧』 (阿部洋 외 편『植民地期政策史料集成 朝鮮篇』龍渓書舎, 第60巻, 第62巻 所収) 1938년 제3차 교육령하의 의식규정에 ‘어영에 대하여 받들어 최경례’가 도입된 후의 실태 ↓ ·보통학교 →대부분에 교부되지 않음. ·고등보통학교·여자고등보통학교→‘내선일체’화 제도적 진행과 함께 교부율 저하. ·실업학교→전시체제의 진전과 함께 교부학교 증가. 결론을 대신하여 첫 번째 논점 제국일본의 학교교육에서 본 ‘국가신도’상 ●‘국가신도 채널’로서의 학교교육→식민지 교육실태의 특수성에서 역으로 비추어본 체제와 논리. 두 번째 논점 식민지조선의 학교에서 나타난 종교행위 강요의 개별적 실태 ●‘세속성’을 근본이념으로 하는 근대 학교교육→일본 근대화 도정에서 교육시스템이 짊어진 불 가피한 모순이 적극적으로 드러남. 권력에 의한 자유로운 심신(心身)에 대한 개입이 학교교육의 비종교적 위장으로 불가시화(不可視 化)하는 구조와 그 붕괴. 84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M E M O》 学校儀式に見る植民地の教育 - 現代日本の「国家神道」論争とのかかわりから - 樋浦郷子 帝京大 <目 次> はじめに 1 学校儀式に見る宗教性 1-1 朝鮮教育令下の規程に見る「御影」 (天皇皇后写真)の不在 1-2「御真影」不在の普通学校における学校儀式 ―宗教的・非宗教的ローカライズの諸相― 2「御真影」の分析 まとめにかえて はじめに 1「国家神道」論争に関わる本発表の位置づけ ―問題意識について― 「国家神道」とは、概ね敗戦、植民地解放以前の日本における公的な神社信仰の理念や制度を 指す言葉として用いられる。しかしこの30年近く、この言葉の分析概念としての定義は揺れ動 いてきた。 ひとつは、1970年以来村上重良が提起した「国家神道」1)に対し、「国家神道」とは官僚によ り主導された神社の制度であり、村上の「国家神道」論を過大であるとみなす視座から、限定 86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的な用法として捉えなおしを主張する立場である2)。いまひとつは、1946年2月に出された「神 道指令」(社会生活における「国家神道」にかかわるものの禁止、停止をGHQ/SCAPが定めたも の)が「皇室祭祀」「草の根のファシズム」などを捉えきれなかったことを再検証すべきである という視座から、現実の生活などに即して広域な概念として把握しなおそうという立場であ る3)。この視角から島薗進は、「国家神道」を狭義に捉えようとする研究群に対し、そこから皇 室祭祀と天皇崇敬という論点が抜け落ちていることと、天皇崇敬を普及させる「チャンネル」 として、学校、特に「教育勅語」の存在が重要と指摘する。島薗の仕事は、「国家神道」とい うパラダイムの中に「教育勅語」と学校の存在を位置付ける点において、筆者の研究関心にと り示唆的な存在である。 本発表では、島薗の視角を敷衍し、「チャンネル」としての学校教育の役割に焦点を当て、 学校教育内部の詳細な実態を明らかにすることで「国家神道」像を再考したい。 2 発表者のこれまでの研究と問題関心 ―具体的課題の設定― 発表はこれまで、植民地期朝鮮における神社と学校との相互依存性や内部対立の構造に着目 しつつ、天皇を崇敬させる行為について研究を重ねている4)。 ここでさしあたり天皇を崇敬させる行為と呼ぶ現象は、これまですでにさまざまな側面から研 究は行われてきた。例えば、日本国内のことに関しては、明治維新期の神道国教化政策に関わ る研究、天皇が全国を巡回してその身体を可視化していった「巡幸」「行幸」に関わる研究、 植民地に関わっていえば、支配の「イデオロギー」としての分析、そして、「皇国臣民化【皇 1) 村上重良『国家神道』、岩波書店、1970年。 2) 阪本是丸らは、内務省神社局の官僚に主導された内務行政のありようが「国家神道」の姿なのであり、神道指令が 「State-Shinto(国家的神道)」の語のもとに認定した広範囲の影響力や、村上重良が『国家神道』(岩波書店、 1970年)で言うような影響力を持たなかったと論ずる。阪本是丸「神社制度調査会と神祇院の設立」『神道史研 究』第37巻第3号(1989年)、同「国家神道体制の成立と展開――神社局から神祇院へ」井門富二男編『占領と日 本宗教』(未來社、1993年)。 3) 近年畔上直樹、島薗進、高木博志らが、こうした「国家神道」の限定的把握よりも、「神道指令」に示される「St ate-Shinto」概念の不十分な部分から積み残されてきた問題群(「草の根」のファシズム、皇室祭祀・神社と「慰 霊」等)に着目することで阪本らとは異なる立脚点からの捉え直しを行っている。畔上直樹『「村の鎮守」と近 代日本―「国家神道」の地域社会史』(有志舎、2009年)。島薗進『国家神道と日本人』、岩波書店、2010年。 4) 韓国語の論文として樋浦郷子「식민지 신사와 학교의 관계-관학체 분석」(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한국학의 세계화사업단『연세국학총서 93 일제식민지시기 새로 읽기』)がある。 民化・同化・民族抹殺】政策(教育)」の検討、宗教行為、とくに神社参拝をキリスト教信者 に強要する問題に関わる歴史研究などである。 これらをふまえながら、本発表の視点をやや異なるところに据えたいと考える。すなわち、植 民地下の公立学校教育の内部における宗教性の問題である。近代公教育は、無償性と世俗性 (非宗教性)ともって大きな特徴としている。しかし朝鮮には義務教育制が布かれなかったた め、まず無償性が保障されなかった。 そして「世俗性」「非宗教性」に関して言えば、1890年に確立する近代日本の学校教育は、 天皇を崇敬させる行為を、宗教行為ではなく学校教育における教育活動の一環ととらえること で、一応の線引きを完成していた。仮説的に言うと、その後朝鮮を植民地化した際、この線引 きをそのまま移入す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すなわち、植民地期の朝鮮では、「公教育」の二 つの大きな特性は、二つとも保障されずに1945年の解放に至ったと、ここでひとまず仮定して おきたい。 日本の教育の近代化(手習い塾から学校へ)の内実を考えてみるならば、その大きな変容を特 徴づけるもののひとつとして、「釈奠」の時代から天皇の祭祀に関連づけた学校儀式の時代へ の変化を挙げねばならない。なかでも、1945年までの学校儀式の中核として機能した装置が 「教育勅語」と「御影(ぎょえい)」(一般に「御真影(ごしんえい)」と呼称された)である。日 本国内の学校儀式では、教育勅語謄本を校長が捧げ待って朗読することが制度化されていた。 さらに、天皇皇后写真を儀式時だけ講堂正面に掲げて拝礼することも、法律に明記されてい た5)。 これら二大装置のうち「教育勅語」に関しては、日本国内の教育史研究者の中で多くの研究 がなされてきた。しかしそれに比して、80年代までは「御影」の研究は手薄であった。そうし た状況を変えたのは、90年代の佐藤秀夫による仕事である。佐藤は「御影」を「教育勅語」と ならぶ天皇制教育の二大装置と位置付け、これら二つの装置によりもたらされた学校儀式の制 度と構造とを論じながら、天皇崇敬と教育のありさまを深く掘り下げ分析した6) 。 しかし、佐藤の仕事は次の諸点において未完に終わった。第一に、植民地の教育制度や実態に は検討が及ばなかったことである。第二に、唱歌の宗教的影響(西欧のキリスト教儀式の影 響)を興味深くも指摘しながら、論証されることがなかったことである。発表者はこれらのう ちさしあたり第一の点に焦点を当てて、植民地期朝鮮において実践された「天皇を崇敬させる 教育」の実態について考察する。この考察により、日本では当然とされてきた近代日本の教育 5) こうしたことが、その宗教性を批判的に問われることなく1945年まで継続したのは、「教育勅語」が周到に「非 宗教」を装ったことが大きく影響していると発表者は見る。「六月二十日山県宛井上書簡」『教育勅語渙発関係 資料集』第2巻、国民精神文化研究所、1939年、432頁。 6) 佐藤秀夫編『続 現代史資料 御真影と教育勅語』Ⅰ-Ⅲ、みすず書房、1994-96年。 88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のありかたとそれへの歴史的理解に対して、新しい光を当ててみたいと考えている。 1 学校儀式に見る宗教性 1-1 朝鮮教育令下の規程に見る「御影」(天皇皇后写真)の不在 ① 日本内地の小学校 小学校令施行規則(1900(明治33)年8月21日 文部省令第14号第28条) 紀元節、天長節及一月一日ニ於テハ職員及児 童、学校ニ参集シテ左ノ式ヲ行フヘシ 一 職員及児童「君カ代」ヲ合唱ス 職員及児童ハ 天皇陛下 皇后陛下ノ御影 二 ニ対シ奉リ最敬礼ヲ行フ 三 学校長ハ教育ニ関スル勅語ヲ奉読ス 学校長ハ教育ニ関スル勅語ニ基キ聖旨ノ在 四 ル所ヲ誨告ス 職員及児童ハ其ノ祝日ニ相当スル唱歌ヲ合 五 唱ス 御影ヲ拝戴セサル学校及特ニ府県知事ノ認可ヲ 受ケ複写シタル御影 若ハ府県知事ニ於テ適当ト 認メタル御影ヲ奉蔵セサル学校ニ於テハ前項第 二号ノ式ヲ闕ク 又唱歌ヲ課セサル学校ニ於テハ 第一号及第五号ノ式ヲ欠クコトヲ得 ③ 朝鮮の小学校(日本人対象) 第二次朝鮮教育令下の普通学校規程(1922 (大正11)年2月10日朝鮮総督府令第6号第46 条) 紀元節、天長節祝日及一月一日ニ於テハ職員 及児童学校ニ参集シテ左ノ式ヲ行フヘシ 一 職員及児童「君カ代」ヲ合唱ス 職員及児童ハ 天皇陛下 皇后陛下ノ御影 二 ニ対シ奉リ最敬礼ヲ行フ 三 学校長ハ教育ニ関スル勅語ヲ奉読ス 学校長ハ教育ニ関スル勅語ニ基キ聖旨ノ在 四 ル所ヲ誨告ス 五 職員及児童ハ其ノ祝日ニ相当スル唱歌ヲ合 ② 台湾の公学校 台湾公学校規則改正(1912(大正元)年11月 28日台湾総督府令第40号第44条) 紀元節、天長節、一月一日及ビ施政記念日ニ 於テハ職員及児童公学校ニ参集シテ左ノ順序 ニ従ヒ儀式ヲ行フヘシ 一 職員及児童「君カ代」ヲ合唱ス 職員及児童ハ 天皇陛下 皇后陛下ノ御影 二 ニ対シ奉リ最敬礼ヲ行フ 三 学校長ハ教育ニ関スル勅語ヲ奉読ス 学校長ハ教育ニ関スル勅語ニ基キ聖旨ノ 四 在ル所ヲ誨告ス 職員及児童ハ其ノ祝日ニ相当スル唱歌ヲ 五 合唱ス 御影ヲ拝戴セサル公学校ニ於テハ前項第二号 ノ式ヲ闕ク ④ 朝鮮の普通学校 第二次朝鮮教育令下の普通学校規程(1922年 (大正11)年2月15日朝鮮総督府令第8号第43 条) 紀元節、天長節祝日及一月一日ニ於テハ職員 及児童学校ニ参集シテ左ノ式ヲ行フヘシ 一 職員及児童「君カ代」ヲ合唱ス (該当する条文なし) 二 学校長ハ教育ニ関スル勅語ヲ奉読ス 学校長ハ教育ニ関スル勅語ニ基キ聖旨ノ 三 在ル所ヲ誨告ス 四 職員及児童ハ其ノ祝日ニ相当スル唱歌ヲ 唱ス 御影ヲ拝戴セサル学校ニ於テハ前項第二号ノ式 ヲ闕ク ⑤ 1938年以後朝鮮の小学校 合唱ス (該当する条文なし) ※写真(御影)規程の欠如 第三次朝鮮教育令下の小学校規程(1938年3月 15日朝鮮総督府令第24号第45条) 紀元節、天長節、明治節及一月一日ニ於テハ 職員及児童学校ニ参集シテ左ノ式ヲ行フベシ 一 職員及児童「君ガ代」ヲ合唱ス 職員及児童ハ 天皇陛下 皇后陛下ノ御影 二 ニ対シ奉リ最敬礼ヲ行フ 三 学校長ハ教育ニ関スル勅語ヲ奉読ス 学校長ハ教育ニ関スル勅語ニ基キ聖旨ノ在 四 ル所ヲ誨告ス 職員及児童ハ其ノ祝日ニ相当スル唱歌ヲ合 五 唱ス 御影ヲ拝戴セザル学校ニ於テハ前項第二号ノ式 ヲ闕ク 統合 1-2 「御真影」不在の普通学校における学校儀式 ―宗教的・非宗教的ローカライズの諸相― 1-2-1 Religious Localization ―神棚(かみだな)、神札、「お祓(はら)い」 近代化にともない整えられた本式の学校儀式を、教育学者の佐藤秀夫は「天皇制のマツリ (祭祀)」7)と呼称したが、これと「非宗教」はもとより矛盾を内包する。特に1930年代以降、 キリスト教系学校へ神社参拝が強要された際、「天皇制のマツリ」の「非宗教」という装いの 破綻は日本内地でも顕わになった8)。 しかし朝鮮に関しては、問題はそこに留まらない。異民族に対して「教育勅語」の理念 (「皇祖皇宗」の観念など)が適用困難であり、実際にその謄本が交付される学校はわずか だった。加えて「御影」は、1938年朝鮮教育令が日本人教育機関の規程と統一されるまで、学 校規程から取り除かれていた。すなわち「非宗教」を装う儀式の二大装置が大部分の学校では 7) 佐藤秀夫編(1994年)前掲書、32頁-37頁。 8) 矛盾の綻びは、日本内地では上智大学靖国神社不参拝事件や美濃ミッション事件などが示す通りである。朝鮮での 神社参拝をめぐる軋轢や葛藤に関しては、韓皙曦『日本の朝鮮支配と宗教政策』(未來社、1988年)、李省展 『アメリカ人宣教師と朝鮮の近代――ミッションスクールの生成と植民地下の葛藤』(社会評論社、2006年)조수 옥 증언『신사 참배를 거부한 그리스도인』(동인、2002年)などで詳らかにされている。 90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存在しなかったのであり、公立学校の学校儀式において、「非宗教」を装うことが困難な状況 であった。加えて、植民地には「信教の自由」も一定の範囲で認めた大日本帝国憲法が適用さ れず、真宗など日本内地では天皇崇敬に対して一定の抵抗を示す勢力が存在できなかった。 結果、日本内地では個人の信仰の範疇のものと見なされ、公立学校教育には見られなかった 「宗教的」な道具立てが、植民地教育でより広く重い意味を持たされた。過剰に要求される神 社参拝9)だけではない。「神宮大麻」という神札(しんさつ)(伊勢神宮のふだ)を祀る小型の神 殿である神棚(学校や地域によっては大麻殿や大麻奉祀殿などと呼称し、校庭に設置する例も あった)を学校に祀った。その場所は、日本内地の学校儀式では「御影」の定位置である講堂 の正面中央であった。やがて持ち運びが可能な神棚が、(朝鮮人生徒が大部分を占める)工業 実習学校の生徒によって「実習」名目で製作され、児童生徒に卒業記念などで配布された。さ らにのちには各戸に強制的に頒布された。 日本内地では、有力な仏教勢力(真宗)が1930年代半ばまで神宮大麻の頒布に反対し続けてい た。30年代後半、戦時体制の深刻化とともに真宗の抵抗が弱体化したあとでも、千葉県議会で は学校への神棚設置が問題視されるなど、体制への一定の抵抗が見られた。 朝鮮では33年から朝鮮神職会という神社神官(法的には神職と呼称する)が頒布をにない、の ちに行政機構を通じて面事務所から強制的に頒布されるようになった。学校の神社参拝には、 教科書掲載の内容を学ぶなどの教育実践としての建前が存在していた。しかし神棚や神札の強 制的頒布には、その建前が通用しがたい。例えば貴族院議員で神社界とつながりの強かった内 務・文部大臣経験者水野錬太郎は、1930年の神社制度調査会で「所謂宗教的行動、例えば今お 祓いというようなことをやる、そうして式に列せしむる。そうするとその事柄は神社に対し強 制的に信仰せしむることになる、そこに行くと信教の自由というものが殺がれるようになる」 と発言している。児童生徒の神社参拝は教育行為であるが、「お祓い」や神社の祭祀参列とな ると個々人の「信教の自由」すなわち宗教信仰の問題になるという考え方があることを認めた ものである10)。 「お祓い」は、日本の神道の中でも宗教色の濃い「ケガレ」を取り除くための儀礼である。日 本内地では、天皇崇敬教育の場面(学校儀式や「修身」科の授業、教科書など)では避けられ ていた。ここには、一応の「非宗教」の装いと「お祓い」が相容れないとの判断があった。 しかし朝鮮では日本内地とは異なり公立学校教育をつうじて、「禊(みそぎ)・祓(はら)い」な ど日本のいわゆる「古神道」の流派で行われていた行為や、キリスト教信者だけでなく仏教の 立場からも受け入れがたい「神札」頒布が、家庭よりも公立学校の中でさかんに実施されてい 9) 朝鮮における神社参拝への要求が、なぜ過剰であったのか、発表者は別稿で論じた。樋浦郷子『神社・学校・植民 地―逆機能する朝鮮支配』、京都大学学術出版会、2013年、第5章、結章。 10) 『近代神社行政史研究叢書Ⅰ 神社制度調査会議事録①』(神社本庁、1999年)、63頁-64頁。 た。例えば表1に示したように朝鮮では、「祓い」の中でもっとも大きな祭祀である朝鮮神宮の 「大祓(おおはらえ)」に学校から多くの児童生徒が動員された。これは日本内地では見られない 事態であった。 表1 朝鮮神宮大祓式参列者の実態 (典拠:『朝鮮神宮年報』各年版) 学校種別 1933年 1934年 1935年 1936年 1937年 帝国大学予科 3 1 1 0 0 高等専門学校 1 11 3 13 43 高等教育機関小計 4 12 4 13 43 中学校 12 2 5 5 7 高等女学校 11 27 34 50 157 高等普通学校 20 10 21 27 107 女子高等普通学校 2 5 8 13 28 実業学校 35 91 38 162 117 師範学校 51 5 0 54 35 各種学校 24 20 50 22 29 中等教育機関小計 155 160 156 333 480 小学校 15 25 49 23 115 普通学校 61 43 29 47 491 初等教育機関小計 76 68 78 70 606 学生と引率者合計(a) 235 240 238 416 1,129 全参列者数(b) 257 273 276 441 1,269 (b)に占める(a)の割合 91% 88% 86% 94% 89% このような「非宗教」の建前を逸脱した学校内の強要は1930年代はじめには既に行われてい たものであり、のちの「創氏改名」(39年民事令改訂)や「特別志願兵制度」(38年)など の、戦時体制やいわゆる「皇国臣民化」にかかわる施策とは異なる特性を持つ。そして、公教 育の「世俗性」(非宗教性)という表面的装いの中で不可視化され、研究史の中でも着目され ることがなかった。 92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資料1: 資料2: 学校に「大麻奉祀殿」 資料3: 「誓詞」が儀式に導入される 神宮大 (神札) 典拠:『毎日申報』 1937年12月24日 典拠:昭和12年10月2日学第266号「国民意識ノ強調 ニ関スル件」(『現行朝鮮教育法規』、学務局、 1942年)。 資料4: 「携帯する勅語謄本」 典拠:『식민의 유산,유신의 추억』、 민족문제연구소、 2012年、38頁。 1-2-2 Ritual Localization―「皇国臣民ノ誓詞」と「携帯する勅語謄本」― 1930年代後半、徐々に日本式「非宗教」の学校儀式の装置が導入されようとする。しかし朝 鮮人教員が半数以上を占めた普通学校では、日本人教員が朝鮮人教員に対して警戒心を抱き、 写真が「奉護」できない状態、すなわち「不敬」状態が生まれることをおそれる事態になっ た。そのため写真は結局解放に至るまで「京城」(日本人教員が多い)の学校をのぞきほとん ど交付されることはなかった。 そうした状況のもとで、日本式「非宗教」儀式は貫徹しないだけでなく、逸脱する。それを ここでritual localizationと表現した。上述のように日本内地と台湾の学校儀式は「君が代→「御 影」(写真)最敬礼→教育勅語奉読→校長誨告→唱歌」の順番で構成されていた。しかし、資 料3のように、「御影」なき朝鮮の学校儀式は「君が代→「皇国臣民ノ誓詞」→教育勅語奉読→ 校長誨告→唱歌」のようなローカライズが行われた。このことは、日本の近代化にともなって 一応整えられた「学校儀式」の装いが、植民地朝鮮で通用しなかったことを示している11)。 資料4の写真は、「教育勅語」の書かれた小さな紙を持って「奉読」する様子を写している。 「教育勅語」は、暗唱することを前提としたものであるため、このような紙を日本内地の学校 史資料で見ることはない。朝鮮における地域社会の指導者育成を担った公立農業実業学校にお いても、「教育勅語」にもとづく―すなわち日本内地でいったん線引きを確立した「非宗教」 の方法による―修身教育が成立しない様態を示している。 2 「御影」(天皇皇后写真)の分析 1938年第三次朝鮮教育令(日本人の小学校規程との同一化)と相前後して、朝鮮人対象校への 初めての写真交付(宮内省からの「下賜」)が開始された。しかし、とくに初等教育段階たる 普通学校(小学校・国民学校と名称が変遷した)にはほとんど交付が進展しなかった。表2で確 認しておこう。 表2 朝鮮における「御影」(「御真影」)交付の様態(典拠:宮内公文書館所蔵『御写真録』各 年版、『昭和十二年 朝鮮諸学校一覧』『昭和十八年 朝鮮諸学校一覧』(阿部洋ほか編『日本 植民地教育政策史料集成』第60巻、第62巻所収)。 11) 写真の非交付は、朝鮮人教員による写真の取り扱い(「奉護」と呼ばれた)が「不敬」にわたることを日本人が 恐れたためと発表者は見ている。これについて詳細は別稿を参照されたい。樋浦郷子「植民地朝鮮の「御真影」― 初等教育機関の場合―」『日本の教育史学』第57号、教育史学会、2014年10月(印刷中)。 94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朝鮮総督と下賜年月 教 育 段 階 対 象 民 族 朝鮮人 朝鮮人 朝鮮人 朝鮮人 朝鮮人 朝鮮人 民族共学 中等 民族共学 民族共学 民族共学 民族共学 民族共学 高等 民族共学 その他 初等 学 校 種 別 28.9-36.4 37.4-42.442.10-44.12 合 山 宇 齋 梨 垣 藤 半 一 實 蔵 成 公立普通学校 私立普通学校 公立高等普通学校 私立高等普通学校 公立女子高等普通学校 私立女子高等普通学校 新設公立中学校 新設公立高等女学校 公私立実業学校※ 実業高等・高等専門 官公立師範学校 官立帝国大学予科 官立帝国大学 官庁・税関等 合計枚数 0 0 0 0 0 0 7 5 1 1 1 8 23 南 次 郎 56 0 9 0 9 0 0 0 23 2 5 0 0 2 106 小 磯 国 昭 阿 部 信 行 計 枚 数 21 0 7 0 2 0 5 7 6 0 2 0 0 0 50 77 0 16 0 11 0 5 7 36 7 8 1 1 10 179 学 校 総 数 3843 92 16 11 11 10 22 21 91 20 15 1 1 交 付 率 学 校 数 年 の ( % 基 準 ) 1943 2.0 1937 0.0 1937 100.0 1937 0.0 1937 100.0 1937 0.0 1943 22.7 1943 33.3 1943 39.6 1943 35.0 1943 53.3 1943 100.0 1943 100.0 整 理 番 号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実業学校の統計に公立実業補習学校2校を含む。 表2からわかることを、学校種別にまとめたい。第一に、初等教育段階の普通学校である。普 通学校には、ほとんどすべての学校で「御影」不在のまま解放をむかえた。その結果、religious localizationの側面も、ritual localizationの側面も強められていった。ただし前者は1930年代初旬か らすすめられ、後者は30年代後半の政治体制の強化とともに進展するという時期的差異があっ た。1937年末に至り、「京城」府ではほかの地域と異なり例外的に大部分の普通学校に写真が 交付された。「京城」に創建された朝鮮神宮への参拝者数は、「御影」交付後は、はっきりと 減少した。「御影」導入と、それ以前に神社参拝が担った機能の連関を強く推定できる。 第二に、中等教育段階の高等普通学校・女子高等普通学校である。1938年まで各道に一つ程度 しかなかった高等普通学校には、一瞬だけ「完全に」交付されたかに見える。しかし、1938年 以後新たに中等教育の拡充が行われることとなり、「一視同仁」政策のもとで民族共学を原則 として既存の18校に加えて計43校の中学校・高等女学校が設置された。これらの新設校には交 付が進まず解放に至ったため、中等普通教育機関への写真交付率は徐々に低下した。すなわち 、アイロニカルにも「一視同仁」「内鮮一体」政策下でこそ、日本式公教育における「非宗教 」の装いが完成せずに瓦解したとも言える。 第三に、中等教育機関の中の実業学校(農業実習学校、工業実習学校など)である。相対的 には学校の財政に余力があったためか、「奉護」のための人員を雇用する事例も見られ、教職 員が5人以下という小規模な実業補習学校(1年制)にも交付された例が見られる12)。 おわりに 研究の問題意識: 帝国日本の学校教育から捉えなおす「国家神道」像 「非宗教」の装いの内実に、日本内地の幅広い民衆信仰や「古神道」のようないわゆる「国家 神道」とは別個のもの、当時から日本内地では個々人の宗教信仰に属する問題とみなされてき たものが、公教育に入り込んでいる様態を、朝鮮人教育(とくに初等教育)の中に確認しう る。 1970年に村上重良は著書『国家神道』において、近代の「国家神道」体制のもとで創建された 新しい神社について説明し、その一つの系統に植民地における神社(朝鮮神宮・台湾神社な ど)を挙げている。しかし、村上の提起への批判がなされ、「国家神道」概念を再考する動き が研究史の中に出始めて以来、「国家神道」のパラダイムから植民地における神社創建につい ての言及さえることは非常に少なくなった13)。そのような現代日本の状況もふまえながら、本 発表の課題を通じて見えることは、植民地の学校の実態を明確にすることが、「国家神道」の パラダイムを広範囲なものとして把握するための重要なキーを持っているということである。 本発表の具体的課題: 植民地朝鮮の学校における宗教行為の強要の実態 神社参拝の強要という問題を語る研究史の視点は、これまでほとんどキリスト教やキリスト 教系私立学校への「弾圧」の問題へと集中してきた。しかし、論点はそればかりではない。強 要した(された)のは、神社参拝ばかりではなく(それほど多くの地域に神社はない)、地域 社会の普通学校における「小型の神社」たる神棚、そこに祀る神宮大麻、そこで教育の一環と いう名目で行われる拝礼など、幅広い強要の問題としてとらえなおすべきである。 そのようにして見直すならば、宗教を強要する問題は、キリスト教信者を対象とするもので なくとも1930年代初旬にはすでに存在していたこと、そしてそれが学校教育の「世俗性」(非 宗教性)の建前により不可視化されてきたということを読み取ることができる。 1930年代後半には、日本内地よりも色濃い宗教性を持つ学校教育の矛盾はいよいよ深刻化し、 ritualな、かつ身体的な側面が強化されてゆく。そこでようやく「非宗教」の建前をかたちづく る「御影」の導入が試みられるわけだが、朝鮮人教員に「奉護」を任すことができないという 12) 高等普通学校の修業年限は5年であるが、実業学校は5年制または3年制、実業補習学校は1年制である。学校種別 交付率の大きな差異の要因を、発表者は朝鮮人教員の多寡によるものと見ている。写真の「奉護」には、宿泊の 当番(宿直)をする必要があったわけだが、毎日交代で宿直の当番を充たすほどの数の(男性)教職員が在籍す る学校は、とくに中等教育機関ではとても少なかった。樋浦 郷子同上論文。 13) このような研究の停滞状況を挽回しうる研究がようやく近年現れた。『植民地朝鮮と宗教 帝国史・国家神道・ 固有信仰』(磯前順一・尹海東編、三元社、2013年)である。 自縄自縛の状況に陥り、「御影」交付はとくに初等教育機関では滞った。そのような状況のも と、例えば「皇国臣民ノ誓詞」のような逸脱・ローカライズがばらばらに実践され始めた。 そもそも近代日本の学校儀式における「非宗教」の装いという一応の線引きが、日本国内に しか通用しないものであり、朝鮮植民地化とともに教育現場はその深刻な矛盾を露呈し続け、 講堂では「御影」のための場所に神棚を設置する、儀式規程に明示せぬまま「誓詞」を儀式手 順に入れ込むなど、場当たりの弥縫の果てに崩壊したと考えられる。 1920년대 북간도 용정에서 전개된 중학교 설립운동 진 타이꾸어 (Jin Taiquo) 연변대 인문사회과학학원 역사학부 1920년대 북간도 용정에서 전개된 중학교 설립운동 99 1920년대 북간도 용정에서 전개된 중학교 설립운동 金 泰 國(Jin Taiquo) 延邊大 人文社會科學學院 歷史學部 <목 차> Ⅰ. 머리말 Ⅱ. 용정의 주거환경과 지리위치 Ⅲ. 용정의 사회시설 Ⅳ. 종교계의 중학교 설립운동 Ⅴ. 맺음말 Ⅰ. 머리말 20세기 20년대 북간도지역 한인사회는 1919년의 3 ・ 1운동과 1920년의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독 립전쟁 그리고 “경신참변”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격변기를 헤쳐 나가면서 새로운 변혁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러한 변혁의 시대는 한민족의 독립운동세력이 북간도지역을 떠나고, 종교계 가 그 자리를 대신하면서 시작되었다. 종교계는 북간도지역 한인사회에 다가가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중학교 설립운동이란 카드를 선 택하였다. 이러한 선택이 그대로 적중하면서 종교계는 북간도지역 한인사회에 튼튼하게 안착할 수 있었다. 종교계는 중학교를 바탕으로 북간도지역 한인사회의 새로운 변혁을 모색하고자 하였 다. 이러한 변혁의 중심에 바로 이 글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용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용정은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중부에 자리 잡고 있다. 용정시정부의 소재지이 다. 용정은 처음에는 육도구(六道溝)라 불리다가, 육도하(六道河) 기슭에서 이주 한인들이 옛 우 100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물을 발견하고, 두레박을 설치하면서 ‘용정’이라는 지명이 생겨나게 되었다.1) 20세기 20년대 용정은 북간도지역 한인사회에서 여러 가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었다. 교육의 중심지로, 새로운 사상을 접수하고 전파하는 온상으로, 사회운동의 견인차로서의 역할이 그것이었다. 이러한 역할은 종교계가 용정에서 설립하였던 대성 ・ 은진 ・ 동흥・ 영신 ・ 광명 등 중 학교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상기 중학교는 학생들이 근대 문화지식을 습득하는 창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북간도지역 한 인사회의 새로운 변혁을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들 중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새로운 사상을 접수하고 연구하는 각종 단체들이 우후죽순마냥 설립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용정에서는 학생회 ・ 청년회 ・ 노동회・ 부녀회 ・ 소년회 등 여러 사회단체들이 설립되면서 북간도 지역 한인사회 민족운동의 진원지가 되었다. 따라서 용정은 북간도지역 한인사회의 ‘문화의 발상 지’ ・ ‘항일투쟁의 책원지’ ・ ‘조선민족력사의 축도’2)라는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 북간도 지역 한인사회를 서술하는 논저에서는 하나같이 용정을 한인사회의 문화중심지로 그 위상을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위상 설정은 대부분 당위성에서 그치고 있다. 그 반면에 상기 위상을 지닐 수 있는 용정의 문화 환경에 대한 자세한 검토는 별로 이루어 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용정의 주거환경과 지리위치, 사회시설, 종교계가 용정에 서 추진하였던 중학교 설립운동 등에 대한 검토를 통하여 용정이 북간도지역 한인사회에서 지니 고 있던 위상에 대하여 논의해 보고자 한다. Ⅱ. 용정의 주거환경과 지리위치 당시 용정은 북간도 지역 한인사회의 중심도시로, 문화의 중심으로 발전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여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우선 토지가 비옥하고 물 맑은 주거환경이 이곳에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형성하고 도시로 발 전할 수 있는 기본적인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1870년대까지만 하여도 용정은 황량한 무인지대 1) 용정은 북위 42˚46′부터 42˚48′까지, 동경 129˚24′부터 129˚26′ 사이에 위치해 있다. 도시 구역을 육도하와 해란 강이 흘러 지나고 모아산 ・ 말안장산 ・ 비암산과 대포산이 주위를 병풍처럼 감싸 안으며 말발굽 모양의 분지를 이루고 있다. 총면적은 36.8㎢이고 도시면적은 6.28㎢이다(룡정현 인민정부, 『룡정현 지명지』(내부재료), 1985, 22쪽). 2) 전광하 편저, 『세월속의 룡정』, 연변인민출판사, 2000, 1쪽. 1920년대 북간도 용정에서 전개된 중학교 설립운동 101 였다. 17세기 중반부터 200여 년 동안 실시된 청나라의 봉금령으로 해란강과 육도하가 흘러 지 나가는 양안에는 버들과 갈대가 꽉 들어찼다3). 이로 말미암아 이곳에는 인적이 완전히 차단되었 다. 그리고 200여 년이라는 세월은 이곳을 농사에 적합한 비옥한 땅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시간 이었다.4) 익히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러시아가 ‘애훈조약’(1858)과 ‘북경조약’(1860)을 통하여 청나라로부 터 흑룡강 이북과 우수리강 이동의 100만㎢에 달하는 광활한 지역을 강탈하였다. 청나라는 러시 아의 침략에 직면하여 만주지역에서 하는 수 없이 기존의 봉금령을 포기하고 ‘이민실변(移民實 邊)’정책을 실시하게 되었다.5) 이 시기 용정을 청나라에서는 육도구라 불렀다. 육도구에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인 1877년 봄이었다.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넌 평안북도 출신 김언삼(金彦三), 함경북도 출신 장인석(張仁碩)과 박윤언(朴允彦) 등이 이끄는 14세대 이주 한인들이 그 주인공이었다. 그들이 이곳에서 화전 농사를 시작한 첫해부터 대 풍작을 거두었다. 비옥한 땅이 이주한인들에게 안겨준 소중하고 값진 선물이었다. 살길을 찾아 떠난 이주한인들에 게 먹는 문제 해결에 우선하는 사안은 없었다고 하겠다. 농사에 적합한 비옥한 땅은 이주한인들 이 이곳에 정착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주거환경을 마련해 준 셈이었다. 다음으로 용정의 자연 기후 조건이다. 용정은 중온대 대륙성 기후로서 일 년 사계절 차이가 뚜 렷하다. 봄이면 바람이 세차고 건조하고 온도 차이가 크다. 여름이면 따뜻하고 더우며 강수량이 집중된 계절로서 동남풍과 남풍이 많이 분다. 가을이면 하늘이 맑고 서늘하며 안개가 많이 끼고 온도차이가 크다. 겨울이면 춥고 눈이 좀 적게 내리며 서북풍이 많이 분다. 전년의 평균 온도는 섭씨 5도 좌우이며 1년 사이에 제일 높은 온도는 섭씨 36.5도이고 제일 낮은 기온은 섭씨 영하 34.8도이다. 전년의 평균 일조량은 2천 5백 52.3시간이다. 무상기는 135일 좌우이다. 전년의 평 균 강수량은 500-600미리이다.6) 이러한 용정의 자연 기후 조건은 이주한인들이 이곳에 발을 붙 이고 농사를 짓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여름의 높은 기온, 집중된 강우량, 곡식 성장에 충분한 무상기 등이 바로 그러하였다. 따라서 웬만한 농사 솜씨라도 풍성한 수확을 기대할 수 있었다.7) 3) 연변력사학회 편, 「용두레촌」, 『용두레촌』, 연변인민출판사, 1988, 193쪽. 4) 한반도의 비극의 땅 DMZ가 60여 년이 지난 오늘 생태계가 복원되는 모습을 확인하면서 200여 년이란 봉금시기 라면 만주지역의 생태계 보존과 땅의 비옥도에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을가 가히 상상할 수 있으리라. 5) 金春善, 『延邊地區朝鮮族社會的形成硏究』, 길림인민출판사, 2001, 59∼68쪽. 6) 전광하 편저, 「룡정의 자연개황과 연혁」, 『세월속의 룡정』, 연변인민출판사, 2000, 2쪽. 7) 북간도의 이러한 사정에 대하여 안수길은 대하소설 『북간도』에서 아래같이 묘사하고 있다. “조 ・ 청 양국 민족이 이 지역에는 얼씬도 할 수 없었다. 가위 무인지경이었다. 그 동안이 2백여 년. 나무가 자랄 대로 자라고, 그 잎 이 떨어져 쌓였다가는 썩고, 썩은 나뭇잎이 땅속에 파묻히고……이러기를 2백년을 되풀이하였으니 지력은 조금도 102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그리고 청나라에서 실시한 200여 년의 봉금령은 봉금지대에서 인적을 완전히 끊어 놓았고, 울 창한 수림과 두터운 초지가 해란강과 육도하의 물을 정화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땅이 비옥하고 흐르는 물 또한 맑아 농사가 잘 된다는 소문이 조선에서 파다하게 퍼지면서 수많은 이주한인들 을 용정으로 끌어당기는 효과를 가져왔다.8) 1886년 육도하 기슭에서 이주한인들은 황무지를 개 간하다가 우연하게 옛 우물을 발견하였다.9) 물을 긷는데 편리하게 우물옆에 나무틀을 세우고 두 레박을 달았다. 한인들을 이를 「용드레우물」이라 불렀다. 용드레우물이 생겨나면서 육도구를 「용 정촌」이라 불렀다. 용드레우물은 이 지역에 마을을 형성하고 나중에 도시로 거듭날 수 있는 음료 수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끝으로 용정은 지리적으로 보면 북간도지역 한인사회의 중심 위치에 있었다. 북간도 지역에서 도 이주한인들이 인구구성에서 절대적인 우세를 점하고 있던 화룡현과 연길현으로 한정하였을 경우 더욱 그러하였다. 용정은 이주한인들이 회령에서 두만강을 건너 계사처-오랑캐령-대랍자명동-용정에 이르고, 다시 화룡현이나 연길현으로 이주하는데 반드시 거치 가는 길목에 자리 잡 고 있었다. 다시 범위를 좁혀 북간도지역 중국지방당국의 행정중심인 국자가(局子街), 화룡현의 소재지인 대랍자(大拉子), 한인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던 두도구(頭道溝)를 일직선으로 연결 하였을 경우, 용정은 바로 그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가 1907년 8월 23일 ‘통감부간도임시파출소’를 용정에 설치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고 하겠다.10) 일제는 용정을 중심으로 파출소의 행정력을 북간도 지역 전역으로 확장하고, 중국 지방당국의 행정 중심지인 국가자와 화룡현 정부 소재지인 대랍자 사이의 연결을 효과적으로 차 단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렸다고 하겠다. 소모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는 땅이었다. 어찌 기름진 옥토가 아닐 수 있을 것인가? 쟁기나 보습, 괭 이로 파 뒤집으면 시커먼 흙이 농부의 목구멍에 침이 꿀컥 하고 삼켜지게 했다. 씨를 뿌리기만 하면 곡초가 저 절로 쑥쑥 소리라도 들릴 듯이 자라 올라갔다. 거름이 필요 있을 까닭이 없었다. 한두 번 기음만 매어 주면 다듬 잇방망이만큼 탐스러운 조 이삭이 머리를 수그렸다. 옥수수 한 자루가 왜무우같이 컸다. 감자가 물씬 한 흙 속에 서 사탕 무우처럼 마음 놓고 살이 쩠다. 수수, 콩……”(안수길, 『북간도』상, 삼중당, 1983, 12쪽). 8) 전광하 편저, 「룡정의 자연개황과 연혁」, 『세월속의 룡정』, 5쪽. 9) 전광하 편저, 「룡정 지명 기원지 우물」, 『세월속의 룡정』, 9쪽. 10) 1907년 4월 18일부터 29일까지 사이토 중좌 등 4명은 통감부파출소를 설립하기 위하여 상인으로 가장하고 북 간도지역에 대한 사전답사를 진행하였다. 그들이 조선통감 이토히로부미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파출소의 위치 와 관련하여 “한인보호에 종사하는 관아의 명칭을 통감부파출소로 하고, 그 위치는 대략 간도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南崗의 서부쪽인 馬鞍山의 남쪽 평지 안에서 구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지점을 최종적으로 용정으 로 확정하였다.(시노다 지사쿠 저, 신영길 역, 『간도는 조선땅이다』, 지선당, 2005, 286∼287쪽) 1920년대 북간도 용정에서 전개된 중학교 설립운동 103 Ⅲ. 용정의 사회시설 용정에 구축된 여러 가지 사회적인 시설은 이 곳을 북간도지역 한인사회의 중심으로 거듭날 수 있는 튼튼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익히 알고 있듯이 북간도지역 한인사회의 근대교육 시원은 용정에서 시작되었다. 1906년 이상 설(李相卨))11) 등이 설립한 서전서숙이 바로 그것이다. 서전서숙은 단순히 신학문의 전수에만 그 치지 않고, 학생들의 애국애족의 정신을 함양하고, 국권회복을 위한 인재양성이란 건학이념을 가 지고 있었다.12) 아쉽게도 서전서숙은 이상설이 헤이그 밀사로 파견되고, ‘통감부간도임시파출소’ 가 설립되면서 8개월 만에 문을 닫았다. 하지만 서전서숙의 교원과 학생들이 북간도를 비롯한 남 북 만주 여러 지방에서 사립학교 설립운동을 전개하면서 모교의 전통을 이어갔다. 예컨대 이상설 과 함께 서전서숙의 설립과 운영에 참여하였던 이동녕(李東寧)과 여조현(呂租鉉-呂準)은 명동학 교 및 서간도 지방의 대표적 민족주의 교육기관이었던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와 그 후신인 신흥 중학(新興中學)에서 교원으로 활약하였다.13) 서전서숙 갑반 출신이었던 남세극(南世極)은 나철(羅 喆) ․ 서일(徐一) ․ 박상환(朴商煥) 등 여러 사람들과 함께 화룡현 삼도구(三道溝) 청파호(靑波湖) 에 대종교 북도 본사(北道 本司)와 하동(河東)에 남도 본사(南道 本司)를 세워 종교활동에 종사하 는 한편 풍낙동(風樂洞)과 청파호 등지에 실업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에 힘썼다.14) 또한 을반 의 (김약연(金學淵)은 명동촌으로 돌아와 김약연(金躍淵)15) 등에게 새로운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 11) 이상설은 충청북도 진천군 던산면 산척리 산직마을에서 1870년 음력 12월 7일 선비 李行雨와 벽진 이씨의 장 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고 호는 보재이다. 어려서부터 신동소리를 듣던 이상설은 늘 학우들과 新興寺 에 합숙하면서 한문 ・ 수학 ・ 영어 ・ 법률 등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1894년 이상설은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인 갑 오 문과 병과에 급제하면서 관계에 진출하였다. 1895년 4월 7일 秘書監의 左秘書院郞에 제수되는 것을 시작으 로, 성균관 교수 겸 관장, 한성사범학교 교관, 궁내부 특진관, 의정관, 학부협판, 법부협판 등을 거쳐 1905년 1 1월에는 의정부 참찬에 취임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상설은 모든 관직을 사직하고, 자택에 은 거함녀서 늘 이회영, 이동녕, 유완무, 장유순, 이시영 등과 만나 구국운동의 새로운 방략을 연구하였다. 결과 당시 해외에서 한인들이 제일 많이 살고 있는 북간도지역 용정에 독립운동기지를 설립하기 하고 이를 위해 우 선 서전서숙을 창설하였다(김춘선, 「서전서숙 창시자 보재 리상설」, 룡정3.13기념사업회 ・ 연변력사학회 편, 『력 사의 종소리』, 연변인민출판사, 2006, 259∼264. 12) 朴州信, 『間島韓人의 民族敎育運動史』, 아세아문화사, 2000, 279쪽. 13) 金秋, 「朝鮮獨立運動活動家 李東寧」, 吉林省通化市政協文史資料委員會 編, 『朝鮮獨立軍在中國東北活動史略』, 1993, 108쪽; 朴煊, 『滿洲韓人民族運動史硏究』, 일조각, 1991, 326쪽; 329쪽. 14) 尹炳奭, 「北間島의 民族學校들」, 한국일보사 편, 『再發掘 한국獨立運動史』, 한국일보사출판국; 1987, 87쪽. 15) 김약연은 1868년 9월 12일 함경북도 회령군 동촌 옹희면 제1리 行營에서 金錫祚와 강씨의 4남 1녀 가운데 장 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龍九이고 호는 圭巖이다. 규암은 8세 때부터 한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吳三烈 ・ 朱鳳儀 ・ 104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하였다. 이에 공감한 김약연 등은 1908년 4월 27에 명동서숙을 설립하였다.16)그 외에도 시베리 아 블라디보스토크의 한민학교, 북만주 밀산부에 위치한 한흥동에 설립한 한민학교 등은 모두 서 전서숙의 교육정신을 이어나간 교육기관이라 할 수 있다.17) 이와 같이 용정은 북간도는 물론이 고 남북 만주 한인사회 근대교육의 산실 같은 역할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한국민족운동세력이 1910년대 ‘독립전쟁론’의 기치아래 해외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추진 하였던 한국독립운동기지건설과 독립군 양성운동18)에서 용정은 그 대상 지역이 될 수 없었다. 용정에 한인사회가 발달되었다는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일제의 침략 기구와 중국지방당국의 행정기구가 밀집하여 있었기 때문에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기본적 인 여건이 원천 봉쇄되었다고 하겠다. 따라서 민족운동세력은 화룡현 대랍자(명동학교), 후저동 (정동학교), 연길현 와룡동(창동학교), 소영자(광성학교), 왕청현 나자구(사관학교) 등지에서 사립 학교와 무관학교 교육을 통하여 한인사회의 반일운동 역량을 키워 나갔다.19) 그리고 이러한 반 일교육운동의 성과는 상기 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1919년 북간도지역 만세시위운동의 주역을 담당하면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북간도지역에서 1910년대에 쌓아올린 한민족의 반일의지를 세계만방과 일제에게 과시하는데 용정만큼 파급 효과가 좋은 지역은 따로 찾기 힘들다. 북간도 지역에 대한 침략을 총괄하던 간도 南宗九 등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오삼열은 규암의 학구열을 관찰하고 三判이라고 명명하였다. 맹자를 완독했다고 해서 孟判, 예절을 잘 지킨다고 해서 禮判, 사리판단이 정확하다고 해서 正判이라고 부른 것이다. 1899년 2월 18일, 김약연은 金河奎 ・ 文秉奎 ・ 南宗九 등과 함께 상기 4대 가문, 모두 25세대, 안내자 및 통역 관 1명을 포함 모두 142명에 달하는 대규모 집단이민을 단행하였다. 이들은 함경북도 종성군 상삼봉을 출발하 여 용정 개산툰의 자동과 회경가, 용정시 팔도하자향 등을 거쳐 화룡현 불굴라재라는 곳에 정착하였다. 이들 4 대 가문은 공동으로 천일경에 달하는 땅을 구입하였고, 그 가운데 10일경은 공동부담인 學田으로 남겼다. 학전 이란 공부에 필요한 자금을 충당하기 위한 땅이었다. 그만큼 이들은 이주 당시부터 학문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1901년 4월 김약연은 용암촌에 규암재 서재, 김하규는 대룡동에 소암재 서재, 남위언은 상 ・ 중영촌에 오룡재 서재를 각각 열어 제자 교육을 시작하였다. 1906년 8월 이상설이 용정에 서전서숙을 개설하자, 김약연 은 사촌동생 김학연과 남위언을 보내 서전서숙에서 신식교육을 받도록 하였다. 1908년 4월 27일 김약연은 상 기 3개 서재들을 집중하여 명동서숙을 설립하였다(서대숙, 『간도 민족독립운동의 지도자 김약연』, 역사공간, 20 08, 20∼29쪽; 210∼211쪽); 남종구는 “규암은 맹자에 통달했으니 孟板 이요, 예절이 각별하니 禮板이요, 한번 보기만 해도 척척 기억하니 皮板이요, 처사가 견실하니 鐵板”이라고 평했다(문영금 문영미, 『기린갑이와 고만녜 의 꿈 - 문재린 김신묵 회고록』, 삼인, 2006, 53∼54쪽). 16) 문영금 문영미,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 - 문재린 김신묵 회고록』, 삼인, 2006, 43쪽. 17) 朴州信, 『間島韓人의 民族敎育運動史』, 279∼280쪽. 18) 서중석,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 역사비평사, 2001, 20∼21쪽. 19) 朴文一, 「1906-1919年間中國東北朝鮮族人民的私立學校敎育運動及其歷史作用」, 『朝鮮族硏究論叢』3, 延邊大學 民族硏究所, 연변인민출판사, 1991, 6∼10쪽. 1920년대 북간도 용정에서 전개된 중학교 설립운동 105 주재 일본총영사관을 비롯한 일제의 침략기관이 용정에 둥지를 틀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용 정은 1919년 북간도지역 3 ・ 1운동의 진원지가 되고 북간도 한인사회의 중심에 우뚝 서게 되었 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용정은 명실상부하게 북간도 지역 한인사회의 문화 중심지로 그 위 상을 굳혀 가기 시작하였다. 여기에는 다음 장에서 살펴보게 되는 동흥 ・ 대성・ 은진 등 여러 중 학교가 설립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다음으로 용정에 설립된 일제의 침략기구와 중국 지방당국의 행정기구가 이 지역을 근대 도시 로 탈바꿈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였다고 하겠다. 20세기초반부터 시작된 북간도 지역에 대한 일제의 침략은 이곳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이주 한인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일제는 이 주한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대륙침략정책을 추진하였다. 따라서 한인사회가 발달하였던 지역이 자연스럽게 일제의 침략기관들이 들어서는 곳이 되기도 하였다. 1907년 8월 용정에 설립된 ‘통감부간도임시파출소’20)가 그러하였다. 1909년 11월 상기 통감부간도임시파출 소는 간도 주재 일본총영사관으로 탈바꿈 하면서 용정은 일제가 북간도 지역 한인사회를 통제하 는 중심지로 거듭나게 되었다. 물론 일본총영사관도 통감부간도임시파출소와 마찬가지로 이주 한 인의 ‘생명과 재산의 보호자’로 둔갑하여 한인사회를 현혹하고 있었다. 일본총영사관의 이러한 적극적인 ‘보호 자세’는 이주한인들을 용정으로 강력하게 끌어당기는 힘으로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국타향에서 ‘국가적인 보호’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던 이주한인들에게 ‘생명과 재산’ 을 보호해 주겠다고 하는 일제의 감언이설은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으로 다가왔다고 하겠다. 1911년 5월 9일 용정에서 발생한 대화재는21) 용정촌 가옥 70% 정도를 소각시키면서 엄청난 피해를 발생시켰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시가지를 새롭게 기획하고 정비할 수 있는 계기가 되 기도 하였다. 일제는 이번 대화재를 계기로 간도 주재 일본총영사관 산하에 ‘용정촌구제회’22)를 설립하고, 1918년에는 그것을 다시 ‘간도구제회’로 개편하면서 북간도 지역에 대한 경제침략에 박차를 가하였다. 여기에 1917년 3월에는 조선은행 간도출장소가 용정에 설립되면서23) 명실상부 하게 일제가 경제적으로 북간도지역을 잠식하여 나가는 중심지가 되었다. 용정촌구제회나 간도구 제회는 부동산을 담보로 거액의 이익을 챙겨 이주 한인들에게 큰 피해를 준 측면이 있었지만24), 20) 시노다 지사쿠 저, 신영길 역, 『간도는 조선땅이다』, 지선당, 2005, 307∼309쪽. 21) 이번 화재로 한인 가옥 140채, 일본인 가옥 40여 채, 중국인 가옥 20채, 인명피해는 한인 사상자가 2명을 넘었 다( 外務省警察史, 『間島地域韓國民族鬪爭史』1, 고려서림 영인본, 1989, 321쪽). 22) 朝鮮總督府 內訓 第1號, 「在間島朝鮮總督府書記官又ハ朝鮮總督府事務官事務取扱方」, 『日本外務省 特殊調査文 書』11, 고려서림 영인본, 1989, 370쪽. 23) 김주용, 『일제의 간도 경제침략과 한인사회』, 선인, 2008, 208∼209쪽. 24) 김태국, 『만주지역 ‘조선인 민회’ 연구』, 국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1, 78∼79쪽. 106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개인의 고리대에 비하면 이자 부담이 적었던 대출 조건은25) 이주한인들에게 또 다른 유혹으로 다가와 한인들의 용정 이주를 부추기는 측면이 있었다고 하겠다. 1909년 ‘간도협약’ 체결 후, 중국 지방당국은 용정에 일본총영사관에 대응하는 행정기구를 설 립하여 일제의 침략에 맞서고자 하였다. 상부분국(商埠分局)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해관서(海 關署) ・ 심판청 분정(審判廳 分庭) ・ 세연징수분국(稅捐徵收分局) ・ 우편국(郵便局) ・ 관립고등소학교 (官立高等小學校)26)를 설립하여 중국의 행정력을 효과적으로 행사하고자 하였다. 도시사적인 측 면에서 보면, 중국 지방당국의 이러한 사회시설의 설립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즉 용정 으로 하여금 당시 북간도지역의 행정중심인 국자가에 필적하는 중요한 위상을 지니도록 하였다. 위에서 살펴 본 여러 가지 여건에 힘입어 수많은 이주 한인들이 용정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잡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1877년 14세대 이주한인으로 출발한 용정의 인구는 1907년 8월에는 108호 444명(그 가운데 한인이 96호 393명), 1917년 6월에는 834호 3,677명(그 가운데 한인은 526호 2,688명)27)으로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다. 이주 한인은 같은 시기 용정 총 인구의 88%와 73%를 차지하면서 용정의 주체 민족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반대로 같은 시기 중국지방당국 의 행정중심지이었던 국자가에서는 중국인이 절대적인 우세를 차지하고 있었다.28) 이와 같이 이 시기 용정에서 발달한 한인사회와 여러 가지 사회적인 시설은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종교계가 이곳에서 중학교 설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25) 익히 알고 있듯이 대부분의 한인들이 경제적인 원인으로 고향을 등지고 만주 이주를 선택하였다. 그러므로 이 주 목적지에 도착하면 얼마 안 되는 이주자금이 바닥나고 고리대 업자의 횡포에 노출되는 경우가 많았다. 일제 의 경제기관은 바로 이런 틈새를 이용하여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개인 고리대에 비하여 훨씬 낮은 이자로 이주 한인들을 유혹하였다. 26) 東洋拓殖株式會社, 『間島事情』, 東洋拓殖株式會社京城支店, 日韓印刷所, 1918, 154쪽. 27) 東洋拓殖株式會社, 『間島事情』, 1918, 155쪽. 28) 1917년 6월 조사에 의하면 국자가에 거주하는 중국인이 1,045호 4,137명, 한인이 111호 413명으로, 중국인들 이 도시 인구 구성에서 절대적인 우세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東洋拓拓株式會社, 『間島事情』, 1918, 1 50쪽). 1920년대 북간도 용정에서 전개된 중학교 설립운동 107 Ⅳ. 종교계의 중학교 설립운동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용정은 북간도 지역 한인사회 문화 교육의 중심지로 급속하게 부상하 고 있었다. 여기에는 종교계가 앞 다투어 추진한 중학교 설립운동과 무관하지 않았다. 중학교 설 립운동에서 비롯된 여러 가지 시너지 효과가 용정이 북간도지역 문화 교육의 중심지로 거듭나는 데 강력한 동력을 부여하고 있었다. 1920년대 초반부터 북간도지역 한인 사회는 한민족의 반일독립운동과 일제의 가혹한 무력 탄 압이라는 이중 구도 속에서 중학교 설립운동을 통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었다. 이런 변화 를 종교계가 주도하고 있었다. 종교계의 활발한 움직임은 이 시기 북간도지역 한인사회에서 나타 난 심각한 지각변화와 무관하지 않았다. 1920년 10월의 청산리독립전쟁과 그 뒤를 이어 일제가 북간도지역 한인사회에 대하여 자행하 였던 ‘경신참변’이 바로 그러하였다.29) 일본군의 강력한 무력탄압작전에 북간도지역 반일무장세 력들은 하는 수 없이 그 활동 무대를 북만지역 밀산과 소련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일 본군의 추격을 따돌리며 2,000리를 북상하여 밀산에서 대한독립군단30)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대 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의 작전구도에 따라 러시아에 진군하여 볼셰비키 혁명 에 참가하며 시베리아에 진주하고 있는 일본군과 일대 결전을 모색하고자 하였다.31) 한편 일제는 북간도지역에 침입한 일본 정규군의 무력을 배경으로 ‘경신년 대참변’32)이라고 하 는 잔인무도한 참극을 자행하는 한편, 일본영사관을 앞장세워 한인사회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 여 나갔다. 불과 4일동안에 북간도 10개 곳에 일본영사관 산하 경찰기관33)과 곧바로 동일한 지 29) 조동걸, 「1920년 간도참변의 실상」, 『역사비평』47, 1998년 겨울호, 51∼57쪽. 30) 밀산에서 설립된 대한독립군단은 3개 대대로 구성된 한 여단을 두었다. 총병력이 3,500여 명에 달하였다. 임원 은 대한군정서의 지도자였던 徐一을 총재로 하고 부총재에 청산리대첩의 명장인 洪範圖와 金佐鎭 ・ 曺成煥, 총 사령에 金奎植, 참모총장에 李章寧을 추대하였다. 여단장에 서로군정서의 사령관이던 池靑天을 비롯하여 중대 장에 金昌煥 ・ 趙東植 ・ 尹擎天 ・ 吳光善을 선임하여 독립군을 지휘케 하였다(한국독립유공자협회, 『中國東北지역 韓國獨立運動史』, 집문당, 1997,172쪽). 31) 조동걸, 「만주에서 전개된 한국 독립운동의 의의」, 『한국근현대사의 이상과 형상』, 푸른역사, 2001, 362쪽. 32) ‘경신년 대참변’에서는 일본군은 독립운동가는 물론이고 무고한 한인들까지 무자비하게 살육했다. 칼로 난도질 하거나 불속에 던지거나 창으로 찌르거나 목을 자르거나, 심지어는 독가스로 학살하는 등 만행을 자행하였다. 그 과정에서 가족 전체가 희생된 경우가 많았고 집도 불태워져 화장당하는 참경을 연출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 (조동걸, 「1920년 간도참변의 실상」, 『역사비평사』45, 1998, 47쪽. 33) 이 시기 4일 동안 일본영사관 산하 경찰기구가 동시다발적으로 급조되는 지역을 보면, 大拉子 ・ 銅佛寺 ・ 傑滿洞 ・ 二道溝 ・ 釜洞 ・ 依蘭溝 ・ 嘎呀河 ・ 凉水泉子 ・ 琿春 頭道溝 ・ 黑頂子 등 이다. 이러한 상황은 일본군의 불법 점 거라는 배경에서만 설명이 가능하다(김태국, 『만주지역 ‘조선인 민회’ 연구』, 국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6 108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역에서 한인사회를 통제할 조선인민회를 신속하게 설립하였다. 일제는 4,603명에 달하는 한인들 에게 면죄증(免罪證)과 서약서(誓約書)를 발급하면서 조선인민회 가입을 강요하였다. 일제의 무단 적인 강압속에서 한인 마을 전체가 조선인민회에 가입하는 사례가 속출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1922년 2월 현재 북간도 지역 18개 곳에 설립된 조선인민회에 가입한 호수만 하여도 대체로 5 만여 호에 달하였다.34) 참고로 1922년 3월말 현재 만주지역에 거주하는 한인이 103,568호, 651,096명이고, 그 가운데 북간도를 포함한 길림성에 거주하는 한인이 72,897호, 490,020명35)이 라는 통계 숫자를 감안하면, 북간도지역 조선인민회가 설립된 18개 곳에서는 수많은 한인들이 상 기 조직에 가입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조선인민회의 가입 ‘실적’은 일제의 무단적인 폭압36)속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낀 한인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북간도 지역에 대한 일제의 통제가 유례없이 강화되는 속에서 반일운동세 력을 대신하여 한인사회를 이끌어 가고자 하는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였다. 바로 오래전부터 한인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종교 조직들이었다. 이는 일제가 종교조직을 무단적으로 탄압할 수 없었던 정책과 무관하지 않았다고 하겠다. 특히 천주교나 기독교의 경우 각기 프랑스와 영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제의 단속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다른 측면에서 종교조직은 이미 한인사회의 형성과 더불어 북간도지역에서 튼튼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민족운동세력은 이러한 종교조직을 이용한 반일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1897년 가을 김영렬(金英烈) 등이 화룡현 지신향 삼원봉(三元峰) ․ 하교동(賀敎洞) ․ 대교동(大敎 洞) ․ 대불동(大佛洞)과 용정에서 전도 활동을 시작하면서 북간도지역 천주교의 시원을 열었다.37) 천주교 신자들을 주축으로 설립된 북간도 지역의 주요한 반일운동단체로 의민단 등이 있었다. 북 간도 지역 천주교의 본거지였던 팔도구 천주교회 회장 김종담(金宗淡)은38) 의민단 제3지방회 제 0∼61쪽). 34) 일제의 조사에는 조선인민회 가입 호수가 72,220호로 되어 있다. 그러나 통계숫자에 오기가 있을 것으로 보인 다. 이와 관련하여 二道溝의 가입호수가 20,796호로 되어 있는데 오차가 여기서 생긴 것 같다. 화룡현에서 한 인들이 제일 많이 거주하였던 두도구의 조선인민회의 가입 호수가 5,614호였던 점을 감안하면 이도구는 20,79 6호가 아닌 2,796호가 아닐가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조선인민회 가입 호수가 54,000여 호가 된다(국가보훈처 소장, 「不逞團體關係雜件 朝鮮人ノ部 在滿洲ノ部」32, 親日團體調査表,『獨立運動史料-日本篇』7, 1922.1, 139 ∼146쪽). ∼ 35) 太田庄之助, 「滿洲に於ける鮮人」, 大正14海外旅行調査報告 (神戶高等商業學校), 188 189쪽. 36) ‘경신년 대참변’에서 북간도지역 한인사회의 희생을 보면, 한국측 기록에서는 1920년 10월 9일부터 11월 30일 까지 모두 3,469명이 학살되었다고 주장하고(1920년 12월 18일, 「임시정부 간도통신원의 確報」, 姜德相 編, 『現代史資料』28, みすず書房, 1977, 631∼634쪽), 일본군 제19사단 사령부가 1921년 2월 25일에 작성한 조사 표에서 모두 522명을 사살하였다고 자백하고 있다(강덕산 편, 『現代史資料』28, 520∼543쪽). 37) 김광희, 「연변천주교의 연혁과 오늘의 상황」,『연변문사자료』8, 연변정협문사자료위원회, 1997, 3쪽. 1920년대 북간도 용정에서 전개된 중학교 설립운동 109 1지회장(상의향 팔도구 매화동)39)으로 활약하였다. 의민단은 1920년 4-5월경 연길현 숭례향 묘 구에서 조직되어 동년 8월 현재 병력이 300명, 군비는 군총 400정, 탄약 40,000발, 권총 50정, 수류탄 480개를 보유한 단체로 성장하였다.40) 북간도지역에서 기독교 포교활동은 1903년 훈춘에서 시작되어 1906년 용정에 교회가 세워진 후 교세가 급속히 확장되었다. 1921년에 이르러 교회가 63개, 신도는 6,442명에 달하였다. 기독 교의 교세가 북간도지역에서 급속히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한민족의 독립운동에 대한 그들 의 지지와 성원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북간도에서 활약하였던 캐나다 선교부의 크리슨・ 바클 ・ 포드・ 스코트 ・ 마딩 등이 그러하였다.41) 1919년 3 ・ 1운동을 통하여 설립된 북간도 지역 최대의 반일운동 단체인 간도국민회는 기독교 교도가 주축이 되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구춘선(具春善-회장) ・ 서상용(徐相庸-부회장) ・ 마 진(馬晋-남부지방총회 회장) ・ 양도헌(梁道憲-동부지방총회 회장 ・ 군무총장) ・ 김강(金剛-경호부장) ・ 유찬희(柳讚熙-재무부장) ・ 김정(金精-서기) 등이 그러하였다.42) 1909년 나철(羅哲)43)에 의하여 설립된 단군교는 1914년에 총본산을 화룡현 청파호에 옮기고 중국 ・ 한국・ 러시아 연해주 등지의 한인을 상대로 전도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단군교는 일제의 탄압으로 교명을 대종교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대종교는 강력한 민족주의를 앞장세워 교 세를 신속하게 확장하여 나갔다. 1917년에 6개 교구, 30만 교도를 거느리는 종교 단체로 발전하 였다.44) 청산리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북로군정서가 바로 대종교 교도를 중심으로 조직된 독립군단이었다. 북로군정서 총재부의 주요간부 가운데 서일(徐一-총재) ・ 현천묵(玄天黙-부총재) ・ 김성(金星- 총재부 비서장) ・ 계화(桂和-재무부장) ・ 정신(鄭信-인사국장) ・ 이홍래(李鴻來-모연국 38) 김광희, 「연변천주교의 연혁과 오늘의 상황」, 『연변문사자료』8, 7쪽. 39) 국가보훈처 편, 『北間島지역 獨立軍團名簿』, 1997, 277쪽. 40) 윤병석, 「해제」, 『北間島지역 獨立軍團名簿』, 국가보훈처, 1997, 17쪽. 41) 한생철, 「‘영국더기’--룡정기독교장로파교회 시말」, 『연변문사자료』8, 117∼121쪽. 42) 박환, 『만주한인민족운동사연구』, 일조각, 1991, 72쪽. 43) 弘巖 나철은 1863년 전라남도 낙안군 남상면 금곡(지금의 전남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이라는 마을에서 羅 龍集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을 寅永이라 하였고 호는 經田이다. 단군을 알고 대종교를 창시한 뒤 호를 홍암이라 하였다. 나인영은 1891년 12월 12에 과거에 합격하였으며, 그 해 12월 25일에 승정원 假注書가 되었 다. 1893년에 모든 벼슬을 마다하고 고향으로 낙향하였다. 1904년까지 10년간 제석산을 오르내리면서 입산 수 도 생활을 하였다. 1908년 단군을 알게 되었다. 1909년 초에 단군교를 중광하였다. 1916년 8월 15일 나철은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 올라가서 측근에게는 아무 말도 없이 유언만 남기고 자결 순국하였다. 나철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나라를 잃고 조상을 잃은 민족의 울분을 죽음으로서 대신하고자 하였다(박성수,『독립운동의 아버지 --나철』, 북캠프, 2003, 17∼29쪽). 44) 조원섭, 「항일투쟁과 민족교육에서의 대종교의 역할」, 『연변문사자료』8, 102쪽. 110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장) 등과 사령부의 주요간부 가운데 김좌진(金佐鎭-총사령관) ・ 이장녕(李章寧-참모장) ・ 나중소(羅 仲昭-참모부장) ・ 이범석(李範奭-연성대장) ・ 오상세(吳祥世-제4중대장) 45)등이 그러하였다. 이주 민족으로서 이국 타향에서 민족공동체를 만들어 가는데 종교만큼 막강한 힘을 가진 조직 은 없다고 하겠다. 공동 신앙생활이 만들어 내는 힘이 바로 그것이다. 종교가 민족사회에 뿌리를 내리는데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교육을 통한 민족사회의 접근이라 하 겠다. 북간도지역 종교 조직도 예외가 아니었다. 설립 초기부터 학교 교육을 통한 교세 확장에 주력하고 있었다. 1917년 12월 현재 북간도지역에서 한인들이 운영하였던 사립학교를 보면 일반 민중이 설립한 학교가 55교이고, 종교 계통에서 설립한 학교는 26교(기독교 15교, 천주교 5교, 대종교 6교, 천도교 1교)로46), 종교계통은 일반 민중, 반일운동세력과 더불어 한인사회의 교육을 이끌어 가는 중요한 한 축으로 그 역할을 충실하게 담당하였다. 종교계통은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북간도지역에서 반일운동세력이 비운 자리를 신속하게 메 워 나갔다. 그것은 이미 1910년부터 반일독립운동이란 공동한 장을 통하여 반일운동세력과 형성 한 긴밀한 공조관계를 바탕으로 가능하였다고 하겠다. 종교 조직의 최고 목적은 자파 교의의 전 파와 교세의 확장을 통한 이상세계의 구현이라 하겠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 바로 지역사회 민중의 수요와 욕구를 최대한 만족시키면서 그들에게 접근하는데 있다고 하겠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종교계통은 중학교를 설립하는 방법으로 한인사회에 접근하고자 하였다. 중등교육을 실현하는 것은 북간도지역 한인사회의 숙원 사업이기도 하였다. 1910년대 북간도 지역 한인 교육기관에서 중등교육을 실시한 것은 소학교에 중학부를 부설하 는 방법으로 진행하였다. 명동학교, 광성학교, 정동학교, 창동학교가 모두 그런 형식을 취하고 있 었다. 그러나 이런 형식으로 중등교육을 실시하는데 한계가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교원 ・ 학생・ 교사(校舍) ・ 교과내용 등 면에서 정규적인 중등교육의 요구를 만족시킬 없었다고 하겠다. 1919년 3 ・ 1운동은 북간도지역 한인사회에 풍성한 역사적인 유산을 남겨놓았다. 우선 교육의 무궁한 잠재력을 피부로 느끼도록 하였다. 북간도 지역 3 ・ 1운동에서 중견 역할을 발휘한 것은 1910년대 한인사회 교육운동에 투신하였던 민족운동자들이었고, 만세운동의 앞장에 섰던 이들이 바로 1910년대의 여러 사립학교에서 길러낸 청년학생들이었다. 명동학교와 정동학교 학생들로 조직된 충렬대가 그러하였다.47) 다음으로 3 ・ 1운동을 통하여 청년학생들이 민족운동에서 발휘하 45) 박환, 『만주한인민족운동사연구』, 101∼104쪽. 46) 東洋拓植株式會社 編, 「間島私立朝鮮人學校表」, 『間島事情』, 1918, 835-845쪽. 47) 안장원, 「룡정3 ・ 13반일운동에 대하여」, 『룡정3 ・ 13반일운동 80돐기념문집』, 룡정3 ・ 13기념사업회 외, 연변인 1920년대 북간도 용정에서 전개된 중학교 설립운동 111 는 선도 역할과 역동성을 현장에서 확인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이러한 소중한 경험은 북간 도 지역 한인사회로 하여금 보다 높은 차원의 중등교육에 민족의 희망을 걸도록 하였다.48) 그리고 1910년대 사립학교 설립운동을 통하여 구축한 초등교육 인프라는 중학교 설립운동을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고 하겠다. 종교계통은 바로 이러한 한인사회의 요구에 부응하 여 용정에서 중학교 설립운동에 박차를 가 하였다. 그것은 위에서 살펴 본바와 같이 용정이 한인 중학교를 설립할 수 있는 요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1920년 2월 4일 기독교에서 은진중학교를49), 1921년 7월 11일 대성 유교 공교회에서 대성중 학교를50), 1921년 9월 14일 예수교 장로교 중앙교회에서 영신중학교를51), 1921년 10월 1일 천 도교에서 동흥중학교를52) 설립하였다. 민출판사, 1999, 92쪽. 48) 이러한 한인사회의 열망에 대하여 브란시쓰 ․ 본웨크여사는 “1919년 조선 ‘3 ・ 1’독립운동을 기하여 좀 더 나은 교육을 실시하여야 하겠다는 바람직한 소원과 기대가 높아져 갔다. 새 시대 풍파가 일던 대 도회지를 아득히 떨어진 머나 먼 동만주에도 시대의 보조에 어울리는 이 기운은 밀물마냥 뻗어져만 나갔다”고 하였다.(브란시쓰 ・ 본웨크, 「명신녀학교 략사」, 『연변문사자료』5, 연변정협문사자료위원회, 1988, 212쪽. 49) ‘하느님의 은혜로 진리를 배운다’는 뜻으로 恩眞이라는 교명을 부친 은진중학교는 1913년 버커 등 캐나다 장로 파 교회 선교사들이 용정에 와서 전개하였던 선교활동과 갈라놓을 수 없다. 이들은 예수교 장로파 교회를 세우 고 선교활동을 진행하는 한편, 濟昌병원, 聖經서원, 명신여학교 등을 설립하여 용정지역 한인사회에 뿌리를 내 리고자 하였다. 이러한 선교와 자선사업이 바탕이 되어 마침내 1920년 은진중학교를 설립할 수 있는 기반이 마 련되었다. 개교 초기 은진중학교는 화룡, 연길, 왕청 등 지의 장로파 교회에서는 설립한 소학교 졸업생과 ‘경신 년 대참변’으로 폐교가 된 명동 ・ 정동 ・ 북일 등 학교의 학생들이 모여 들면서 성황을 이루었다. 그리고 소련 연 해주에서도 수많은 학생들이 유학을 왔다. 그리하여 한때는 재학생 수의 무려 10%를 차지하는 상황을 연출하 기도 하였다(한생철, 「26년의 풍운 변화—은진중학교」, 『연변문사자료』제6집, 연변정협문사자료위원회, 1988, 4 5∼47쪽). 50) 대성중학교는 대성유교 공교회에서 전통적인 유학사상을 교육이념으로 하고, 『사서오경』, 『명신보감』 등을 교육 의 기본내용으로 삼고 있었다. 학교 교사 윗층 현관에는 ‘공자위패’를 모셔 놓았고, 매달 초하루 아침에는 전교 교사와 학생들이 공동으로 공자제를 지냈다. 이러한 교육이념 때문에 대성중학교는 중국지방당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고, 연길도윤 陶彬는 ‘사립 대성중학교’라는 현판을 직접 써 주는 호의를 보여주기도 하였다(한생철, 「혁명의 열의로 들끓던 배움터-대성중학교」, 『연변문사자료』제6집, 28∼29쪽). 51) 영신중학교는 廣東書塾이 발전하여 창설된 영신학교를 토대로 예수교 장로파 중앙교회에서 설립하였다. 영신중 학교는 용정에서 전개된 일본인들의 보통학교 교육에 맞서 한인 청소년들에게 항일민족사상을 고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영신중학교는 咸北老會, 용정중앙교회, 유지인사들의 후원으로 개교초기의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여 나갔다(리봉구, 「민족교육의 어려운 길에서-영신중학교」, 『연변문사자료』제6집, 62∼66쪽). 52) 동흥중학교는 북간도지역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였던 대한간도국민회의 사법부장을 역임하였던 천도교인 崔翊 龍에 의하여 창설되었다. 최익룡은 일제의 ‘경신년 대토벌’ 작전을 피하여 잠시 은닉하였다가, 민족의 독립과 문화의 발달, 산업의 진흥에 필요한 인재를 육성하려는 취지에서 동흥중학교에 설립에 뛰어들었다. 최익룡의 활동은 각지 천도교회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당시 용정의 유지들인 金洪善 ・ 李周和 ・ 韓長純 등이 최익룡 112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용정에 상기 중학교들이 설립된 것은 여러 가지 역사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우선 용정을 북간도지역 한인사회의 문화교육의 중심지로 자리매김 하도록 하였다. 북간도 지역은 물론이고, 남북 만주 ・ 러시아 연해주 ・ 조선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상기 중학교에 유학 왔다. 어떤 중학교는 한때 학생이 1,000여 명에 달하고, 용정의 학생 수가 당시 용정 한인 인구의 38.8%까지 차지하 는 대 성황을 이루기도 하였다.53) 이 시기 용정은 명실상부한 북간도지역 한인사회의 문화의 도 시, 교육의 도시로 거듭나고 있었다. 다음으로 북간도 한인사회 교육의 질을 한 차원 끌어 올리는 역할을 하였다. 북간도 지역 한인 사회는 중학교 설립을 통하여 교원・ 학생 ・ 교육내용 등 면에서 명실상부한 전문적인 중등교육체 계를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상기 중학교들은 이 시기 북간도를 비롯한 각 지역에서 배 출한 소학교 졸업생들에게 중등교육의 꿈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소중한 장을 마련하여 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중학교들은 새로운 사상을 접수하고 전파하는 온상으로 거듭났다. 1920년대부 터 북간도에 전파되기 시작한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 ・ 노농혁명 등 새로운 사상과 이념을 연구 하는 모임이 상기 중학교의 교원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생겨나기 시작하였다.54) 상기 연구 모임 의 형성에는 러시아 연해주에서 유학 온 청년학생들의 역할이 컸다. 그들은 연해주에서 러시아 10혁명을 경과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을 받아들인 이가 적지 않았다.55) 이들이 상기 중학 교에서 설립된 독서회, 친목회의 산파 역할을 맡았다. 여기에 합류한 이들이 더 있었다. 한인사 회당 ・ 전러고려공산당 ・ 고려공산당 등 조직에서 파견한 인원들이었다. 임호(林鎬) ・ 김사국(金思 國) ・ 방한민(方漢旻) ・ 박윤서(朴允瑞) ・ 한빈(韓斌) ・ 김강(金剛) ・ 홍수라(洪秀羅) ・ 강진(姜進) ・ 주청 송(朱靑松) ・ 김월송(金月松) ・ 장기영(張基永) ・ 방진성(方振聲) ・ 주건(朱健) ・ 이주화(李周和) ・ 이린 구((李麟球) ・ 김봉익(金鳳翼) ・ 오일근(吳一根) ・ 주채희(朱采熙)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56) 이들 은 은진・ 대성 ・ 동흥 등 중학교 학생들 속에 들어가서 새로운 사상을 전파하였다. 그들은 새로운 사상과 이념을 공부하고 연구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이를 세상을 변혁시키는 유력한 무기로 삼고 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면서 동흥중학교 설립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개교 초기 동흥중학교는 천도교 인 자제들이 위주였고, 소련 연해주, 조선, 남북만 각 지역에서도 많은 청소년들이 유학 왔다(리종흥, 「파란곡 절을 겪어온 길-동흥중학교」, 『연변문사자료』제6집, 2∼3쪽). 53) 연변대학 교육학 심리학 교연실 ・ 연변민족교육연구소 교육사연구실, 『연변조선족교육사』, 연변인민출판사, 198 7, 35쪽. 54) 김동화, 『연변청년운동사』, 연변인민출판사, 1988, 58∼64쪽. 55) 한생철, 「26년의 풍운 변화-은진중학교」, 『연변문사자료』제6집, 47쪽. 56) 朴昌昱, 「馬列主義在東北朝鮮族人民中的傳播」, 延邊大學朝鮮問題硏究所編, 『朝鮮問題硏究叢書』,第二輯, 1984, 77∼80쪽. 1920년대 북간도 용정에서 전개된 중학교 설립운동 113 자 하였다. 따라서 1920년대부터 용정을 중심으로 한 북간도 지역에서 종교와 교육을 분리하는 운동 ・ 청 년운동・ 농민운동・ 노동운동・ 여성운동 등 사회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운동의 중심 에는 늘 상기 중학교의 교원과 학생들이 포진하여 있었다. 이와 같이 그들은 북간도 지역 한인 사회운동을 이끌어 가는 견인차 역할을 충실하게 담당하였다. Ⅴ. 맺음말 20세기 20년대 중국 길림성 용정은 북간도지역 한인사회를 이끌어 가는 문화의 중심지였다. 당시 용정은 북간도 지역 한인사회에서 교육의 중심지, 새로운 사상을 접수하고 전파하는 진원 지, 사회운동의 견인차 등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었다. 그것은 용정에서 구축된 사회 문화 환경과 중학교 설립운동에서 원인을 찾을 볼 수 있다. 우선 지리적으로 용정은 북간도 지역의 중앙부에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이주 한인들이 절대 다 수를 차지고 하고 있던 화룡현과 연길현으로 범위를 좁혀 보았을 경우 더욱 그러하였다. 따라서 용정은 이주한인들이 북간도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가는 중요한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다. 북 방 육진 가운데 하나였던 회령에서 출발하였거나, 삼상봉에서 출발하였을 경우 모두 용정을 경과 하여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다음으로 용정에 뛰어난 주거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 청나라에서 200여 년 동안 실시한 봉금 정책으로 이곳은 인적이 끊긴 무인지대로 방치되었다. 200여 년이란 세월은 이곳을 농사에 적합 한 비옥한 토지로 조성하는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여기에 육도하와 해란강이 있어 도시 조성에 필요한 풍부한 수자원을 공급하였다. 그리고 중온대 대륙성 기후에 속하는 용정은 여름의 높은 기온, 집중된 강우량, 곡식 성숙한 충분한 일조량 등 농사에 적합한 기후조건과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주거환경은 한인들의 용정 이주를 재촉하였다. 한인들은 용정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 면서 용정을 개척하는 주역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용정에 일제의 침략기관과 중국 지방당국의 행정기관이 앞 다투어 설립되면서 근대 도시로 거듭 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1907년 일제가 북간도지역에 대한 침략을 시작하면 서 용정에 ‘통감부간도임시파출소’, ‘간도일본총영사관’ 등 침략기관을 설립하였다. 이것은 위에서 살펴본 용정의 지리적인 위치와 이곳에 발달하였던 한인사회와 무관하지 않았다. 일제는 한인사 회에 대한 ‘보호’를 빙자하여 북간도지역에 대한 침략을 획책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침략에 맞서 114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중국 지방당국도 용정에 상부국(商埠局)을 비롯한 여러 가지 행정기구를 설립하여 맞섰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종교계는 이러한 용정의 사회 문화 환경에 주목하여 이곳에 대성, 은 진, 광명, 영신 등 중학교를 설립하였다. 일제의 ‘경신년 대토벌’로 한민족 독립운동세력이 북간 도지역에서 비운 자리를 종교계가 대신하고 나섰다. 종교계는 중학교 설립 운동을 통하여 북간도 지역 한인사회를 이끌어 가는 명실상부한 주도세력으로 부상하였다. 용정에 설립된 상기 중학교 들은 이 시기 한인사회의 중등 교육에 대한 수요를 만족시키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북간도지역은 물론이고 남북 만주, 한국,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수많은 유학생들이 용정으로 모여들어 청운 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 가운데서도 러시아 연해주에서 유학온 학생들이 새로운 사상을 전파하는 산파 역할을 담당하였다. 여기에 가세한 것이 바로 한인사회당 ・ 전러고려공산당 ・ 고려공산당 등 조직에서 파견한 인원들이었다. 이들은 상기 중학교에 들어가 교사와 학생들 속에서 새로운 사상 을 전파하였다. 새로운 사상을 접수한 이들을 중심으로 북간도지역 민족운동을 이끌어 가는 차세 대 중견세력이 형성되었다. 식민지조선의 종교계 사립전문과 ‘유교대학’ 구상 정준영 서울대 규장각 116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식민지조선의 종교계 사립전문과 ‘유교대학’ 구상 117 식민지 조선의 종교계 사립전문과 '유교대학' 구상: 명륜전문, 혜화전문, 그리고 경성제대 정준영 서울대 1. 시작하며: ‘식민지관학’과 ‘민족사학’의 사이 최근 한국 학계에서는 근대학술의 형성과정을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보려는 시도들이 활발 하고 모색되고 있는 듯하다. 우리사회에 근대적 학문체계가 어떤 경로로 도입되었고, 굴곡진 근 현대 100년의 역사 속에서 어떠한 정착, 변용, 축적의 과정을 겪어왔는지가 새삼 주목의 대상으 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시도들은 단순히 개별 분과학문들이 이루어온 학문적 축적을 평 가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학문생산을 지탱해왔던 학술제도 전반에까지 성찰의 범위를 넓혀가고 있 다는 점에서 의의가 적지 않다. 한국의 인문ㆍ사회과학이 다방면에서 심각한 위기와 도전에 직면 해 있는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학술생산의 사회적 조건이 어떻게 구축되어 왔는가를 묻는 것은, 이들 학문의 위기가 어디에서 연원되었으며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 것인가 하는 당면한 문 제들과 직결되는 과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들이 실제로 ‘생산적’인 성과로 이어지기 에는, 여전히 수많은 장벽들이 남아있는 것도 분명하다. 학술형성이라는 연구대상을 역사적으로 고찰한다는 것은 연구주체가 되는 지식인들의 존재기반을 파헤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 문에 애초부터 어려운 과제가 되는 것은 물론이다. 사회학자 부르디외(Bourdieu)의 표현을 빌자 면, 이것은 “객관화의 주체를 객관화시키는 고찰”, 즉 인식주체가 가질 수 있는 “특권을 스스로 박탈한 후,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객관화의 도구들(통계적 조사, 기술(記述), 인류학적 관찰, 역사 적 연구 등)로 무장하는 고찰”이 되어야 한다.57) 연구자가 자신이 발 딛고 있는 그 지반을 스스 로 파헤쳐야 하며, 따라서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수많은 논란과 스캔들 속에 휩싸일 수 있다 는 위험도 감내해야 한다. 게다가 이러한 고생스러움과 성가심은 논의를 한국 사회의 학술형성으로 과제의 범위를 좁힐 57) P. Bourdieu(2000), Pascalian Meditations, trans. by. R. Nice, London: Polity Press, pp. 9~10 118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수록 한층 가중된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근대적 학술제도가 도입되고 사회적으로 정 착하는 초기 과정, 그리고 학술적 지식의 창출주체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초기 국면들이 모두 식민통치의 자장(磁場)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 나아가 식민이후 분단 및 냉전체제를 거치면 서 이데올로기적 왜곡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근대 적 학술제도의 도입과 정착의 궤적이 식민지적 조건 및 식민 이후(postcolonial)의 상황과 분리 되기 어려울 만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라고 한다면, 오늘날까지도 학술제도와 학술관행 속에 남 겨져 있는 식민지의 상흔(傷痕)들을 어떻게 분석할 것인가 하는 과제가 새삼 지식인의 존재기반 에 관한 질문과 겹쳐서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최근 학술형성과 관련해서 활발하게 문제제기가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시론적인 논의에만 그칠 뿐, 여전히 우리 사회의 학술제도와 학술관행이 어 떤 특징을 가지며, 그것이 어떠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형성되었는지에 대해서 수많은 것들이 아 직 ‘질문’으로만 남아있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 발표에서는 한국 사회의 학술형성과 관련해서, 여전히 본격적인 해명을 기다리는 수많은 과 제들 중 몇 가지를 試論的으로나마 다루어 보고자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여기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이른바 ‘민족사학(民族私學)’의 신화이다. 주지하다시피, 오늘날 한국의 고등교육은 70% 이상을 사립대학이 담당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사립대학들을 선도하는 이른바 ‘명문’ 대학 들 상당수는 ‘해방’ 이전까지 그 기원이 소급되곤 하는데, 식민지 공간에 존재했던 사립전문학교 들이 그것이다. 이들 학교는 식민통치의 여러 제약 속에서도 ‘대학’의 설립을 지속적으로 모색했 고, 이미 교육과 연구의 측면에서는 식민지의 관학들, 즉 경성제대와 관립전문학교에 대항하는 ‘민족사학(民族私學)’으로써 이미 자리매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민족’과 ‘저항’ 의 관점은 일제시기의 고등교육을 이해하는 데 뿐 아니라, 해방 이후 한국의 대학사회 형성과정 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입지점으로 작용하게 된다. 엄혹했던 식민통치의 교육상황 속에 서 ‘민족’과 ‘저항’의 징후를 찾아내고, 이를 통해 ‘식민이후(postcolonial)’ 한국교육, 특히 대학 이 나아가야 할 바를 제시하는 것. 이제는 대표적인 사립대학으로 자리 잡은 식민지의 사립전문 학교들에게서 ‘민족사학’의 현전(現前; presence)을 확인하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이어져왔던 것 도 이 때문이었다. 물론 발표자도 인종 혹은 민족을 기축으로 식민지 사회를 가로지르고 있었던, 다른 것으로 쉽 게 치환되기 어려운 균열지점에 대한 질문과 고찰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 만 이 시기에 대한 연구들은 이런 균열지점에만 초점을 맞춘 나머지, 식민지 일상의 중층적인 양 상을 지배와 저항이라는 단순한 이항대립(二項對立)으로 환원해버리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이러 한 상황은 식민지 고등교육에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여서, ‘민족사학’이라는 신화의 이면(裏面)에 식민지조선의 종교계 사립전문과 ‘유교대학’ 구상 119 가려져 있었던 식민지 사립전문학교들의 구체적인 존재양상, 그리고 식민지관학과 민족사학의 이 항대립만으로는 보이지 않는 식민지 학술의 현실에 대해서는 의외로 이를 면밀하게 추적하고 있 는 연구들이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58) 이런 맥락에서 이 발표문에서는 먼저 식민지의 사립전문학교 그 중에서도 종교계 사립전문학 교에 초점을 맞추어, 식민지 공간에서 이들 학교들의 존재방식이 가지는 특징들을 간략하게 살펴 보겠다. 후술하겠지만, 식민지 조선의 고등교육은 제국일본 내에서도 이례적이라 할 만한 특징들 이 많았다. 식민지대만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사립전문학교가 설립되었을 뿐 아니라, 더욱이 그 중에서도 종교계 사립전문들의 비중과 역할이 현저했기 때문이다. 특히 1920년대에는 ‘사립전문 이란 곧 미션스쿨’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기독교계 사립전문의 역할이 압도적이었 다.59) 이들 종교계 사립전문들은 ‘일선공학(日鮮共學)’을 지향했던 식민지 관학과는 달리 조선인 교육을 위주로 했기 때문에 당시 식민지 조선인들의 고등교육 체험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해방 이후 한국의 대학사회 형성에 미친 영향도 적지 않았다. 이들 종교계 사립전문 들은 대부분 한국의 대표적인 사립대학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이처럼 식민지조 선에는 종교계, 특히 기독교계 사립전문들이 많았던 것일까. 그리고 이들 학교들은 식민지 교육 체제 내부의 사립전문학교로서 어떤 가능성과 제약 속에 놓여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이러한 식민지조선의 종교계 사립전문에 대해서 식민권력은 어떻게 대응해 나갔던 것 일까? 이 지점에서 이 발표는 종교계 사립전문, 그 중에서도 비기독교계 사립전문인 명륜전문과 혜화전문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들 사립전문은 1910년대에 전문학교 인가를 받은 연희전문과 세 브란스의전, 1920년대에 인가를 받은 보성전문, 숭실전문, 이화여전 등 대표적인 ‘민족사학’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아왔지만, 1940년대 초반 대표적인 사립전문이었으며, 기독교계 사 립전문들과 마찬가지로 해방 이후 유력한 사립종합대학으로 성장했다. 이들 학교는 ‘관학’과 ‘민 58) 기존의 교육사 연구에서 식민지 고등교육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조선인들에게 닫혀있었고, 많은 경우 일본 인 자제와 친일파 자제들만을 위한 교육이었다는 이유에 부정되거나 매우 간략한 형태로만 다루어지는 경향 이 강했다. 따라서 사립전문에 대해서도 저항적 성격만을 강조했을 뿐, 이에 대한 체계적인 고찰은 결여되어 있었다. 다만 일제시기 고등교육기관의 전반적인 형태와 궤적을 정리한 정재철의 고전적인 연구를 통해서 사 립전문의 제도적 특징은 대체로 밝혀졌으며, 비교교육사의 관점에서 민립대학설립운동과 이후 사립전문의 궤 적을 민족적 대학모델로 포착한 우마코시 토오루(馬越徹)의 고전적 연구 또한 민족사학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유용한 참조점이 된다. 鄭在哲(1987), 「日帝下의 高等敎育」, 교육문제연구소논집 및 馬越徹(1997), 韓国 近代大学の成立と展開: 大学モデルの伝播研究, 名古屋大学出版会를 참조. 그런데 최근 들어 식민지의 학술형 성과 관련하여 사립전문을 주목하는 발표들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59) 1929년 이전 식민지조선에 설립된 사립전문학교는 모두 6곳인데, 1918년 동양협회경성전문학교이란 이름으 로 설립되었다가 1922년 관립으로 전환된 경성고등상업학교, 천도교계 학교로 출발했다가 1922년 사립전문 학교로 재발족된 보성전문학교를 제외한 나머지 4곳은 기독교계 사립전문이었다. 120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족사학’의 중간적인 존재로서, 식민 공간에서 체제외부를 지향하면서도 체제내부에 머물러 있었 던 ‘민족사학’의 복잡한 성격을 드러낼 유용한 사례이기도 하다. 이 발표의 후반부에는 혜화전문 과 명륜전문의 역사적 궤적을 따라가면서 당시 식민지에서 식민지관학과 민족사학의 대립이 의 미하는 바, 그리고 이것이 식민이후의 상황에 미친 영향 등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다루고자 한다. 2. 식민지 ‘민족사학’의 이면: 식민지 고등교육체제의 안과 밖 머리말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식민지 조선의 사립전문학교는 제국일본의 전체 차원에서 보아 도 대단히 독특한 존재였다. 이것은 당시 제국일본의 식민지에 설립되었던 고등교육기관의 상황 을 정리해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전문학교 대학 / 고등학교 대만 총독부60) 대북제국대학(28) 대북고등학교(25) 사립 台南고등공업학교(31) 대북고등상업학교(19) 台南고등상업학교(19→29) 대만총독부의학전문학교(19→36) 대북고등농립학교((22→28) - 대학 1 고교 1 관립전문5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17) 연희전문학교(17) 보성전문학교(22) 숭실전문학교(25→39) 이화여자전문학교(25→43) 경성약학전문학교(29)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30) 중앙불교전문(30→혜화전문40→44) 명륜전문학교(42→43)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38) 숙명여자전문학교(39→43) 대동공업전문학교(38) 대학 1 관립전문 7 공립전문 2 사립전문 12 만주교육전문학교(24→31) 조선 총독부 경성제국대학(26) [경성제대예과(24)] 경성의학전문학교(16) 경성법학전문학교(16) 경성고등공업학교(16) 수원고등농림학교(18) 경성고등상업학교(18→22) 경성광산전문학교(39) 부산고등수산학교(41) 대구의학전문학교(公, 33) 평양의학전문학교(公, 33) 관동주 만주의과대학(私,22) 여순공과대학(22) 여순고등학교(40) 대련고등상업학교(36) 카라후토청 기타 비고 관립/공립 카라후토의학전문학교(44) 동아동문서원대학 (상해, 私, 39) - 대학 2 고교 1 전문 2 - 전문 1 - 대학 1 60) 대만총독부의 고등교육기관 중에서 台南고상은 1929년 台北고상에 통합되었으며, 대만의전과 대북고농은 각각 1936년과 1928년에 대북제대 부속 전문부로 통합되었다. 따라서 설립년도의 추적과는 별도로 실재 대 만에 있었던 관립전문의 수는 많지 않았다. 식민지조선의 종교계 사립전문과 ‘유교대학’ 구상 121 이 표는 지면의 제약으로 학교의 복잡한 명칭변경 및 학교폐지, 통합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상당히 불완전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약점을 감안하더라도, 이 표는 식민지 조선의 교육상황이 제국일본 내의 다른 식민지들과 얼마나 달랐는지에 대해서는 비교적 명확하게 드러 내고 있다. 다른 식민지에는 전문학교는 물론 거의 모든 교육기관이 관립학교인데 반해서, 식민 지조선의 경우 수에서나 규모에서나 사립전문학교가 다른 고등교육기관을 압도했다는 사실을 단 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가령 이 표에 나타나 있듯이, 식민지조선에 설립되었던 사립전문학교 는 모두 12곳61)이었는데, 경성약전, 경성치의전, 경성여의전 등 설립주체가 일본인이었던 것을 제외하더라도 9곳이었다. 식민지대만에는 사립 고등교육기관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고 관동주의 만주의대와 만주교육전문은 설립주체가 남만주철도주식회사였기 때문에 사립학교로 분류된 것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62) 물론 식민지조선에는 관공립 고등 교육기관의 수도 적지 않았다. 경성제대를 제외하고도 관립전문 7개교, 공립전문 2개교로 다른 모든 식민지의 관공립 전문학교를 합한 것보다도 많았다. 하지만 1937년의 도朝鮮諸學校一覽반에 따르면, 조선의 관공립전문학교에 재학하는 학생은 모두 1,862명으로 당시 사립전문의 재학생 2,390명의 77% 수준에 머물렀다. 그렇다면, 왜 이처럼 식민지 조선에는 사립전문이 고등교육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을 까. 주지하듯이 고등교육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방침은 최소한 전시체계가 되기 전까지는 일관되 게 소극적이었다. 식민교육이라는 것은 “卑近한 보통교육을 베풀어 한 사람 몫으로 일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드는 데 주안점을 두”는 것으로 충분하며, 고등교육은 “民度가 낮은” 조선의 현실에서 는 “高等遊民”을 양산할 가능성이 높을 뿐만 아니라, 과격한 사상을 유입시켜 식민통치의 위협요 인을 만들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가급적 피해야 한다는 관점이 유지되었던 것이다.63) 그런데 총 독부의 이런 억압기조에도 불구하고 식민지의 조선인들은 시종일관 고등교육의 확대를 요구했고, 대안적인 대학설립을 모색했다. 1910년대 미국선교사들이 非신도들까지를 포함하는 기독교 칼리 지의 설립을 적극 모색할 수 있었던 것도, 이들이 선교전략의 차원에서 조선인들의 고등교육 요 구에 적절히 부응했고 조선인들 또한 총독부의 식민교육에 대한 대안으로써 선교사들의 교육선 교에 적극 호응했기 때문이었다.64) 1920년대 들어 조선인들은 일본 본토에서 사립대학의 설립을 61) 식민지조선의 고등교육 현황에 대해서는 鄭在哲의 논의(1987: 70)를 따랐다. 62) 그 밖에 중국 상하이에 설립된 동아동문서원대학도 설립주체인 동아동문서원이 사실상 반관반민의 단체였기 때문에, 조선의 사립학교들과 성격을 달리했다. 63) 高橋濱吉(1927), 朝鮮敎育史考, 帝國地方行政學會朝鮮支部, 341~365쪽. 64) 정준영(2006),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식민지교육정책과 미션스쿨: 중ㆍ고등교육의 경우」, 사회와 역사 72집을 참조. 122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허용하는 「대학령」이 공포되자 이를 구실로 “學의 獨立”65)을 지향하는 민립대학 설립을 대대적 으로 모색하기도 했다. 식민당국이 고등교육기관의 설립 자체를 허가하지 않으려 했던 초기의 방 침을 철회하고 1915년 이후 전문학교 설립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1920년대 들어 예과를 설립하면서 까지도 경성제국대학의 설립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던 것도, 고등교육에 대한 식민사 회의 요구와 압력에서 기인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 대학설립을 둘러싸고 식민당국과 조선인사회 가 경합하는 일종의 ‘헤게모니 경쟁’ 상태가 발생했던 것이다.66) 물론, 조선총독부도 이러한 경쟁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서 주도권을 잡으려고 애썼다. 선교 사들의 기독교칼리지 설립시도에 대해서는 1915년 ‘악명이 높은’ 「개정사립학교규칙」(총독부령 24호)을 통해 식민지교육체제로의 편입을 강요하는 동시에, 같은 날 공포된 「전문교육에 관한 방 침」(훈시 16호)을 통해 사립전문학교 설립의 길을 열어놓는 등 회유책도 마련했다.67) ‘당근과 채 찍’의 결과, 선교사들의 칼리지는 일단 사립전문학교의 형태로 식민지교육체제에 편입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인 유지들의 민립대학 설립시도에 대해서는 총독부는 관립대학인 경성제대의 설립을 서두르는 것으로 대응했다. 식민지에 ‘불완전한’ 사립대학이 먼저 설립되는 것은 식민통치에 치 명상이 될 수 있기 때문에,68) 식민당국은 이례적인 속도로 대학설립을 추진하여 1924년에 경성 제대의 설립을 공식화했다. 경성제대가 일본 본토에서도 최고학부인 제국대학을 모델로 설립했던 것도 대학의 형식과 내용에서 사립대학의 설립시도를 압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총독부는 이처럼 한발 앞서 제국대학을 설립한 이후, 경성제대로 충분하다는 이유로 이후 계속되는 사립대 학 설립시도를 차단할 수 있었다. 연희전문, 세브란스의전, 숭실전문, 이화여전, 보성전문 등 식민지조선의 대표적인 사립전문들 은 이와 같은 대학설립을 둘러싼 경합 속에서 출현했다. 식민지조선에 조선인들을 주된 교육대상 으로 하는 사립전문학교가 많았던 것은 일본의 다른 식민지와 비교했을 때 그만큼 조선인들의 고등교육 요구, 대학설립의 지향이 강렬했음을 반영한다. 그리고 이러한 독자적인 대학상의 모색 은 1930년대 이후 식민권력이 사립대학의 인가를 사실상 거부하는 상황에서도 지속되었다. 1926 년 경성제대의 설립 이후 식민지조선에 대한 학술적 지식의 생산은 경성제대를 중심으로 한 식 65) 「民立大學의 必要를 提唱하노라」, 동아일보 1922년 2월 3일자. 66) 대학설립을 둘러싼 헤게모니경쟁의 과정에 대해서는 정준영(2009), 「경성제국대학과 식민지헤게모니」, 서울 대박사논문을 참조. 67) 정준영(2006), 225~226쪽. 68) 이것은 1922년 제2차 조선교육령 勅令案이 추밀원의 심의를 받을 때 추밀원 고문관들 사이에 쟁점이 되었 던 것으로, 2차 교육령의 내지준거주의가 결국에는 ‘식민지에서 대학의 허용’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자세한 것은 정준영(2009)를 참조. 식민지조선의 종교계 사립전문과 ‘유교대학’ 구상 123 민지관학이 독점하게 되었지만, 이것은 철저하게 일본인 연구자들이 위주가 되어, 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조선인 지식인들을 체계적으로 배제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것은 당시 제2차 조선교육령 이후 제국대학 등에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조선인 지식인이 늘어나는 상황 속에서 일어난 일 이었기 때문에 “식민지 사회에서 근대적 지식체계가 이원화되는”69) 현상을 낳게 되었다. 1930년 대 들어 비약적인 성장세70)를 보였던 사립전문들은 ‘제국의 아카데미즘’ 내부에서 공부했지만 ‘식민지의 아카데미즘’을 형성하는 데에서 배제된 조선인 지식인들을 교직원으로 적극적으로 영 입했다. 가령, 보성전문은 1932년부터 1934년까지 김광진(東京商科대학 학사, 상업학), 오천석(콜럼비 아대학 박사, 영어/심리학), 현상윤(早稲田대학 학사, 윤리), 최용달(경성제대 학사, 상법/국제법), 유진오(경성제대 학사, 헌법/행정법/국제공법), 안호상(예나대학 박사·경성제대 대학원, 철학/독일 어), 박극채(京都제대 학사, 상업경제), 윤행중(京都제대 학사, 경제학) 등을 교수진으로 임명했 다.71) 그리고 이들 새로운 교수진들을 기반으로 실무지식 이외에 학술활동의 기초가 되는 전문 적인 교과를 포함하도록 커리큘럼을 개편했을 뿐만 아니라,72) 도서관과 연구실, 학술저널 등 학 술적 지식생산에 필요한 제도적 기반을 갖추기 위해 애썼다.73) 대학 인가를 받지 못했지만, 식민 지 관학에 필적하는 민족사학의 아카데미즘을 구축함으로써 식민지 공간에서 ‘대학’의 역할을 실 질적으로 대신할 수 있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최근 들어 1930년대 들어 “대학 제도 안으로 진입 이 허용되지 않았던 식민지인이 대학의 밖에서 구성하고자 했던”74) 일련의 학문적 실천을 “식민 지적 아카데미즘”으로 규정하고, 그 제도적 기반을 사립전문학교의 존재양태 속에서 찾으려는 시 도가 나타나고 있는 것75)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69) 한기형(2007), 「제도적 아카데미즘의 결여와 근대잡지-식민지 지식문화의 특성에 관한 시론」, 지식의 근 대기획, 미디어의 동아시아, 성균관대동아시아학술원 동양학학술회의 논문집(2007. 12. 14),70쪽. 다만 인용 된 한기형의 논의는 1920년대 조선지성계를 묘사한 것이기 때문에 필자의 논지와는 다르다. 70) 朝鮮諸學校一覽 各 年度版에 따르면, 1921년 3개 학교에, 교직원 50명(조선인 21명), 재학생 458명에 불 과했던 사립전문학교의 상황은 1926년 5개 학교, 교직원 98명(조선인 26명), 재학생 800명, 다시 1932년에 는 8개 학교, 교직원 213명(조선인 64명), 재학생 1,896명으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71) 이러한 신진 연구 인력의 적극적인 영입은 보성전문 뿐만 아니라, 30년대 사립전문학교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었다. 72) 장신(2012), 「근대 아카데미즘의 재편과 법학」; 馬越撤(2001), 한국 근대대학의 성립과 전개, 교육과학사, 90쪽. 73) 경성제대 출신의 유진오가 보성전문으로 자리를 옮길 때 校主 김성수에게 내걸었던 조건에 대한 에피소드는 이를 잘 보여준다. 兪鎭午,「片片夜話 32 - 日記와 쇠고랑」, 동아일보 1974년 4월 8일 참조. 74) 정종현(2010), 「신남철과 ‘대학’제도의 안과 밖-식민지 학지의 연속성과 비연속성」, 한국어문학연구 54 집. 124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하지만 과연 ‘민족사학’을 표방했던 사립전문들은 경성제국대학으로 대표되는 식민지 고등교육 체제와 관학아카데미즘과의 관계에서 대립하는 위치에만 있었던 것일까. 이것을 제대로 판단하기 위해, 우선 이들 민족사학이 식민공간에서 유지될 수 있었던 제도적 근거, 즉 전문학교라는 것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3. 전문학교 모델과 그 식민지적 함의 애초에 일본의 ‘전문학교(専門学校)’이라는 것은 서구의 발달된 지식체계를 단기간에 수용하기 위해 창안된 독특한 고등교육의 모델이었다.76) 서구의 학술체계를 체계적으로 습득하는 데는 많 은 시간과 재원이 투여되어야 하기 때문에, 당시 일본의 사회상황에 즉시 활용할 수 있는 실용적 인 응용지식을 선별ㆍ교육하여 단기간에 전문 인력을 창출하고, 이들의 축적을 기반으로 보다 본 격적인 대학의 설립을 모색하자는 것이 당시 메이지 정부의 구상이었다.77) 그런데 이처럼 애초 에는 잠정적 형태에 불과했던 전문학교는 1886년 동경제국대학이 설립된 이후에는 일본 고등교 육의 하위모델로 자리 잡아 갔다. 제국대학이 “國家의 須要에 應해서 學術技藝를 敎授하고 그 蘊奧를 攻久”(「제국대학령」 1조)하는 곳, 즉 고급한 학술지식의 생산을 지향하는 곳이라면, 전문 학교란 “高等한 學術技芸를 教授하는 곳”(「전문학교령」 1조), 즉 전문적인 지식을 가르치는 곳으 로 차별적으로 규정되게 되었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전문학교란 “高遠한 學理”, “실제 필요치 않은 難解의 문장”, “繁多한 사항”을 가르치는 것을 최대한 피하고, “簡明을 主旨로 해서 有用한 日新의 지식, 기능을 가르치는”78) 곳이다. 학술적 지식생산의 영역은 국가엘리트를 양성 75) 홍종욱(2011), 「‘식민지 아카데미즘’의 그늘, 지식인의 전향」, 사이間SAI 제11호. 76) 일본 전문학교 모델의 성립과정 및 특징에 대해서는 天野郁夫(1986), 高等敎育の日本的構造, 玉川大学出 版部, 23~59쪽 참조. 77) 일본의 교육사회학자 天野郁夫에 따르면, 이러한 전문학교 모델의 특징은 일본 제국대학의 초기국면에도 확 인된다. 초기 제국대학도 여전히 학술적 지식의 창출보다는 서양어에 기반한 지식의 직수입하고 이를 몸에 익 힌 국가엘리트를 양성하는데 초점을 두었는데, 이것은 전문학교 모델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는 일본형 고등교육의 원형적 모델은 제국대학이 아니라 전문학교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天野郁夫(1993), 旧制専門学校論, 玉川大学出版部을 참조. 78) 이러한 전문학교의 세부지침은 개별학교의 규칙에서 더욱 선명하게 확인된다. 전문학교 교육의 특징에 대해 서는 天野郁夫(1986; 1993)의 논의를 참조. 이 문장의 인용구는 1916년 설립된 경성의학전문학교의 규칙에 서 따온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취지는 비슷한 시기에 전문학교로 인가 받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규칙에 서도 마찬가지로 발견된다. 식민지조선의 종교계 사립전문과 ‘유교대학’ 구상 125 하는 제국대학이 독점하고, 중하위 기능적 전문직의 양성은 전문학교가 맡은 위계적 기능분화가 일본식 고등교육의 특징적인 모델로 등장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위계적 분화관계는 교육체계가 정비되면서 더욱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전문학 교는 5년제 중등학교 수료자를 받아 3년간(의학전문학교의 경우에는 4년) 교육해서 졸업시키는 반면, 제국대학은 중학교 수료자가 3년간의 예비교육79)을 마쳐야 비로소 입학자격을 얻을 수 있 었다. 즉, 교육의 성격과 질(質) 뿐만 아니라, 교육의 연한(年限)까지도 전문학교는 제국대학에 기 능적으로 종속되는 고등교육 하위모델로 고착되었던 것이다. 철저하게 실용지식의 교육을 강조했 던 전문학교의 성향은 더욱이 1919년 일본이 사립대학에게도 대학승격의 문을 개방함으로써 더 욱 강화되었다. 1919년 이전까지는 일본의 전문학교 중에서도 일부 사립학교들은 국가의 「전문 학교령」 취지와는 별도로 교양적인 교육을 실시하는 등 대안적인 대학교육을 모색했다. 하지만 이들 사립전문학교들이 「대학령」 선포를 계기로 사립대학으로 승격하게 되자, 남은 전문학교들은 훨씬 더 기능적이고, 실용적인 측면이 강한 직업교육에 치중하였고, 중급 수준의 전문 인력 양성 이라는 기능이 강화되었다. 일본 본토에서는 대학설립을 허용하지 않았던 여성계 전문학교와 대 학으로 승격되지 못한 일부 종교계 전문학교를 제외한 대부분의 전문학교가 의약업, 농림업, 광 공업, 상업, 수산업, 예술 등 직업교육 기관으로서의 역할이 강화되었다. 그리고 대학인가를 거부했던 조선총독부가 사학(私學)들에게 허용했던 고등교육의 형태가 이 전문학교였다. 사학들은 주체적인 대학설립의 요구가 좌절된 상황에서 ‘전문학교’이라는 형식을 받아들였다. 1910년대부터 식민지 고등교육체제의 외부에서 대학부를 개설하는 등 고등교육의 실시에 모색했던 숭실, 이화 등의 사립학교도 1925년 식민당국으로부터 전문학교 인가를 받았다. 이후 사학들은 학교의 전문학교 인가, 또는 학과의 확대를 위해 식민당국의 요구에 더욱 적극적 으로 부응하는 양상마저 보이게 된다. 사학들은 식민권력의 전문학교 인가를 받아들임으로써, 원 하든 원치 않든 식민지 고등교육체제에 편입되는 양상을 보이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사학들이 식민권력의 전문학교 모델을 수용한 것은 불가피한 측면이 없지 않았다. 식민지 공간에서 학교를 유지ㆍ수용하기 위해서는 식민당국의 통제를 감수해야 했다. 전문학교의 인가를 받을 경우, 학생들이 일본 제국 전역에서 ‘전문학교’에 해당하는 학력(學歷)을 인정받게 되고, 전 문교육 수료에 따른 자격과 면허도 허용된다는 사정도 고려되었다.80) 전문학교 졸업생에게는 관 련 과목의 교원자격도 부여되었다. 학생들의 수업료로 운영되는 사립학교의 경우, 학생들이 졸업 79) 일본에서는 舊制고등학교가 제국대학 진학자를 위한 예비교육을 담당하는 학교였다. 구제고등학교는 제국대 학에서의 고급한 학술지식 교육에 필요한 외국어와 교양교육을 실시했다. 80) 전문학교 졸업생들에게 부여되는 권리에 대해서는 조선총독부학무국(1938), 朝鮮學事例規를 참조. 126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과 더불어 학력과 자격을 부여받는 여부는 학교재정과 관련해서 의미가 커졌다. 점점 더 많은 학 생들이 점차 상급학교에 진학81)하거나, 사립교원으로 진출할 수 있는 현실적인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입학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세브란스의전처럼 전문 직업인 양성을 뚜렷이 표방했을 경우, 의사면허의 ‘지정’은 학교의 존재의의와 관련해서 사활이 걸린 문제가 되었다. 세브란스의전은 의사면허의 통용범위를 확대하기 위해서 총독부의 학칙과 교과과정 개정에 적극적으로 호응했 다.82) 전문학교가 되면서 얻는 현실의 이익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머뭇거렸던 사립학 교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전문학교 인가에 더욱 적극적인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전문학교로 인정받는 대가 또한 분명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전문학교는 철저하게 실 용적이고 기능적인 지식을 가르치는 곳으로 규정되어 있었고, 따라서 이 원칙에 부합되지 않는 교과과정은 식민당국의 감독을 받기 일쑤였다. 1930년대 들어 주요 ‘민족사학’들은 대학 제도에 의 진입이 허용되지 않았던 조선인 지식인들을 교원으로 적극 영입해서, 전문학교를 유지하는 가 운데서도 교과과정의 개편과 확장을 꾀했다는 사실은 앞에서 언급했다. 하지만 전문학교의 애초 목적이 철저하게 “高遠한 學理”를 배제하고 있는 이상, 전문학교의 입장에서 대학에 근접하는 교 과의 도입은 한계가 있었다. 사립전문에 영입된 조선인 지식인들이 자신의 전공영역과 무관한, 게다가 기능적이고 실용적 과목을 강의해야 하는 상황이 계속 되었다.83) 물론 과목의 이름만 유 지한 채 교원이 원하는 지식을 가르칠 수도 있겠지만, 전문학교에 진학하는 학생들이 점차 실용 적인 성향이 강화되면서 이것 또한 제약이 커지게 되었다. 게다가 전문학교는 중급 이하의 전문지식을 가르치는 데 집중되어 있을 뿐, 제도적으로는 교원 의 지식생산을 장려하고 학문후속세대를 양성할 수 있는 어떠한 제도적 장치도 보장되지 않는다 는 문제도 있었다. 교수들에게 봉급과는 별도로 전문연구에 필요한 별도의 수당(즉 講座俸)을 보 장했으며 대학원ㆍ강좌교실(연구실) 등 학문후속 세대의 양성을 위한 제도적 장치도 갖추고 있었 던 제국대학과는 달리, 전문학교는 이러한 제도적 기반을 결여하고 있었다. 보성전문, 연희전문, 세브란스의전 등 사학당국의 특별한 노력에 의해 도서관이 정비되고 학술잡지가 간행되기도 했 81) 전문학교 졸업자들은 학교에서 실시하는 소정의 시험을 거치면, 사립대학, 관공립대학, 심지어 제국대학에도 입학할 수 있었다. 82) 세브란스의전은 1923년 3월 총독부지정을 통해 조선 내에서 통용되는 의사면허를 취득했고, 1934년 4월 문부성지정을 통해 제국 전역에 통용되는 의사면허를 취득했다. 佐藤剛藏은 세브란스의 에비슨 교장이 의사면 허의 지정을 위해 세세한 것까지 총독부의 지시를 받았으며 경성의전의 교장이었던 자신에게까지 협조를 요 청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佐藤剛藏(1956), 朝鮮醫育史, 79쪽. 83) 예컨대 보성전문의 유진오는 대학에서 관심을 가졌던 세부 전공과는 무관하게 다양한 과목을 강의해야 했다 고 증언하고 있으며, 연희전문의 백남운의 경우도 학교에서는 ‘부기’와 ‘상업사’를 가르쳤다. 식민지조선의 종교계 사립전문과 ‘유교대학’ 구상 127 지만, 비공식적인 방식으로 사학이 별도의 자금을 동원해서 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학술지식 의 안정적인 생산을 기대하기 어려웠고, 이에 대한 학생들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유도하기도 어려 웠다. 더 심화된 연구를 원하는 학생들은 졸업으로 인정받는 전문학교 학력으로 연구과를 갖춘 사립대학이나 제국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었다. 이처럼 전문학교 체제에 머물러 있는 한 대안적 아카데미즘을 지향했던 ‘민족사학’의 한계는 명확했다. 앞서 보성전문 등이 관학에 대항하는 ‘제2의 민립대학’을 표방하며 조선인 지식인들을 교수요원으로 적극적으로 영입했다고 지적했지만, 영입된 교수들은 대부분 일본의 관학아카데미 즘에서 학문적 수련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조선’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표방했던 식민지 관학이 정작 조선인 연구자를 배제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은 지극히 타당했지만, 정작 과학적 연구의 방 법, 특히 실증적 연구의 측면에서는 관학과 ‘민족사학’은 그 기반이 다르지 않았다. 요컨대, 관학 과 민족사학은 표면적인 대립관계에도 불구하고, ‘제국학지(帝国学知)’의 연쇄라는 측면에서는 관 학출신의 교수들을 매개로 오히려 공고하게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제국)대학과 전문 학교의 기능적 분담관계를 제도적으로는 묵인하는 상황에서 ‘민족사학’은 관학과 대적하기 위해 서라도 본의든 아니든 점차 관학을 닮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민족사학이 지향했던 독립적 학술 이란, 신남철이 처했던 이율배반적 상황과 비슷하게, 관학에 필적한 학술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관학의 학술적 권위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1930년대 이후 확인되는 관학과 민족사학의 대립구조는 엄밀히 말해서 민족사학의 식민교육체제 편입을 전제로 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대립구조의 배후에는 경성제대를 정점으로 관공립전문, 사립전문이 동심원적으로 배치되는 위계구조가 놓여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제도적 아카데미즘에 대립하면서도 이를 ‘모방’해서 대안적 학술을 모색했던 ‘식민지적 아카데미 즘’의 독특한 양상은 식민지 고등교육체제의 조건들, 즉 표면의 대립구도와 심층의 위계구조 사 이의 절합(節合; articulation) 관계 속에서 나타난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이런 대립구 도와 위계구조의 경계선에 있었던 사례로 주목되는 것이 1940년과 1942년 전문학교로 인가를 받았던 또 다른 종교계 사립전문학교였던 혜화전문학교와 명륜전문학교였다. 128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4. 혜화전문과 명륜전문84): 비기독교계 사립전문학교로의 궤적 혜화전문과 명륜전문은 1910년대 말부터 1920년대 초까지 전문학교로 인정받은 연희, 보성, 숭실, 이화 등의 사학들에 비해 지금까지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아왔다. 하지만, 이들 학교는 1930년대 이후 사립전문학교로 인가를 받았고, 전시국면에서 일시 폐쇄되기도 했지만, 해방 이후 곧바로 재건되어 비교적 이른 시기에 종합대학 승격의 기반을 갖추었으며, 성장을 거듭해서 오늘 날까지도 한국사회의 유력한 사립대학으로 존속하고 있다. 1920년대까지 ‘인가’ 받은 사립전문들 은 대체로 종교재단의 영향이 강했으며 보성전문을 제외하고는 기독교계통의 전문학교가 대부분 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언급했지만, 이런 종교계 전문학교의 특성은 ‘후발’ 사립전문학교인 혜화 전문과 보성전문에서도 마찬가지로 확인된다. 특이한 지점은 이들 학교가 이전까지는 없었던 불 교와 유교를 기반으로 하는 종교계 사립전문학교라는 점일 것이다. 근대적 문명제도와 적극적인 결합을 모색했던 기독교와 천도교 계열과 달리, 불교와 유교는 전 통 종교의 성격이 강했고, 따라서 한국사회에서는 근대적 제도의 도입에 있어서도 소극적인 성격 이 강했다. 물론 활발한 교육 사업을 벌였던 기독교계, 천도교계에 대응해서, 불교계와 유교계에 서도 일찍부터 일부 인사들을 중심으로 근대적인 학교설립이 시도되기도 했다. 하지만 교계 내부 의 보수 세력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고, 기독교의 급격한 교세 팽창에 대해 불교와 유교를 이용하 여 이에 맞서려 했던 총독부의 적극적 개입정책이 오히려 불교계와 유교계의 왜곡과 폐단을 부 추겼기 때문에 근대적 교육체계를 도입하여 종교계를 근대적으로 혁신하려는 자발적 시도는 종 교계 내부에 더욱 큰 분란을 야기한 채 좌절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전형적인 사례가 불교계였다. 식민화되기 이전인 1902년 한국정부의 주도로 불교교단과 전 국사찰이 정비되자 이를 계기로 불교의 근대화가 모색되기 시작했다. 1906년 결성된 불교연구회 는 불교의 근대화를 위해서는 승려들에게 최소한의 근대식 교육이 필요하며 나아가 시대의 변화 에 부응하는 포교사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근대 불교학교를 설립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 불교연구회가 일본 淨土宗 등의 근대불교학교 모델 등을 참조해서 설립한 것이 1906년 明進學 校였다.85) 하지만 통감부의 설치를 비롯해서 식민화가 진척되고, 불교교단 내부에도 분란이 강화 84) 혜화전문학교와 명륜전문학교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한 정재철의 연구와 동국대학교와 성균관대학교가 記念 誌적 차원에서 편찬한 대학사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는 편이다. 대학사에 기록된 자료와 서술 이외에는 별도 의 자료로 현재의 시점에서는 구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논의의 한계는 비교적 명확한 편이다. 이하 서술에서 는 특별한 언급이 없는 한 대학사를 참조했으며, 다른 연구 및 자료를 인용할 경우에만 각주를 첨부한다. 85) 명진학교에 관해서는 남도영(1981), 「구한말의 명진학교, 최초의 근대식 불교학교」, 역사학보 90 및 동 식민지조선의 종교계 사립전문과 ‘유교대학’ 구상 129 되자 明進學校의 운영도 사실상 공전(空轉)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1908년 통감부가 「사립학교령」 (칙령 62호)을 선포하자, 해체된 불교연구회를 대신해 학교의 운영권을 넘겨받은 불교원종 종무 원은 1910년 明進學校를 고등전문학교로 승격시키고자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통감부는 전문 학교가 아닌 불교사범학교로 인가해 주게 되자, 종무원은 불교연구회의 영향력이 남아 있는 明進 學校를 폐쇄하고 佛敎師範學校를 새로 설립하게 되었다. 1910년 일제병탄을 계기로 불교계는 다 시 기존에 주도권을 가졌던 북부의 圓宗과 혁신을 주장하는 남부의 臨濟宗으로 분열되었는데, 이런 와중에서 불교사범학교는 다시 흐지부지한 상태로 전락했다. 그러다 불교계의 분열이 수습 되면서 다시 불교사범학교의 재건이 시도되었는데, 이는 1914년 佛敎高等講塾의 설립으로 이어 졌다. 하지만 간신히 재건된 佛敎高等講塾 또한 불교계 내부의 논란으로 1년도 되지 않아 폐교 되고 말았다. 그런데 1915년 조선총독부가 사립전문학교의 문호를 개방하자, 불교계는 이번에는 일본의 불 교계 대학들을 참조해서 고등교육기관의 설립을 모색하게 되었다. 1915년 설립된 佛敎中央學林 이 그것으로, 이 학교는 총독부로부터 공식적인 학교설립을 인가받았지만, 전문학교로의 승격까 지 이르지는 못했다. 하지만 佛敎中央學林의 설립을 계기로, 불교교단은 지방에 散在했던 사원 주관의 초등 및 중등 교육수준의 학교들을 地方學林으로 체계화하는 등, 초등-중등-전문으로 이 어지는 계통적인 승가교육체계의 형성을 시도하기도 했다. 佛敎中央學林의 학생들은 1921년 전 문학교 승격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불교계 중앙교단을 비판하며 동맹휴업에 돌입했다. 하지만, 전 문학교 승격문제는 불교교단 내부의 구조화된 갈등과 맞물려 좀처럼 진전되지 않았다. 교단은 1923년 장기 동맹휴업 상태에 있었던 佛敎中央學林을 승격준비를 이유로 5년간 휴교를 결정했 는데, 사실상의 폐교조치에 다름 아니었다. 1924년 불교계의 내부 갈등이 다소 진정되자 전문학 교 승격문제가 다시 표면에 부상하게 되었는데, 불교계의 중앙교무원은 전문학교 인가를 위해 1928년 새로 佛敎專修學校를 설립해서 총독부의 설립인가를 받게 되었다. 이후부터는 전수학교 의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전문학교 승격운동이 전개되었는데 1930년 마침내 총독부로부터 전문 학교의 인가를 받게 되었다. 佛敎專修學校를 모태로 中央佛敎專門學校가 공식적으로 출범했던 것이다. 전문학교가 되면서 중앙불교전문은 “불교학 및 동양문학에 대한 전문교육을 실시”하는 종교계 전문학교로 면목을 일신했다. 기존의 승려양성 교육은 입학자격이 없어도 진학할 수 있는 ‘특과 (特科)’나 ‘선과(選科)’에서 계속 이루어졌지만, 학교 ‘본과(本科)’는 전문학교에 진학할 자격을 갖 춘 중등교육 수료자를 입학시키게 된 것이다. 학교의 수업연한은 3년으로 규정되었다. 초대 교장 국대학교백년사와 동국대학교 70년사의 해당 부분을 참조. 130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은 불교계 인사 김영수가 맡았는데, 윤리학의 김두헌, 불교사의 에다(江田俊雄), 유학사의 변영 만86) 등이 전임교수로 부임했다. 하지만, 중앙불교전문은 출범 직후부터 운영의 어려움을 겪었 다. 중앙교단이 심각한 자금난을 겪고 있었다는 문제도 있었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학교운영 자 금의 오용, 남용이었다. 급기야 1933년부터는 교단 내부에서 폐지가 모색되기 시작했고, 이에 반 발한 학생들이 동맹휴업을 반복하는 등 학교운영은 계속해서 파행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것은 1940년 중앙불교전문이 혜화전문으로 거듭날 때 계속되었다. 이처럼 혜화전문이 발족될 때까지 불교계 전문학교의 설립 및 운영은 불교 교단의 내부 갈등 과 긴밀하게 연동되면서 파행이 거듭되었다. 이러한 갈등의 원인은 사회의 급격한 변화에 유리되 어 자기혁신의 계기를 놓친 불교계 내부에도 있지만,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에도 기인했다. 조선 총독부는 기독교세력의 확대를 막는 대안으로 불교의 진흥을 지원했지만, 통제강화를 위한 지나 친 행정적 개입이 불교계 내부의 갈등을 더욱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불교종단의 동 향과 직결되어 있었던 불교계 고등교육기관은 이런 갈등과 모순에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 던 것이다. ‘전문학교 인가’라는 총독부의 전폭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불교계 고등교육기관은 1930년대까지 사실상 기능정지의 상태에 가까웠던 것이다. 그런데 1940년 조계종으로 개편된 불교교단은 취약했던 중앙불교전문의 재정적 상황을 크게 개선하는 조치를 취하는 한편 당시 식민교육정책의 취지를 적극 수용하여 혜화전문학교를 확대 설립했다. 혜화전문에는 기존의 불교과(佛敎科)에서 더해, “만주국 및 支那에 이주하는 조선인을 지도할” 전문인력을 창출하는 흥아과(興亞科)가 설치되었는데, 초대 교장으로써 이러한 변화를 주도했던 이가 당시 경성제대 교수를 정년퇴직했던 다카하시 토오루(高橋亨)였다. 한편 기독계, 천도계에 비해 근대학교교육의 모색이 뒤처져 있었던 것은 유교계의 상황도 매한 가지였다. 식민지로 전락하기 이전, 서구의 영향 하에서 ‘유교적 대학’으로의 재편을 모색하기도 했던87) 成均館은 1911년 총독부에 의해 經學院으로 재편되었다. 애초 成均館이 지녔던 고등교 육의 기능은 소멸되었고, 공자와 성현의 제사, 즉 의례(ritual)의 기능만 남게 되었던 것이다.88) 조선총독부는 불교와 마찬가지로 유교가 조선통치를 위한 이데올로기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점은 자각했지만, ‘간이’와 ‘실용’라는 식민교육의 취지와는 어긋나기 때문에 고등교육 수준의 유 86) 1889-1954. 법관양성소 졸업. 보성전문 졸업. 광주지방법원 판사. 1910년 중국 망명. 1918년 귀국 이후 유학, 영문학을 공부. 87) 구한말 성균관의 대학모색과 좌절에 대해서는 馬越徹(1997)을 참조. 88) 경학원의 제도적 특징에 대해서는 정일균(2007), 「일제의 무단통치와 경학원」, 사회와 역사 76을 참조. 식민지조선의 종교계 사립전문과 ‘유교대학’ 구상 131 학교육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경학원을 중심으로 지방 유림집단의 회유와 감시에 초점을 맞추었다. 양반ㆍ유림집단은 항일무장투쟁을 지도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서구적 사상과는 조 화를 이루기 어려운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또 현실적 이해관계로 보았을 때는 일반민중과 합 치되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지역사회의 유력자로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추고 있었다.89) 이들을 식 민통치의 적극적 협력자로 만들기는 어렵겠지만, 저항자가 되지 않도록 회유해야겠다는 식민권력 의 기본방침이었다.90) 그런데 1930년대에 들어서면 經學院 내에 明倫學院이 설치되어 유교교육 기능이 부활되기에 이른다. 교육목표로는 “儒學에 관해서 敎授하고 더불어 人格을 陶冶”할 것이 규정되었고, 수업연 한 2년의 본과와 수업연한 1년의 연습과가 설치되었다. 더불어 명륜학원은 임시강습회를 개최하 기도 했다.91) 하지만 明倫學院은 기본적으로는 식민지교육체제에 편입된 학교교육기관이 아니라, 일반 사회교육기관의 성격이 강했다. 따라서 입학자들에게 학력제한을 요구하지 않았고, 졸업이 학력으로 인정되지도 않았다. 그래도 졸업생들은 대체로 明倫學院에 입학하기 이전에 일정한 學 歷을 소유한 듯이 보이며, 명륜학원을 수료한 이후에는 학교의 소개로 보통학교 교원이나 훈도, 관청의 촉탁으로 취직하기도 했다. 明倫學院의 조직체계도 기본적으로 ‘교장-교원-직원’으로 구 성되는 학교교육의 조직과는 달랐다. 經學院의 大提學이 명목상의 총재가 되었고, 그 밑에 실질 적인 교장역할을 하는 學監, 그리고 講師와 幹事가 있었다. 학교운영은 지역의 유림들 중에서 임 명된 평의회가 주도했다. 이후 明倫學院은 점차 교육기관으로서의 성격이 강화되는 양상을 보이 는데, 1936년 수업연한이 2년에서 3년으로 확대되었고, 공민과목이 증강되었다. 그리고 1939년 2월 명륜학원은 전문학교 수준의 교육기관을 지향하면서 明倫專門學院으로 전환되었고, 전문학 교의 요건을 충족시킨 1942년 2월 전문학교 인가를 받아 明倫專門學校가 공식 발족되었다. 기존 의 사회교육적 성격은 연구과가 계속 유지했던 반면, 本科는 ‘皇道儒學’을 근간으로 국민도덕의 정신을 공부하는 것을 교육목표로 설정했다.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혜화전문과 명륜전문은 불교와 유교를 표방한다는 점에서 종교계 전문 학교라는 식민지조선 사학들의 기본적인 특징을 공유했다. 하지만, 기존의 사학들이 대체로 보성 을 제외하면 기독교 계통이 대부분이었다는 사실에서 차별화되는데, 후발 전문학교인 이들 학교 가 일단은 조선인들이 설립주체가 되는 사학이면서도 동시에 기독교계 사학과는 다른 입장과 위 치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앞서 보았듯이 조선총독부의 종교정책 기조는 기본적으로 조선의 토착 89) 鄭圭永(1995), 「京城帝国大学に見る戦前日本の高等敎育と国家」, 동경대학박사논문, 137쪽. 90) 류미나(2007), 「식민지기 조선의 명륜학원」, 교육사학연구 17(1), 55쪽. 91) 「明倫學院規程」, 총독부령 13호, 1930년 2월 16일. 132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종교인 유교와 불교를 이용해서 기독교의 세력 확장을 막는 것이었다. 이에 총독부는 이들 종교 의 진흥에 우호적이었는데, 불교계의 사례가 잘 보여주듯이 이러한 ‘우호’정책은 오히려 종교계 내부의 모순을 격화시키고 자발적인 개선의 노력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기도 했다. 이들 학교들이 1930년대까지도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1930년 대 후반 들어 조선총독부가 이들 종교를 고등교육의 수준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동원하는데 열 의를 보이게 되자 사정이 달라졌다. 식민당국은 불교와 유교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더욱 강조하 였고, ‘官學의 擴張’이라는 차원에서 이들 학교를 전문학교로 개편했다. 지식생산의 독점으로서의 관학과 이에 대항하는 민족사학이라는 이항대립의 중간지대에 이들 학교가 위치 지워지게 되었 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전문학교라는 제도적 제약 속에서 잠복해 있었던 식민지 고등교육의 위계적 계층구조가 전면화 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5. 혜화전문ㆍ명륜전문과 다카하시 토오루의 유교대학 구상 이처럼 혜화전문과 명륜전문이 ‘관학의 확장’으로써 위치 지워지는 데 산파역할을 했던 인물이 바로 경성제대 법문학부의 교수를 역임했던 다카하시 토오루(高橋亨)였다. 1878년 출생한 다카하 시는 동경제대 문과대학 한학과(漢學科)를 졸업한 직후, 1905년 한성관립중학교 교사로 초빙되어 조선으로 건너왔다. 이후 경성고보, 대구고보의 교사를 역임하면서 조선총독부의 촉탁으로서 종 교조사와 도서조사를 수행했다. 다카하시는 개인적 연구를 병행해서 1919년 「조선의 교화(敎化) 와 교정(敎政)」이라는 논문을 동경제대 박사논문으로 제출했고, 이를 통해 조선의 문학과 사상, 종교 분야의 전문가로써 확고한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총독부 시학관을 역임했던 다카하시 는 1926년 경성제대가 설립되자 조선어조선어문학제1강좌의 교수로 취임했고 1939년 정년퇴임 을 한다.92) 그런데 그는 경성제대 교수로 있으면서도 1930년 명륜학원이 설립되자 명륜학원 강 사를 계속 겸임하였고, 평의원으로서 명륜학원의 운영에도 관여했다. 그리고 明倫專門學校가 1944년 明倫鍊成所로 개편되었을 때에는 經學院提學 겸 明倫鍊成所 所長으로써 자신이 주창했 던 황도유학의 보급을 적극적으로 주도했다. 다카하시의 인연은 명륜학원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는 경성제대 퇴임 직후인 1940년에는 혜화전문의 초대 교장이 되어 중앙불교 전문의 혜화전문 개편을 실질적으로 주도했었다. 공교롭게도 다카하시는 명륜전문과 혜화전문의 92) 다카하시 토루의 이력에 대해서는 「高橋亨先生年譜略」(朝鮮學報 14, 1959年), 1~13쪽 참조. 식민지조선의 종교계 사립전문과 ‘유교대학’ 구상 133 궤적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을까. 잘 알려져 있듯이, 다카하시는 1910년대 조선의 유림에 대한 실지조사와 사찰을 중심으로 진 행된 도서조사의 과정에서 조선의 유교와 불교가 “단순한 學術 이상으로 커다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93) 이후 조선유교와 조선불교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에 돌입했던 바 있다. 다카하시의 조선유교와 조선불교에 대한 관점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 성과가 나와 있기 때 문에 여기서 다시 요약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관점이 철저히 식민관료의 위치에 입각해 있었고 따라서 조선에서 적지 않은 세력을 가지고 있는 유교계와 불교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조선유학과 조선불교의 일본화를 추진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통해 기독교의 성장세를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지적94)은 음미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1919년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斎藤実)는 경성제대가 창설될 당시 조선의 제국대학 안에 유교의 교육과정을 설치하고 이를 통해 1911년 성균관의 폐지와 더불어 끊어진 조선의 유학전문교육을 부활시키겠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구체적인 계획 은 1926년 무렵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명륜학원의 구상」이라는 사이토의 자필각서에서 확인되 는데 다음과 같다. 거의 死物視되고 있는 儒林을 개선해서 世道人心에 유익하게 하려는 희망. 그 방법은 제국대학에서 斯界에 권위 있는 교수로 하여금 유림 청소년을 소집시켜 時世의 進運에 따르는 漢學, 기타 과목을 교습시키도록 함. (도지사의 면접에 의함. 반드시 유림에 한정지을 필요 없음) 形式은 경학원에서 대 학으로 위탁하는 것으로 한다.95) 즉, 각 도지사가 조선유림의 자제 중에서 매년 일정정도의 인원을 선발해서 경성제대의 한학관 련 교수의 지도를 받게 하며, 그 형식은 경학원에서 경성제대로 위탁시키는 교육 형태를 택한다 는 것이다. 그런데, 정규영(1995: 154-155)에 따르면, 이러한 구체적인 계획을 담당했던 이가 다 카하시였다. 그리고 이러한 구상이 제국대학의 규정 때문에 실현되기 어렵게 되자, 그 대신에 설 립한 것이 명륜학원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다카하시는 관학아카데미즘을 대표하는 제국대학과 유 교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경학원을 연결지어 관학아카데미즘의 확장을 꾀하려는 시도와 관련해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93) 高橋亨( 94) 鄭圭永(1995)의 논의는 이런 점에서 흥미로운 논점을 많이 담고 있다. 95) 斎藤実文書 (4)350 「明倫學院ノ構想」 134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다카하시가 조선불교를 볼 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이미 다카하시는 1920년 도太陽반에 기고한 「조선개조의 근본문제」라는 글에서 “불교가 再興해서 동양철학으로 대 학에서도 강의되고 그 교리가 널리 이해되면 이에 따라 점차 기독교의 교세도 급격히 하락하여 결국에는 부진한 상태”에 이를 것이라고 예측하고 이를 위해 경성에 “불교철학, 불교문학, 불교 문화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종교대학”을 설립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96) 그리고 이러한 구상 은 1940년 그가 혜화전문의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현실화되었다. 당시 총독부 학무국장인 시오하라(塩原時三郞)은 황국신민화 교육을 취지로 식민지교육에 대한 전면적 개편을 단행했는 데, 특히 불온사상의 온상이 되었던 고등교육기관에 대한 전면적인 ‘숙학(肅學)’에 주력했다. 시 오하라는 제국대학과 전문학교가 ‘학술적 지식의 생산-실용적 지식의 습득’의 기능적 분업관계를 넘어서 관학은 철저히 국가주의에 입각해서 이념적 토대를 창출하고 전문학교는 이런 이념적 기 초를 실제에 적용할 수 있는 전문 인재를 양성하는 방식으로 재구축될 필요가 있다고 보았던 것 같은데, 이는 1920년 당시부터 다카하시가 가져왔던 소신, 즉 종교대학이 “조선인의 敎化뿐만 아니라 東洋文化의 硏究에 대한 日本의 權威를 조선인에게 알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일본의 學 術에 敬服하게 하는 重大한 一施設이 될 것”97)이라는 지향과 합치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혜화전문과 명륜전문(=명륜학원)은 기독교계로 대표되는 ‘민족사학’의 도전에 관학의 확 장과 식민지 고등교육체계의 재위계화를 통해 대응하려는 시도 속에서 위치 지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관학의 확장과 관련해서는 실제로 경성제대로 대표되는 관학아카데미즘의 진출이 두드러 지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혜화전문(=중앙불교전문)은 경성제대의 현역교수였던 아카마스(赤松智 城; 종교학강좌교수), 아키바(秋葉隆; 사회학강좌교수), 오오타니(大谷勝眞; 동양사학제1강좌교수), 마츠즈키(松月秀雄; 교육학강좌교수), 이토(伊藤舜泰; 종교학강좌조교수)가 교수진을 구성하고 있 었고, 총독부 편수관 나카무라(中村榮孝)도 강사로 참여하고 있었다. 명륜학원에는 다카하시(高橋 亨)를 비롯하여 경성제대의 후지즈카(藤塚隣; 지나철학교수), 조수 가마즈카(鎌塚扶), 총독부 편수 관 후쿠시마(福島耀三)이 강사로 있었고, 명륜학원 총재였던 정만조와 경학원 부제학 어윤적은 경성제대 강사를 맡고 있었다. 이들 학교는 경성제대 졸업자 또는 조수들에게도 강의의 기회가 상당히 돌아갔다. 한기준, 배상하, 김태준, 조수 윤태동 등이 강사를 거쳤다. 당시 세간에는 대구 와 평양의 공립의전들은 경성제대 의학부 출신자들이 많이 진출해서 구설수에 올랐다.98) 혜화전 문과 명륜전문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경성제대 법문학부, 그 중에서도 문과계열의 96) 高橋亨(1920), 「朝鮮改造の根本問題」, 太陽 1920년 8월호. 97) 高橋亨(1920), 앞의 글. 98) 佐藤剛蔵, 「朝鮮醫育史(後篇)」, 185쪽. 식민지조선의 종교계 사립전문과 ‘유교대학’ 구상 135 확장이라는 측면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식민권력의 노골적인 재편의도에 대해서 이른바 ‘민족사학’들의 저항은 미미했다. 숭실 전문처럼 학교폐쇄를 결의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립전문은 전황이 급박하게 전환되는 상황에서 식민권력의 개입을 수용하면서 실질적으로 종속되어갔다. 세브란스의전이 1942년 아사 히의학전문학교로 명칭을 바꾼 것을 시작으로 1944년 연희전문은 경성공업경제전문학교로, 보성 전문은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전환되었다. 이화여전과 숙명여전은 1943년 아예 청년연성소지 도자양성과로 바뀌었다. 전문학교라는 제도적 제약 속에서 잠복해 있었던 식민지 고등교육의 위 계적 구조는 전쟁 말기 전면적인 종속구조로 바뀌어나갔던 것이다. 6. 나가며 전쟁 중에 폐지되었던 혜화전문과 명륜전문은 해방 후 얼마지 않아 부활했다. 조선불교 중앙총 무원은 1946년 6월 학교부활을 선포했고, 9월 미군정청으로부터 동국대학 승격이 인정되었다. 정규대학의 승격을 계기로 불교과, 문학과, 사학과가 개설되었고, 1947년 5월에는 정경학부(정치 학과, 법학과, 경제학과)가 설치되고 기존의 학과는 문학부로 재배치되었다. 명륜연성소로 바뀌었 던 명륜전문도 1945년 10월 부활했는데, 11월 전국유림대회의 결의에 따라 대학재단을 설립하고 1946년 8월 성균관대학 승격이 결정되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해방공간에서 동국대학과 성균관대학의 독특한 위치였다. 이들 대학은 설립 당시부터 경성제대를 비롯하여 제국대학 출신이 다수 교수와 강사로 포진해 있었다. 혜화전 문과 명륜전문이 관학의 확대였던 구도가 해방 이후의 공간에서도 그대로 연속해서 재현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제대출신의 교수들은 정치적 성향으로 보았을 때 좌익적인 성향이 강했다. 식민 지라는 억압적 공간 속에서도 제국대학은 선별된 엘리트들에게 사상적 자유를 허용하는 경향이 있었고, 그만큼 좌익적인 지식인들에게는 최소한의 방패막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식민말기 연안 행을 결행했던 경성제대 출신 마르크스주의자 김태준이 경찰의 취조를 겪으면서도 명륜학원 강 사라는 직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에피소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러한 방패막은 심지어 명 륜전문이나 혜화전문같이 확대된 관학의 공간에서도 부분적으로는 허용되었다. 이처럼 식민지 공 간에 존재했던 관학과 민족사학의 대립과 위계구조, 관학 내부에서 존재했던 이중적 성격은 해방 공간에서도 연속적으로 이어지지만, 식민이후 공간의 복합적인 대립구도 속에서 점차 다른 의미 와 역할을 획득해간다. 이런 변화의 궤적은 어떤 것이었으며, 어떤 변용을 통해 오늘날 한국의 대학사회를 구성해나가는가 하는 것은 향후의 과제로 남긴다. 식민지조선의 종교계 사립전문과 ‘유교대학’ 구상 137 《M E M O》 138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M E M O》 제2부 지정토론 139 제2부 지정토론 박규태 한양대학교 일본언어문화학과 서재길 국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조형근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140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M E M O》 제2부 지정토론 141 《M E M O》 142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M E M O》 종합토론 143 綜 合 討 論 ■ 司 會:徐禎完(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所長) ■ 討 論: 川瀬貴也(京都府立大 歴史学科) 姜 泰 雄 (光云大 東北亞文化産業學部) 許 洙 (翰林大 翰林科學院) 樋浦郷子 (帝京大) 金 泰 國 (延邊大 人文社會科學學院) 鄭 駿 永 (서울大 奎章閣) 諸 点 淑 (東西大 日本語學科) 金 正 仁 (春川敎大 社會敎育科) 朴 羊 信 (翰林大 日本學硏究所) 徐 禎 完 (翰林大 日本學硏究所,日本學科) 徐 在 吉 (國民大 國語國文學科) 宋 錫 源 (慶熙大 政治外交學科) 任 城 模 (延世大 史學科) 趙 亨 根 (翰林大 日本學硏究所) 洪 善 英 (翰林大 日本學硏究所) 趙 廷 祐 (翰林大 日本學硏究所) 朴 奎 泰 (漢陽大 日本言語文化學科) 144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M E M O》 종합토론 145 《M E M O》 146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M E M O》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2014 國際學術심포지엄 參加者 PROFILE (가나다順) 참가자 PROFILE 149 姓 名: 川瀬貴也 (KAWASE takaya) 現 職 : 京都府立大 文學部 歷史學科 敎授 學 歷 : 東京大学大学院人文社会系研究科 卒業 (宗教学·宗教史学専攻) 經 歷 : 日本宗教学会 常任委員 「宗教と社会」学会 常任委員 · 編輯委員 朝鮮史研究会 理事 韓国・朝鮮文化研究会 理事 等 歷任 著譯書 : 『植民地朝鮮の宗教と学知―帝国日本の眼差しの構築 (越境する近代)』 (青弓社, 2009) 『映画で学ぶ現代宗教』 (弘文堂, 2009) 『宗教と現代がわかる本』 (平凡社, 2010) 外 論 文 : 「韓国高等学校における宗教教育 : カトリック教科書を中心に」 (『宗教研究』日本宗教学会, 2008) 「東学の教え--「病気直し」と「内在する天」を中心に」 (アジア遊学 』第110号, 勉誠出版, 2008) 「「宗教人類学」と「宗教民族学」の成立過程 --赤松智城の学史的意義についての比較検討」 (季刊日本思想史』第72号, ぺりかん社, 2008), 外 e-mail : [email protected] 150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姓 名: 姜泰雄 (KANG Tae-Woong) 現 職 : 光云大學校 東北亞文化産業學部 副敎授 學 歷 : 東京大學 総合文化硏究科 (日本文化學 專攻) 經 歷 : 前 東京大學 外國人 客員硏究員 現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編輯委員 等 歷任 著譯書 : 가미카제 특공대(神風特攻隊)에서 우주전함 야마토까지(宇宙戦艦ヤマト) –戰後 日本의 戰爭映畵와 戰爭意識 (共著, 소명출판, 2013) 臺灣을 보는 눈 (共著, 創批, 2012) 複眼의 映像 : 나와 구로사와 아키라(黑澤 明) (譯書, 小花, 2012) *일본학연구소 일본학총서 日本과 東아시아 (共著, 東아시아硏究員, 2011) 키워드로 읽는 東아시아 (共著, 이매진, 2011) 外 多數 論 文 : 「優生學과 日本人의 表象 –1920~40年代 日本 優生學의 展開와 特徵-」 (日本學硏究, 檀國大學校 日本硏究所, 2013) 「滿洲開拓團 映畵 오히나타마을(大日向村)을 통해본 滿洲國의 表現空間」 (翰林日本學,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2012) 「歷史의 再現과 ‘歷史映畵’ 製作運動 –미조구치 겐지(溝口健二)의 <겐로쿠 츄신구라(元禄忠臣蔵)>를 中心으로-」 (翰林日本學,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2010) 「原爆映畵와 ‘被害者’로서의 日本」 (東北亞歷史論叢, 東北亞歷史財團, 2009) 「日本映畵 속의 ‘反戰映畵’ 내러티브 硏究 –히메유리(ひめゆり) 學徒隊의 映像化와 그 表象的 意味를 中心으로-」 (亞太硏究, 國際地域硏究院, 2009) 外 多數. e-mail : [email protected] 참가자 PROFILE 151 姓 名: 金正仁 (KIM jeong-in) 現 職 : 春川敎育大學校 社會敎育科 副敎授 學 歷 : 서울大學校 卒業 (韓國近代史 專攻) 經 歷 : 前 歷史問題硏究所 歷史硏究 編輯委員 前 韓國歷史硏究會 地域理事 現 歷史敎育硏究會 會員 等 歷任 著譯書 : 江原道史 8券 (共著, 江原道廳, 2013) 史學問題의 解法을 摸索한다 (共著, 實踐文學社, 2012) 未來를 여는 歷史 (共著, 한겨례出版, 2012) 知識의 現場 談論의 風景 (共著, 한길社, 2012) 獨島領有權 確立을 위한 硏究3 (共著, 嶺南大學校 獨島硏究所, 2011) 外 多數 論 文 : 「韓國史 歷史敎育의 市民化 徑路로서의 東아시아史」 (士林, 수선史學會, 2014) 「解放前後 民主主義‘들’의 變奏」 (槪念과 疏通, 翰林大學校 翰林科學院, 2013) 「民主主義의 눈으로 본 歷史學」 (歷史敎育, 歷史敎育硏究會, 2013) 「21世紀 아시아 太平洋 時代 友好協力과 共同繁榮을 위한 歷史敎育의 方向」 (歷史敎育, 歷史와敎育學會, 2013) 「近代 韓國 民主主義 文化의 傳統 樹立과 特徵」 (歷史와現實, 韓國歷史硏究會, 2013) 外 多數. e-mail : [email protected] 152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姓 名: 朴奎泰 (PARK kyu-tae) 現 職 : 漢陽大學校 國際文化大學 日本言語文化學科 學 歷 : 東京大學校 卒業 (宗敎學 專攻) 經 歷 : 前 韓國日本思想私學會 總務理事 前 漢陽日本學會 總務理事 現 韓國宗敎學會 涉外理事 等 歷任 著譯書 : 神話, 神話談論, 神話만들기 (著書, 모시는 사람들, 2013) 宗敎, 마음을 말하다 (著書, 共同體, 2013) 現代日本의 傳統文化 (著書, 博文社, 2012) 國學과 日本主義 : 日本 保守主義의 源流 (責任著者, 東北亞歷史財團, 2011) 日本 ‘國體’ 내셔널리즘의 元型 (共著, 東北亞歷史財團, 2011) 外 多數 論 文 : 「‘틈새’의 宗敎學과 想像의 詩學 : 素田學에 있어 宗敎, 文學, 藝術」 (宗敎文化批評, 韓國宗敎文化硏究所, 2013) 「姉崎正治와 宗敎學 : 近代日本 知識人에게 있어 宗敎와 國家」 (東아시아文化硏究, 漢陽大學校 東아시아文化硏究所, 2013) 「‘日本敎’와 섹슈얼리티 : 三島由紀雄, 天皇制, 에로티시즘」 (宗敎文化批評, 韓國宗敎文化硏究所, 2013) 「本居宣長의 모노노아와레論 再考 : 感傷的 認識論의 觀點에서」 (宗敎文化批評, 韓國宗敎文化硏究所, 2012) 「本居宣長의 古事記 神話 ‘읽기’와 ‘宣長問題’」 (日本歷史硏究, 日本史學會, 2012) 外 多數. e-mail : [email protected] 참가자 PROFILE 153 姓 名: 朴羊信 (PARK Yang-Shin) 現 職 :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硏究敎授 學 歷 : 北海道大学 卒業 (日本近代史 專攻) 經 歷 : 現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編輯委員 前 翰林大學校 翰林科學院 HK敎授 前 高麗大學校 東아시아硏究所 硏究敎授 等 歷任 著譯書 : 한 單語 事典 -文化-(驛書, 푸른歷史, 2013) 東아시아 槪念硏究 基礎文獻 解題 (共著, 翰林科學院, 2010) 陸羯南, 政治認識と對外論 (著書, 岩波書店, 2008) 開化期 在韓日本人 雜誌資料集1-2 (著書, 제이앤씨, 2005) 外 多數 論 文 : 「도고 미노루(東鄕實)의 植民政策論:農業植民論과 ‘非同化主義’」 (歷史敎育 第127輯 歷史敎育硏究會 2013) 「大正時期 日本ㆍ植民地 朝鮮의 民衆藝術論 : 로맹롤랑의 ‘帝國’橫斷」 (翰林日本學,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2013) 「近代 日本의 아나키즘 受用과 朝鮮으로서의 接續 : 크로포트킨 思想을 中心으로」 (日本歷史硏究 日本史學會 2012) 「近代日本, ‘進步’에서 ‘發展’으로 : 帝國主義 成立期의 歷史, 社會意識」 (翰林日本學,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2011) 「1930年代 日本의 ‘民族’槪念과 政治의 교착」 (韓日民族問題硏究, 韓日民族問題學會, 2010) 「日本의 戰後 民主主義와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歷史批評, 歷史批評社, 2009) 外 多數 e-mail : [email protected] 154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姓 名: 徐在吉 (SEO Jae-Kil) 現 職 : 國民大學校 國語國文學科 助敎授 學 歷 : 서울大學校 卒業 (韓國文學 專攻) 經 歷 : 前 서울大學校 奎章閣 韓國學硏究院 硏究敎授 (2009.02-2011.08) 前 中央大學校 國語國文學科 講師 (2008.09-2010.02) 前 弘益大學校 國語國文學科 講師 (2007.09-2011.08) 前 서울大學校 基礎敎育院 講義敎授 (2007.09-2009.09) 前 東京外國語大學 外國語學部 外國人硏究者 (2004.10-2006.03) 著譯書 : 大學이란 무엇인가』(譯書),(吉見 俊哉 著, 글항아리, 2014) 朝鮮사람의 朝鮮旅行(著書),(奎章閣韓國學硏究員 代表著者, 글항아리, 2012) 『라디오 體操의 誕生』(譯書),(黒田勇 著, 강, 2011) * 日本國際交流基金飜譯出版助成選定 『朝鮮 사람의 世界旅行』(編著),(글항아리, 2011) 『韓國放送의 社會文化史 : 日帝强占期부터 1980年代까지』(共著),(한울, 2011) *2012 大韓民國學術院 優秀學術圖書 選定. 『帝國의 地理學, 滿洲라는 境界』(共著),(東國大學校 出版部, 2011) 외 多數. 論 文 : 「進步的女性雜紙를 向한 志向과 挫折- 1930年代 女性 雜誌 女人」 (近代書誌, 近代書誌學會2012.12) 「安壽吉 長篇小說 <北鄕譜> 硏究」 (『現代文學의 硏究』 46号, 韓國文學硏究學會, 2012.02) 「植民地 末期의 媒體環境과 放送雜誌『放送之友』의 性格」 (『近代書誌』 3号,近代書誌學會, 2011.06) 「<禽獸會議錄>의 飜案에 관한 硏究 (『國語國文學』157号, 國語國文學會, 2011.04) 「强要된 協力, 分裂된 텍스트 : 日帝 末期 放送小說을 읽는 하나의 讀法」 (『民族文學史硏究』 45号, 民族文學史學會, 2011.04) “Dual Broadcasting and Diglossia in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Seoul Journal of Korean Studies, vol.23 no.2 외 多數. e-mail : [email protected] 참가자 PROFILE 155 姓 名: 徐禎完 (SUH Johng-Wan) 現 職 : 翰林大學校 日本學科 敎授, 日本學硏究所 所長 學 歷 : 筑波大学大學院 文藝言語硏究科 卒業 (日本中世藝能史 專攻) 經 歷 : 現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所長 現 韓國日本學會 副會長 現 韓國日本言語文化學會 副會長 前 立教大學 客員敎授, 法政大學 客員硏究員, 筑波大學 外國人硏究員 前 國際日本文化硏究Center 外國人硏究員 等 歷任 著譯書 : 韓國日本學會40年史 日本 硏究의 成果와 課題 (共著, 寶庫社, 2013) 植民地 帝國50年의 興亡(譯書, 小花, 2012) 帝國日本의 文化權力: 學知와 文化媒體(共著, 小花, 2011) 歌舞音樂略史(譯注書, 소명出版, 2011) 植民地朝鮮と帝国日本:民族,都市,文化(アジア遊學138P) (共著, 勉誠出版, 2010) 外 多數 論 文 : 「総力戦体制下における芸能統制:能楽における技芸者証とその意味を中心に」 (外國學硏究 第25輯 中央大學校 外國學硏究所 2013) 「伎樂」追跡考: ‘舞’에서‘樂’으로」 (翰林日本學 第 22輯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2013) 「1980年代 韓國日本學會 活動과 硏究成果」 (日本學報第91號, 韓國日本學會, 2012) 「植民地朝鮮における能ー京釜鐵道開通式における「國家藝能」能」 (アジア遊学138, 勉誠出版, 2010) 外 多數 e-mail : [email protected] 156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姓 名: 宋錫源 (SONG Seok-Won) 現 職 : 慶熙大學校 政經大學 政治外交學科 副敎授 學 歷 : 京都大学 法學硏究科 卒業 (日本政治·文化 專攻) 經 歷 : 現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運營委員 現 國際移住文化 포럼 事務總長 前 日本學術振興會(JSPS) 特別硏究員 等 歷任 著譯書 : 東아시아 近代 韓國人論의 地形,(소명出版, 2012) 日本 내셔널리즘 解讀, (그린비, 2011) 帝國日本의 文化權力: 學知와 文化媒體 (共編, 小花, 2011) 韓國 政治發展의 理解(共著), (知識마을, 2010) 暴力의 豫感(共譯), (冨山一郎 著, 그린비, 2009) 日本文化論의 系譜(大久保 喬樹 著, 小花, 2007) *일본학연구소 일본학총서 論壇의 戰後史(奥 武則 著, 小花, 2011) 外 多數. 論 文 : 「日本의 中國殘留 日本人=中國歸國者 支援 政策」 (韓國東北亞論叢, 韓國東北亞 學會, 2013.12) 「아베노믹스 1年의 評價와 韓國經濟」 (翰林日本學,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2013.12) 「朝鮮에서의 帝國 日本의 出版警察과 刊行物의 行政處分에 관한 硏究」 (日本硏究, 韓國外國語大學校 日本硏究所, 2012) 「文明의 外延化와 支配의 正當性 : 福澤諭吉를 中心으로」 (韓國東北亞論叢, 韓國東北亞學會, 2011) 外 多數. e-mail : [email protected] 참가자 PROFILE 157 姓 名: 任城模 (YIM Sung-Mo) 現 職 : 延世大學校 史學科 副敎授 學 歷 : 延世大學校 史學科 卒業 (日本近代史 專攻) 經 歷 : 現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運營委員 現 東洋史學會 硏究理事 現 現代日本學會 編輯委員 現 滿洲學會 硏究理事 前 韓日民族問題學會 硏究理事 等 歷任 著譯書 : 帝國日本의 文化權力 : 學知와 文化媒體 (共編, 小花, 2011) 帝國의 地理學, 滿洲라는 境界 (共著, 東國大學校出版部, 2010) 戰後 日本의 保守와 表象 (共著, 서울大學校出版文化院, 2010) 近代 滿洲 資料의 探索 (共著, 東北亞歷史財團, 2009) 帝國日本の再編と二つの「在日」-戰前, 戰後における在日朝鮮人と沖縄人- (共著,明石書店, 2010) 外 多數. 論 文 : 「冷戰期 日本 進步派 知識人의 韓國 認識 -『世界』의 北送・韓日會談 報道를 中心으로-」 (東北亞歷史論叢, 東北亞歷史財團, 2011) 「戰時期 日本 植民地政策學의 變容 : 民族・開發・地政學」 (帝國日本의 文化權力 : 學知와 文化媒體』, 小花, 2011) 「戰後 日本의 滿洲 記憶-그 背後와 回路-」 (日本批評, 서울大學校 日本硏究所. 2010) 「滿洲 農業移民 政策을 둘러싼 關東軍 朝鮮總督府의 對立과 그 歸結 -우가키(宇垣) 總督의 構想 및 活動과 關聯하여-」 (日本歷史硏究, 日本史學會, 2009) 外 多數. e-mail : [email protected] 158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姓 名: 鄭駿永 (JUNG Joon-young) 現 職 : 서울大學校 奎章閣韓國學硏究員 HK敎授 學 歷 : 서울大學校 社會學科 卒業 (社會學・歷史社會學 專攻) 經 歷 : 前 京都大學 敎育學硏究科 外國人共同硏究者 (日韓文化交流基金 招請Fellow, 2004.9-2005.8) 前 成均館大學校 講師 前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硏究敎授 等 歷任 著譯書 : 『植民權力과 京城帝國大學(共著), (서울大學校 出版部, 2010) 論 文 : 「京城帝國大學의 有産: 日本의 植民敎育體制와 韓國의 高等敎育」 (日本硏究論叢, 現代日本學會, 2011) 「植民地 帝國大學의 存在方式―京城帝大와 植民地의 '大學自治論'」 (歷史問題硏究, 「歷史問題硏究所」, 2011) 「同化의 裏面: 1910年代 植民地敎育體制의 形成과 헤게모니競爭」 (帝國日本의 文化權力 : 學知와 文化媒體』, 소화, 2011) 「植民地 敎育政策의 原點 : 伊沢修二의 同化主義와 聽覺的 近代性」 (精神文化硏究, 2011.06.) 「京城帝大における「大学自治」の試みとその限界」 (植民地朝鮮と帝国日本: 民族・都市・文化(アジア遊学), (勉誠出版, 2010) 「植民地 醫學敎育과 헤게모니 競爭」(社會와 歷史, 2010.03.) 「잊혀진 大學의 흩어진 文書庫 -京城帝大 關聯 資料의 特徵과 大學史 硏究-」 (日本學』, 東國大學校 日本學硏究所, 2010.05) 「1910年代 朝鮮總督府의 植民地 敎育政策과 미션스쿨 -中高等學校 敎育의 境遇-」 (社會와 歷史, 韓國社會史學會, 2006.12) 외 多數. e-mail : [email protected] 참가자 PROFILE 159 姓 名: 趙廷祐 (CHO Jung-Woo) 現 職 :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硏究敎授 學 歷 : 서울大學校 社會學科 卒業 (社會史/歷史社會學 專攻) 經 歷 : 現 韓國社會史學會 運營委員 前 東京大學 社會科學硏究所 客員硏究員 前 光云大學校 敎養學部 및 韓神大學校 社會學科 講師 等 歷任 著譯書 : 植民勸力과 近代知識 : 京城帝國大學 硏究 (共著, 서울大學校出版文化院, 2011) 論 文 : 「‘拓殖’이라는 비즈니스 : 植民地 國家企業으로서의 拓殖會社」 (‘東亞’트라우마 : 植民地/帝國의 境界와 脫境界의 경험들, 그린비, 2013) 「滿洲事變 前後 ‘拓殖’事業機構의 變化―東亞勸業(株)의 企業支配構造를 中心으로」 (社會와 歷史, 韓國社會史學會, 2011) 「民族國家 形成과 ‘歷史 만들기 : 民俗博物館의 設立과 展開를 中心으로」 (韓國學報, 一志社, 2002) e-mail : [email protected] 160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姓 名: 趙亨根 (CHO Hyung-Keun) 現 職 :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硏究敎授 學 歷 : 서울大學校 社會學科 卒業 (社會學 專攻) 經 歷 : 現 歷史批評 編輯委員 現 韓國社會史學會 編輯委員 前 서울大學校 奎章閣韓國學硏究院 先任硏究員 等 歷任 著譯書 : 朝鮮사람의 世界旅行 (共著, 글항아리, 2011) 韓日 歷史敎科書 敍述의 理念 (共著, 京仁文化史, 2010) 左右派事典 (共著, 위즈덤하우스, 2010) 植民地의 日常: 支配와 龜裂 (共著, 文化科學社, 2006) 近代性의 境界를 찾아서, (共著, 새길, 2007) 外 多數. 論 文 : 「植民地 大衆文化와 ‘朝鮮的인 것’의 辨證法 : 映畵와 大衆歌謠를 中心으로」 (社會와 歷史, 韓國社會史學會, 2013) 「植民權力의 植民地 再現戰略 : 朝鮮總督府 機關誌 朝鮮의 寫眞이미지를 中心으로」 (社會와 歷史, 韓國社會史學會, 2011) 「主體性의 觀點에서 본 日帝時期 場市의 葛藤」 (歷史와 現實, 歷史學會, 2009) 「批判과 屈折, 轉化 속의 韓國 植民地近代性論 : 構造, 主體, 經驗의 三角構圖를 中心으로」 (歷史學報, 2009) 「日帝의 公式醫療와 改新敎 宣敎醫療間 헤게모니 競爭과 그 社會的 效果」 (社會와 歷史, 韓國社會史學會, 2009) 外 多數. e-mail : [email protected] 참가자 PROFILE 161 姓 名: 諸点淑 (JE Jum-Suk) 現 職 : 東西大學校 日本語學科 助敎授 學 歷 : 立命館大學 卒業 (韓日關係史 專攻) 經 歷 : 前 東西大學校 日本語學科 專任講師 等 歷任 著譯書 : 植民地朝鮮と宗教 (共同, 三元社, 2013) 韓日 宗敎文化 交流의 最前線 (譯書, 人文社, 2011) 外 多數. 論 文 : 「開港期 朝鮮 日本佛敎의 宗敎活動에 關한 硏究 – 帝國史的 觀點에서 본 日本佛敎(淨土宗)의 東向-」 (比較日本學, 日本學國際比較硏究所, 2013) 「舊韓末 釜山地域 朝鮮語, 日本語 敎育의 展開 –異文化‘場’으로서의 敎育空間」 (日本近代硏究, 韓國日本近代學會, 2013) 「(特輯 : 宗敎와 景觀) 日本 天理敎의 宗敎觀 形成에 關한 考察」 (宗敎文化硏究, 宗敎와文化硏究所, 2012) 「植民地朝鮮における日本仏教の社会事業ー「植民地公共性」を手がかりにしてー」 (日本近代學硏究, 韓國日本近代學會, 2012) 「日本의 社會的企業에 關한 考察」 (日本近代學硏究, 韓國日本近代學會, 2012) 外 多數. e-mail : [email protected] 162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姓 名: 金泰國 (Jin Tai-Quo) 現 職 : 延邊大學校 人文社會科學學院 歷史學部 敎授 韓國高等敎育財團 ISEF 學者 서울大學校 奎章閣 韓國學硏究院 펠로우 客員硏究員 學 歷 : 國民大學校 國史學科 文學博士 (滿洲地域 韓人社會史 專攻) 經 歷 : 沿邊大學校 民族硏究所 硏究員 等 歷任 著書 : 『東北地區 “朝鮮人民會” 硏究』(黑龍江朝鮮民族出版社,2007) 『中國朝鮮族史料全集 歷史編 移住史 10卷 朝鮮族의 移住와 定着(8)』 (沿邊人民出版社, 2011.5) 『「间岛新报」标题索引』(香港亚洲出版社 , 2011.12) 『中國朝鮮族史料全集 新聞雜誌編 日文版 第1卷 全滿朝鮮人民會聯合會會報』 (沿邊人民出版社, 2011.5) 『中國朝鮮族史料全集 新聞雜誌編 日文版 第2卷 全滿朝鮮人民會聯合會會報』 (沿邊人民出版社, 2011.5) 『中國 朝鮮族 歷史 硏究 文獻 目錄』, 유니스토리, 2013, 外 論 文: 新興武官學校와 西間島 韓人社會의 支援과 役割, 韓國獨立運動史硏究, 第40輯, 獨立記念館 韓國獨立運動史硏究所, 2011.12 中國 朝鮮族 社會의 形成과 文化性格, 全北史學 第40號, 全北史學會, 2012.4 e-mail : [email protected] 참가자 PROFILE 163 姓 名: 洪善英 (HONG Seun-Young) 現 職 :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硏究敎授 學 歷 : 筑波大學 文藝言語硏究 博士 (韓日比較文學 專攻) 經 歷 : 前 忠南大學校 人文科學硏究所 專任硏究員 前 韓國航空大學校 專任硏究員 前 淸州大學校 및 世宗大學校 講師 等 歷任 著譯書 : 帝國日本의 文化權力 : 學知와 文化媒體 (共著, 小花, 2011) 現代日本戱曲集 4 (共譯, 韓日演劇交流協議會, 2010) 日本雜誌 모던日本과 朝鮮 1940 (共譯, 語文學社, 2009) 明治日本의 알몸을 훔쳐보다 - 프랑스 諷刺畵家 조루주비고가 본 近代日本- (共譯, 語文學社, 2008) 外 多數 論 文 : 「기쿠치 간(菊地 寛)<아버지 돌아오다>(1917)論 : 漂迫者의 歸還과 狂氣 (韓國日本語文學會, 日本語文學, 2013) 「戰時 藝術動員과 ‘國語劇’ : 1940年代 演劇競演大會 日本語參加作을 中心으로」 (日本文化硏究, 東아시아日本學會, 2013) 「總動員體制의 移動演劇과 프로파간다」 (帝國日本의 文化權力: 學知와 文化媒體, 소화, 2011) 「帝國의 文化領有와 外地巡行: 天勝一座의 <살로메> 景福宮 公演을 中心으로」 (日本近代學硏究, 韓國日本近代學會, 2011) 「기쿠치 간(菊池 寛)과 朝鮮藝術賞: 帝國의 藝術制度와 히에라르키」 (日本文化學報, 韓國日本文化學會, 2011) 「雑誌「モダン日本」と「朝鮮版」の組み合わせ、その齟齬」 (植民地朝鮮と帝国日本 :民族・都市・文化 (アジア遊学138), 勉誠出版, 2010) 外 多數. e-mail : [email protected] 164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4 국제학술심포지엄 姓 名: 許 洙 (HUR soo) 現 職 : 翰林大學校 翰林科學院 HK敎授 學 歷 : 서울大學校 國史學科 卒業 (韓國近代思想史 專攻) 經 歷 : 現 韓國獨立運動史硏究所 非常任運營委員 現 槪念과 疏通 編輯委員 前 同德女子大學校 硏究敎授 等 歷任 著譯書 : 槪念史 認識의 두 視點 (著書, 翰林科學院, 2013) 民衆史를 다시말한다 (著書, 歷史問題硏究所 民衆史班, 2013) 中學校 歷史2 (共著, (株)金星出版社, 2013) 東아시아 槪念硏究 基礎文獻解題Ⅱ (著書, 翰林科學院, 2013) 外 多數 論 文 : 「20世紀 初 韓國의 平和論」 (歷史批評, 歷史批評社, 2014) 「敎祖申寃運動記 東學敎團과 政府간의 談論鬪爭 –儒敎적 側面을 中心으로-」 (韓國近代史硏究, 韓國近現代私學會, 2013) 「解放 후 義菴 孫秉熙에 대한 社會的 記憶의 變遷」 (大東文化硏究, 大東文化硏究員, 2013) 「硏究動向 : 韓國槪念史硏究의 現況과 展望」 (歷史와 現實, 韓國歷史硏究會, 2012) 「東學·天道敎에서 ‘天’ 槪念의 展開」 (槪念과 疏通, 翰林科學院, 2012) 「1920~30年代 植民地 知識人의 ‘大衆’ 認識」 (歷史와 現實, 韓國歷史硏究會, 2010) 外 多數. e-mail : [email protected] 참가자 PROFILE 165 姓 名: 樋浦郷子 (HIURA Satoko) 現 職 : 帝京大学 理工学部 敎授 學 歷 : 京都大学大学院 教育学研究科 (敎育學專攻) 經 歷 : 前 新潟県立両津高等学校 教諭 前 太成学院大学非常勤 講師 等 歷任 著譯書 : 『神社・学校・植民地 逆機能する朝鮮支配』 (京都大学 学術出版会, 2013) 外 論 文 : 「近代の神職高松四郎の研究―日光東照宮時代―」 (『教育史フォーラム』第8号, 教育史フォーラム, 2013) 「國分麻里著『植民地期朝鮮の歴史教育「朝鮮事歴」の教授をめぐって』」 (教育史フォーラム』第7号, 教育史フォーラム, 2012) *書評 「植民地期朝鮮の学校における儀礼空間の形成―神宮大麻の位置づけに着目して―」 (日本教育史研究』第30号, 日本教育史研究会, 2011) 「1930年代朝鮮の神祠設立―地域社会と学校をめぐって―」 (教育史フォーラム 第6号, 教育史フォーラム, 2011) 「一九三〇年代後半の朝鮮神宮における夏季早朝参拝」 (朝鮮学報』215号, 朝鮮学会,2011) 外 e-mail :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