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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한: 식민지화과정에보이는 일본인의조선양반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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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한: 식민지화과정에보이는 일본인의조선양반표상
료한: 식민지화 과정에 보이는 일본인의 조선 양반 표상양식에 관한 지식인류학적 연구 ∙85
연구논문∙한국문화인류학 39-2:85~126(2006) 한국문화인류학회
〈주요 개념〉
:일본식민주의, 양반, 전통의 재창조, 타자성, 문화의 감사
료한: 식민지화 과정에 보이는
일본인의 조선 양반 표상양식에 관한 지식인류학적 연구1)
오타 심페이(太田心平)*
“우리를 보고 지방 양반보다 밑이라거나 이런 게 양반이 아니라는 사람이
있어도 뭐 그런 건 신경 안 써. 근데 그런 사람들이 이렇게 많아진 건 정말 곤
란한 일이다.”
“서울과 안동이 완전히 역전돼 버린 거야. 양반의 위계가.”
“진짜 우리 집만큼 양반 중 양반이었던 집은 따로 없다고 하는데 안동 양
반처럼 일찍부터 알려져 있었으면 조금 더 우리 집 전통에도 자존심을 가질
수 있을 텐데. 서울의 양반 명가는 이제 그렇게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아마
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거야.”
* 일본 오사카대학교 인간과학대학원 특임조수
1) 이 논문은 일본 정부의 과학연구비등보조금(특별연구원창례비)(과제번호16∙7704)
을 2004년 4월부터 2006년 3월까지 받아 실시한 개인연구의 중간보고물 중 하나다.
연구자는 심사위원들로부터 이 논문의 완성도를 높여 준 중요한 지적을 여러 차례
받았다. 아울러 작성단계에서는 논문의 일부를 일본문화인류학회 제40회 연구대회
와 조선사연구회 간사이 지구 2006년 6월 예회에서 발표하였고 각 참석자들로부터
중요한 지적들을 받았다. 모든 관계자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86∙한국문화인류학 39-2(2006)
앞에서 소개한 구술은 저자가 조사지역으로 하고 있는 서울 근교의 한
료한: 식민지화 과정에 보이는 일본인의 조선 양반 표상양식에 관한 지식인류학적 연구 ∙87
1. 문화표상과 카스텀 연구
마을에서 사족 종갓집 출신자들이 입에 달고 사는 것처럼 자주 말하는 내
용이다. 이러한 구술을 통해서 우리는 서울의 사족층과 지방의 사족 간의
‘문화표상’
(representation of culture)의 제반 문제에 관한 논의는 1980년대
우열관계가 조선 시대와 현대 사이에‘역전’
되고 말았다는 이 가족의 의
중반부터 인류학자들 사이에서 특히 활성화되었다. 그 가운데에도 인류
식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런‘역전’
의식이 현재 한국 사회 전체를 대표
학자를 포함한 문화표상의 전문가들이 문화를 기술한다는 행위에 관한
하는 것도 아니며, 또 비슷한 상황에 있는 모든 사족 출신자들을 대표한다
논의로서는『문화를 쓴다』
(Clifford and Marcus 1986)『문화와
,
진리』
(Rosaldo
고도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이 가족이 이러한 사고를 가
(Spencer 1989) 등이 유명하다. 이들이
1989),“글의 일종으로서의 인류학”
지게 된 경위는 한국 사회가 겪어 온 궤적의 한 측면을 여실히 보여 주고
대표하는 인류학자의 문화표상 양식 논의는 때로‘메타인류학’
(meta-
있다.
anthropology)이라고 불리며, 역사학이나 문학 등 기타 학문들, 그리고‘식
‘양반’
이 어떠한 사람인지에 대한 기술, 즉‘양반’
의 표상은, 예컨대 박
민주의와 인류학’
이나‘포스트모던 인류학’
이라고 불리는 분야의 논의들,
지원의‘양반전’
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미 근세에 만들어져 있었다. 또
즉‘문화의 정치학’
(politics of culture, Feinberg 1995: 92)과도 논의의 폭을 공
한 각종 마당극에 등장하는‘양반’
에게 어느 정도 공통된 극중 인격이 부
유해 왔다. 이러한 주제들은 현재까지도 활발한 논쟁거리가 되고 있으며,
여된 점에서 알 수 있듯이,‘양반’
의 이미지는 근대 이전의 사회에 이미 어
최근에는 한국 연구분야에서도 활발해진 것으로 보인다(全 1999; 崔 2000;
느 정도 고정화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양반’
의정
최석영 2001; 南 2001; 전경수 2002a, 2002b).
의로 삼는 것과 더불어 현대사회에 유통되는‘양반’
에 관한 제반의 구체
적 지식들은 이러한 근대 이전의 기술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양반’
의 정의가 탄생하고‘양반’
에 관한 지식이 일반인들 사이에 유통
된 것은 20세기 초 일본인들이 각종 매체로 한국을 표상하기 시작한 이후
한편 일반인들이 특정 집단이나 문화요소를 표상하는 양상도 그것 자
체가 하나의 문화적 행위라 할 수 있으며, 이를 다루는 연구는 인류학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구체적인 예는 생략하겠지만, 담론분석이라는 방법을
활용하는 연구가 많다는 점을 언급해 두고자 한다.
의 일이었다. 이 논문은 주로 20세기 일본에서 출판된 각종 글을 바탕으
위의 두 가지 연구영역 모두를 아우른 것이 오세아니아 지역을 중심 대
로 일본어로‘료한’
(�班)이라고 불리는 존재 또는 개념이 한국 문화의 중
상으로 한‘카스텀 연구’
(kastom studies)이다. 오세아니아, 특히 멜라네시아
요 어휘로 일본인들 사이에 자리 잡게 되는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위에서
에서 사람들은‘카스텀’
(kastom, kastam, kastomu < custom)이라는 피진으로
‘역전’
이라고 한 현상이 일어난 한 경위와 그것에 포함되던 문화표상의
서양 문화가 침투하기 전의 전통이나 관습을 표현한다. 키징과 그의 동료
각종 문제를 논하고자 하는 것이다.
들은 이 카스텀이 재창조된 것이며, 독립 이후 포스트 콜로니얼 상황에 있
는 현지 사람들, 특히 운동의 지도자들 등이 카스텀이라는 말로 문화표상
을 할 때 정치적 맥락이 포함된다는 점을 밝힌 바 있다(Keesing and
Tonkinson 1982). 이를 시작으로 오세아니아 연구자들 사이에서는‘진정한
(authentic) 문화’
와 그렇지 않은 것과를 구별하고자 하는 조류가 생겼다
88∙한국문화인류학 39-2(2006)
료한: 식민지화 과정에 보이는 일본인의 조선 양반 표상양식에 관한 지식인류학적 연구 ∙89
(Philibert 1986; Babadzan 1988; Keesing 1989). 이에 대해 하와이 원주민 출신
각 그 소유자가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바누아투의 각 카스텀에는 원래
의 트라스크는 키징을 비롯한 백인 연구자들이 자신들의 학설을 통해 실
‘카스텀 오나’
(kastom ona < custom owner)라고 불리는 담당자가 있고, 그 카
질적으로는 원주민운동을 억제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Trask 1991).
그러나 키징이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그가 비판하고자 했던 것은 원
스텀의 내용을 알고자 하는 이는 미리 담당자에게서 적절한 형식으로 합
의를 받아놓아야 한다(白川 2005: 69).
주민운동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전통적 삶을 사는 오세아니아의 가난한
또 동부 인도네시아에 사는 엔데(Ende) 사람들 사이에서는 지식의 전달
사람들을 지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서양화된 생활을 즐기는 현지의
이 소유권의 전달을 의미하며, 그 전달은 인류학적인 의미의 교환관계로
엘리트들이었다고 한다(Keesing 1991).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라스크의 비
분석할 수 있다고 한다(中川 1989). 그러나 스트래선 등의 최근 연구에 따
판이 던진 파문은 간단히 진정되지 않았다. 문화인류학자들의 문화표상
르면 현대사회에서는 전통적 지식을 포함한 지식체계 전체의 정당적 소
은 연구자가 아닌 사람들, 즉 각기 다른 관심사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사
유자가 서구인이나 엘리트들에 한정되고, 일반인들이 하는 문화표상은
람들에게 필자의 의도와 전혀 다른 뜻으로 수용될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그 소유자들로부터 마치 회계감사(auditing) 같은 일종의 승인을 받는 것이
는 지적들(Linnekin 1991; Tonkinson 1993, 白川 2005: 20에서 재인용) 이 등장
바람직하게 여겨지게 되었다고 한다(Strathern 2000). 한편으로 이러한 전문
하였고, 원래 트라스크의 의도는 문화인류학자를 비롯한 전문가들이 문
가들의 지적은 실제 사회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화표상의 권리를 독점하고 있다는 것을 규탄하는 데에 있었다는 주장
다른 측면에서 볼 때 지식 유통의 권리를 가진 자로서의 전문가들을 논하
(Friedman 1992) 또한 등장하였다. 나아가 카스텀 연구에서는 서발턴 연구
는 동향에는 카스텀 연구가 빠져 있는 이원론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지기
(subaltern studies)에 다가가고자 하는 경향도 생겨났다(吉岡 2001: 180).
도 한다.
다만 이들의 연구는 지배와 비-지배(被支配)라는 구도에 집중한 나머
카스텀 연구의 흐름 가운데에서는 이원론을 고집하는 연구와 이원론으
지 서구인과 현지인, 표상자와 대상자, 혹은 엘리트와 서발턴이라는 이원
로 환원할 수 없는 복잡한 현실을 고려에 넣어야 한다는 연구 사이에 괴
론적 지배구조만 철저히 고집하고 말았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グハ
리가 생기고 있다. 그러한 괴리와 관련하여 두 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2)
1998a, 1998b).
특히 일반인들이 문화에 대해 가지고 있는 담론 및 인식과 연구자들이 하
이 이원론으로의 집착은 최근의 연구동향에도 적지 않게 계승되었다.
는 문화표상이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를 논의하는 시야가 충분치 않다는
오세아니아와 동남아시아에서 전통적 지식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에는 각
것이다. 현재 볼 수 있는 관습이 과거의 식민지화 과정에서 창조된 것임을
논하는 사례보고(Thomas 1989, 1992)에서도 관습의 창조에 가담했다고 비
2) 원래 서발턴 연구의 제일인자 중 한 명인 구하(Ranajit Guha)는 서발턴이라는 말을
“남아시아 사회에서 계층, 카스트, 연령, 성별, 직업, 또는 기타 어떤 말로 표현되든 민
중이 종속하는 상황을 가리키는 일반적 단어로 사용하겠다”
(グハ 1998a: 3)라고 하
면서 한편으로는 같은 서발턴을“인도 인구 전체에서‘엘리트’
라고 정의되는 사람들
을 제외한 잔여”
라고도 규정하고 있다(グハ 1998b: 22-23). 즉 서발턴은 원래 엘리트
의 대칭 개념을 뜻하는 것이다.
판되는 것은 언제나‘경제, 행정, 포교활동’
(バランディエ 1983: 27)이라는 정
식화된 에이전시(agency)뿐이며, 문화표상의 전문가들의 활동은 항상 이
세 가지 식민주의 세력들이 만들어 낸 시대적 배경 속에서만 논의 대상이
되었다.
실제로 엘리트라고도 서발턴이라고도 말하기 힘든 중간자들 중에 세칭
90∙한국문화인류학 39-2(2006)
‘글쟁이’
라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경우가 있다. 많은 카스텀 연구자들이 지
료한: 식민지화 과정에 보이는 일본인의 조선 양반 표상양식에 관한 지식인류학적 연구 ∙91
2. 료한 표상의 계보
적하는 대로 만약 문화가‘지식의 체계’
(Keesing 1979: 15)이며, 시간과 공간
을 넘어 문화를 전달하는 지식 그 자체의 제반 문제를 고민해 보는 것—
1) 료한 표상 전야
‘지식인류학’
(anthropology of knowledge) — 이 중요하다(Crick 1982: 287-288;
Barth 1989)면, 우리는 사회에서 지식이 유통되는 데 큰 역할을 하는‘글쟁
이’
들의 문화표상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카스텀 연구에서 영향을 받으면서도 지식인류학 안에서 약간이나마 다
른 접근법을 제시하는 것이 일부 오키나와 연구자들과 중국 연구자들이
19세기 말 일본에서는 잡지 등 각종 매체가 급속히 성장하여 사람들의
3)
지식을 점차 밖으로 확대시켰다. 한국에 관한 지식도 그중 하나이다. 단,
이 시기에 일본에서 유통하던 한국 관련 지식들은 그 내용과 성격이 몇
번씩 바뀌었다.
제창하는‘민속지식론’
이다. 이 말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와타나베 요시
1880년대까지 한국에 관한 논의 및 지식에는 매우 큰 다양성이 있었지
오(渡邊欣雄)는 엘리트와 서발턴이라는 기존 분류를 적용하기 전에 전통
만 1890년대 중반에 들어가며 한국 표상이 획일화된 길을 가게 되었다(上
적 지식이 현지사회에서 불평등하게 분배되어 있다는 점에 착안, 일반인
垣外 1994; 中根 2004). 어떠한 한국 표상을 볼 수 있는지에 관하여 한 문학
들 사이에도 지식의 소유 상황이 중층적임을 밝혔다. 그에 따르면, 모든
자가 보여 주는 잡지기사를 여기에 소개하겠다.
것을 안다‘
( 全知’
), 부분적으로 안다‘
( 部知’
), 전혀 모른다‘
( 無知’
), 다르게 알
고 있다‘
( 僞知’
)라는 분류가 현지 사람들 사이에 가능하다고 한다. 와타나
(조선인의-인용자 주석) 성격은 귀족도 평민도 한결같이 게으르고 시중에
베 본인, 그리고 그의 생각을 수정하면서 발전시키고자 한 오다 마코토(小
는 긴 담뱃대를 입에 물고 길을 다니는 이들이 많다. 시골의 농부는 모자와 버
가‘전지’
에 변화될 수도 있다는 점도 아울러 지적하고 있다
田亮)는‘위지’
선을 신은 채로 농사짓는다. 간혹 돈을 벌기도 하지만 그것을 모아두지 않고
(渡邊 1986, 1990; 小田 1987). 이 입장은 지식의 소유 상황이 카스텀 연구가
곧 낭비해서 평생 눈앞의 안건에 쫓기고 있다(米山人 1894).
4)
상정하는 것보다 더 다원적으로 다루어져야 함을 보여 주며, 지식과 그 유
통에 관한 동적 변화를 파악하는 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하에서는 이러한 지식인류학의 교훈들에서 힌트를 찾으면서‘양반’
이 시기 이후 한국 표상에서 자주 나오게 된‘게으름’
과‘긴 담뱃대’
라
는 두 가지 키워드는 후일의‘조선 정체론’
으로 이어졌다고 한다(中根
에 관한 지식 유통의 초기 과정을 밝힘으로써 그‘역전’
이 어떻게 이루어
졌는지를 우선적으로 논해 보고자 한다.
3) 예컨대 1895년에 창간된 백과잡지『太陽』
(Taiyo)는 1890년대에 이미 실제 판매수로
7~10만 부를 자랑하며 일본 대중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또『中央公
(Chuokoron)은 교토에 있는 한 절에서 생긴 어떤 조직집단의 회보로서 창간되었
論』
으면서도 1910년대부터는 전국적으로‘지식인의 필독잡지’
라는 평까지 받게 되었다
(永嶺 1997: 150-152).
4)�性質は貴族も平民もをしなべて怠惰にして市中長煙管を口にし街頭を行くもの多く田
舍の農夫は冠帽を頂き足袋を穿てるま 耕作せりたまたま錢を得ることあるも更に之を
.
貯ふるなく忽ち濫費して終生目前の計に逐はる なり�
92∙한국문화인류학 39-2(2006)
료한: 식민지화 과정에 보이는 일본인의 조선 양반 표상양식에 관한 지식인류학적 연구 ∙93
2004). 저자가 확인한 다음과 같은 글도 이 주장에 정당성을 주고 있다.
8)
개성을 가진 존재로 묘사되었던 한국인에 대한 표상은 양과 질 모두 크
게 변하였다. 기존 연구(姜 1984; 中塚 1993; 南 2002)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
명치 27년(1894년-인용자 주석) 왕궁의 사변 때에도, 가까운 이야기로는
작년에 경운궁이 불에 탔을 때에도, 경성 인민은 궁 밖에 모여 예의 그 긴 담
는 대로 이후 한국인에 대한 표상은 균질적이고 부정적인 단어의 나열로
변해 갔다. 이른바‘조센진’
인식의 탄생이었다.
뱃대로 담배를 피우면서 다 재미있게 수다를 떨고 구경하고 있었다(僉刃道人
5)
1905: 40).
2) 명문 재경사족층으로서의 료한
한국 문화에 대한 균질적 인식은 점차 다음과 같은 견해에도 연결되었다.
한편 1900년대에 들어오자 이전에“조센진은~”
이라는 기술양식으로
한국 사람들을 균질적으로 다루는 것과는 다른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났
세상은 문명의 길을 갈수록 복잡해지고 야만이나 미개의 상태일수록 모든
다. 일부 한국 사람들로 대상을 한정지은 표상이 널리 유통되기 시작한 것
것이 단순하다. 한국에서는 모든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단순하다는 것은 놀라
이다. 그 대표적인 표상 대상이 위에서 소개한 잡지기사에서‘귀족’
이라고
운 일이다. 먼저 두세 개만 예를 들어보자.
불렸던 료한이었다.
(의복) 귀한 자도 천한 자도 높은 자도 낮은 자도 남녀노소에 관계없이 다
6)
백의를 입고, 그 위에 이는 춘하추동 모두 마찬가지이다(增田 1905: 73). (밑
줄: 인용자)
고려 이후 반도의 정권은 귀족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굳이 말하자
면 귀족정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반도의 귀족들은 다른 여러 나라의 귀족
들과 달리 소위 관료집단의 총칭일 뿐이며 개별 귀족들은 매우 혼란스럽게 움
이러한 표상을 세상에 발표한 일본인들은 방문이 가능해진 이후 한국
을 드나들기 시작한 일반인들이었다. 이 시기 일본에서는 내한 경험자 중
직이고 있었다. 따라서 반도의 귀족은 통상적인 귀족과 동일하지 않다. 반도의
백성들이 �斑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이 관료집단을 지칭하는 것으로 오히
려 �斑정치 혹은 관료정치라고 말하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匿名 1907:
에‘조선통’
, 즉 한국에 정통한 인물을 자칭하는 자까지 등장하였고 한국
에 관한 지식이 사회에 전반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이전에
7)
는 일부에서‘예의의 나라’
로 소문나거나, 또는 일본인과 똑같은 감정과
5)「明治二十七年(1894年 — 引用註)の王宮の事變の時も�
近くは去年慶雲宮燒亡の時も�
京城の人民は宮外に集つて�例の長煙管で煙草を喫しながら�皆面白さうに談し合つて
.
見物して居た」
6)「世は文明に赴くに從ひ�雜となるが�野蠻未開程總てが單純である�韓國では萬事萬
端皆單純なるには一驚を喫する�先づ其二三を擧げて見やう
(衣服) 貴賤上下老幼 男女を問はず皆白衣で�而かも春夏秋冬を通じて同一である」
.
7) 에도 시대에 스스로 조선으로 건너가 인간관계를 구축하면서 역사와 지리를 배우고
그에 대한 다수의 책을 남긴 아메노모리 호슈(雨森 芳洲: 1668-1755)의 말에 따르면
“일본인들은 조선국을 예의의 나라라고 하거나 약한 나라라고 말하곤 하는데 이러
한 인식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라는 기록을 남겼다.
「朝鮮國を禮義の國と申�又は弱國なりと日本人の申習し候に心得違ひ有之候歟と被
.
存候」
8) 에도 시대의 문학 중에는 조선 사람을 등장인물로 한 것도 간혹 있다. 그러나 인형극
와『天竺德兵衛鄕鏡』
에 등장하는 조선 사람들이 각각 개성을 가지
『山城之國畜生塚』
고 (묘한 요술을 쓰는 경우가 있는 것을 제외하면) 일본인과 전혀 다른 바 없는 정서
를 지닌 인물로 묘사된 점에서 알 수 있듯이 그 당시의 표상은 근대 이후의 한국 표
상과 연계성이 매우 희박하다.
94∙한국문화인류학 39-2(2006)
9)
12). (밑줄: 인용자)
료한: 식민지화 과정에 보이는 일본인의 조선 양반 표상양식에 관한 지식인류학적 연구 ∙95
뿐만 아니라 지방의 읍장, 면장 내지 군수 등 저변의 관리와 같은 소위 이
반(�班)이라는 것들도 최근에 들어 또 일반적으로 료한이라고 불리는 경우
한국의 사회제도에서 최상급인 료한은 관리로서의 특권을 가진 자(鮎貝
10)
가 나오고 있다(空蕩
12)
1910: 90).
당시(1876년-인용자 주석) 한국은 오직 벌족들의 이해와 이조 휴척(休戚)
1909: 27)
을 바탕에 둔 왕실을 1급으로 하고, 외척으로서의 권위를 이용하거나 혹은 붕
당이 서로 경합하며 문중의 번영을 추구하고자 하는 호족을 2급으로 하고, 그
조선 시대의 문과급제자 중 대다수는 소수의 저명한 출계집단에 속하
13)
리고 외방 세력을 3급으로 하고… (생략) (匿名 1904)
고 각 종족 분파 가운데에서도 특정 가계만이 왕조의 사회적, 정치적 중심
에서 위계를 자랑하고 있었다(도이힐러 2003: 24). 말하자면 같은 사족층 중
이러한 기사를 읽는 한 당시 일본인들은 재지사족층이 지극히 드물다
에서도 관직을 역임하는 명가 재경사족층은 구별되는 존재였던 것이다.
고 인식했었다. 또 재지사족층은 이반과 혼동되는 경우까지 있었으며, 왕
위와 같은 사실을 고려해 보면 당시 일본인들에게 료한은 이 명문 재경사
실 다음으로‘2급’
에 위치하는‘韓王의 좌우’
와는 엄밀히 구별되고 있었
족층이라는‘외연적 의미’
(denotation)로 이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음을 알 수 있다. 1900년대까지 잡지기사에 재지사족층에 관한 기술을 찾
당시 일본인들이 재지사족층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부족했다는 사실은
이를 간접적으로 반증해 준다. 다음 기술을 보도록 하자.
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인데, 이상의 자료들을 참고하면 당시 일본인들은
재지사족층의 존재를 거의 모르거나, 적어도 무관심했다고 결론짓는 것
이 타당하다.
뼈대 있는 집안의 후손들과 지방에 있는 자들이 다시금 음모하여 권세를
잡고자 했으나 일본이 권세를 잡음에 따라 질서가 정돈되었기에 이제는 제대
3) 처분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료한
로 음모할 여지가 없어졌다. 그들이 다시 권세를 잡을 희망이 완전히 사라졌
기에 일본의 보호를 벗어날 생각으로 韓王의 좌우와 서로 뜻을 함께 하여 지
방의 儒流(지극히 드묾) 및 우민들을 선동하며 각지에서 봉기시키고자 할 뿐
명문 재경사족층으로서 정의된 료한은 어떠한‘내포적 색깔’
(conno-
11)
(XY生 1906). (밑줄: 인용자)
9)「高麗朝以來半島の政權は貴族の掌握する所也�故に貴族政治といふを妨げずといへ
ども�半島の貴族は他の列國の貴族と異り�所謂官僚團の總稱にして其分子頗る混亂
するが故に�普通に謂ふ所の貴族と同じからず�半島民の稱して�斑と唱ふるもの�
卽はち此官僚團を指すものなるを以て�寧ろ�斑政治�若くは官僚政治といふの適切
.
なるに如かず」
. 참고로 필자
10)「韓國の社會制度として最上級なる�班は官吏たるの特權を有するもの」
아유카이 후사노신은 국문학자로서 유명한 오치아이 나오후미(�合直文)의 동생이
고 경성에 이주하고 1894년부터 일본어학교를 운영하던 인물이다.
11)「勢家權門の遺族にして地方にあるもの�また陰謀詭計を以て權勢を執らんとするも�
日本の權勢加はるに隋つて秩序整頓するを以て�陰謀詭計を用ゆるの餘地あらず�再
び權勢を執るの望み全く絶ゆべきを以て�共に日本の保護を排せんと欲して韓王の左
右と相呼應し�地方の儒流(極めて稀なり)及び愚民を煽動して所在に蜂起せしめんと
.
するのみ」
12)「而已ならず地方に於ける邑長面長乃至郡主事等の小役人の如き所謂吏班なるものも
.
近時に至り又一般に�班と稱せられつ あり」
13)「黨時の韓國は�唯だ閥族の利害と李朝の休戚とを念とせる王室を第一級とし�外戚
の權威を利用し�若しくは朋黨相比周して偏へに一門一族の繁榮を求めむとする豪族
.
を第二級とし�而して外邦の勢力を第三級とし�(後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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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한: 식민지화 과정에 보이는 일본인의 조선 양반 표상양식에 관한 지식인류학적 연구 ∙97
tation)을 지녔을까?
당시 정치가로서 국정을 담당하던 오쿠마 시게노부(大�重信)도 료한을
‘귀족들과 한국 정부에 따르는 관리들’
이라고 정의하고 그 처분에 적극적
한국의 료한 이상(以上)은 매우 어처구니없는 어리석은 놈들이다. (생략)
인 자세를 보였다(大� 1910: 12). 그렇지만 대대로 관리직을 역임하던 명
모두 다 료한 이상의 죄다. 따라서 한국의 창생을 구하고자 한다면 인도적으
문 재경사족층이 처분 대상이 된 데에 비하여 재지사족층에 관한 언급은
로 이들 료한 이상이라는 악폐를 척결함으로써 한국을 우리 영역으로 만들어
14)
자유롭게 우리 정치를 실시하여야 한다(匿名 1909a: 13). (밑줄: 인용자)
관리는 백성을 착취하고 백성을 먹이로 삼는 것밖에 모르며, 나라의 이익
과 백성들의 행복을 증진시킬 방법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라는 기울
어지고 사회는 타락하고 왕실은 놀魅닒겨(여러 괴물들과 도깨비들)의 싸움터
15)
역시 지극히 적다. 일본의 식민통치에 반대하는 세력으로서‘지방의 양반
유생들’
을 언급하는 경우(匿名 1910: 2)를 찾을 수는 있으나‘료한 처분’
을
두고 재지사족층을 문제삼는 의견은 극히 드물었으며, 명문 재경사족층
에 비하면 그들은 거의‘노마크’
상태였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었다.
한일합방 과정에서는 한국 사회를 정체(停滯)에서 구하고자 하는 입장
이 강해져 일본 사회 전체의 담론에 영향을 끼쳤다. 위의 기술들에서는 한
와 같다(旭邦 1909: 69).
국 사회를 정체에 빠뜨린 책임을 기존권력층인 료한에 찾고자 하는 입장
1900년대는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기 직전의 시기다. 이러한 정치
적 상황 속에서 기존의 한국인 지배층에 관심이 집중되었다는 점은 명확
을 엿볼 수 있다. 실제로 1900년대 일본의 언론계에서 주요 논쟁거리가
되었던 것은‘료한 처분’
의 시비 여부가 아니라 그 시기와 방법이었다.
하다. 1907년 7월 24일(사실상 25일 새벽)‘한일협약’
이 조인되고‘한왕’
도
이러한 정치적 상황의 배후에는 좁은 의미의 정치만으로는 설명할 수
퇴위, 이조의 관리제도도 붕괴를 맞이하였다. 그 다음에 기다리고 있었던
없는 문화적 현상이 놓여 있었다. 1890년대에 만들어진‘조센진’
의 균질
문제는 기존 한국인 지배층의 처리 문제였다. 속칭‘료한 처분’
이라는 문
적이고 부정적인 이미지는 필연적으로 1900년대에 들어서도 쉽게 변하지
제가 일본 사회에서 크게 이슈화된 것이다.
않았으며, 이후 일본 사회의 담론 속에서‘조선 정체론’
으로 강화되었다.
그리고 그 부정적 이미지는‘조센진’
의 한 내부 분절인 료한의 내포적 색
어느 나라에서건 이런 경우에는 원래 그 나라에서 권세를 가진 계급 — 일
깔에도 계승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국가행정의 책임자인 명문 재경사족
본의 유신으로 말하면 사족 — 의 처분이 가장 중요하다. 조선에서 이에 해당
층의 이미지와‘조센진’
의 이미지, 그리고‘조선 정체론’
이라는 세 요소는
하는 것은 소위 료한이다. (생략) 직책을 잃고 권세를 잃은 료한이 반란의 주
16)
동 세력이 될 것은 무엇보다도 분명하다(竹越 1910: 81).
14)「韓國の�班以上は�到底濟度す可らざる頑民なり�(中略) 總て�班以上の罪 也�故
に韓國の蒼生を救はんと欲せば�人道のため此等�班以上の舊惡をふし�以て斷乎と
.
して韓國を我が領域と爲し�思ふがま に我が政治を實施するに如かずと」
15)「官吏は民を誅求し�民を魚 肉にするを知りて�國利民福を增進する術を講ぜず�國は
.
傾き�社會は墮落し�王室は놀魅닒겨の闇鬪場たり」
16)「何れの國でも斯かる場合には從來其國に於て權勢を有して居た階級 — 日本の維新
서로 연쇄반응을 되풀이하는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경위로 료한은 한국에서의 기존세력으로서 일본 사회에서 스티그
마타이즈(stigmatize)되었고 그 직업을 박탈당하였다. 문제는 이러한 과정
で云へば士族 — の處分が最も大事である 朝鮮で之に相當するものは所謂�班であ
。
る (中略) 職を失ひ�權勢を失ひたる�班が反亂の主動力たるべきは火を睹るよりも
。
.
明か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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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한: 식민지화 과정에 보이는 일본인의 조선 양반 표상양식에 관한 지식인류학적 연구 ∙99
에 관여한 에이전트가 경제인이나 행정관, 또는 포교자라고도 할 수 없는
청구학회는 그 후 경성제국대학의 아키바 다카시(秋葉隆, 1888~1954) 등
지식인층‘글쟁이’
들이었다는 데에 있다.
으로 계승되어 조선민족학회가 되었다. 즉 이마무라는 경찰관리부터 학
회의‘수퍼바이저’
로 변신했으며, 아무리 사회적으로 한국 문화를 표상하
는 전문가로 인식되어 있다 할지라도(飯島 1940) 아마추어와 전문가 사이
3. 료한의 재발견
의 일선을 넘어 아카데미의 기초를 지은 셈이다.
그 이마무라가 식민지 시대 초기에 하던 강연의 기록『朝鮮風俗集』
1) 아마추어 아카데미
(1914년)에도 위에서‘일종의 오리엔탈리즘’
이라고 부른 것이 보인다. 먼저
그 제1장인“조선인에게도 미풍은 있다”
(1911년 2월 작성)를 검토해 보자.
‘료한 처분’이후 일본인에 의한 한국 문화의 표상은 극적으로 변화하
였다. 저널리스트 등 직업적 표상자가 등장함과 동시에 한국의‘고유한
17)
문화’
에 대한‘일종의 오리엔탈리즘’ 이 전면으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식민시기 초기의 한국에서는 이러한 재야의 한국 사정 전문가들이 더
활약한다. 도키오 �주(釋尾春芿, 1875~ ? ), 아오야나기 고타로(靑柳綱太
원래 내지에서 조선에 오는 시찰자나 조선을 세상에 소개하고자 하는 기자
들은 대부분 경성, 부산, 인천 등 인기 있고 부화경조(浮華輕�)한 도회지만
순찰하고 순박소질(淳樸素質)한 산간벽읍에 가 본 적도 없는 것을… (今村
18)
1914: 2)
郞, 1877~1932), 호소이 하지메(細井肇, 1886~1934) 등 전문 연구자가 아니
면서 한국과 잘 통하는 기자들이 활발하게 한국의 풍속을 조사하고 소개
19)
조사하면 벽원(僻遠)의 땅에는 여러 가지 미풍이 있다(今村 1914: 16).
하게 된 것이다(永島 2002: 136-137).
그중 호소이에 대해서는 이미 자세한 연구결과가 나와 있다. 그는‘당
이마무라는 지방의 한국인을 좋아하고 일본인들에게도 한국의 지방사
대 가장 우수한 조선통’
이라고 불렸으며 한국의 고전을 일본어로 옮겨 소
회를 보고 다닐 것을 강력히 권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제2장“조선
개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국에 관련된 프로젝트를 조선총독부
의 사회계급”
(1913년 12월 강연)에서는 지방사회의 무엇을 가장 잘 조사해
에 팔거나 일본인들이 좋아할 것 같은 강연을 하고 다니며 활동자금을 만
야 하는지를 정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들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靑野 1988).
경찰관리로 강원도에 부임한 이마무라 도모(今村
; 1870~1943)의 활
항상 조선인을 접하는 내국인으로서 가장 잘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인데 의
동 또한 흥미를 일으킨다. 그의 경우가 특이한 이유는 이마무라가 후일 학
계에 이름을 올리고 청구학회의 중심인물로서 활동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7) 여기에서‘일종의 오리엔탈리즘’
이라고 부르는 데에 대해서는 후반부에서 자세히
논하겠다.
18)「從來內地より來鮮する視察者又は朝鮮を世に紹介する筆の人は多くは京城�釜山�
仁川等人氣の浮華輕�なる都會地のみを巡察し�淳樸素質なる山間僻邑に足跡を印
.
せざりしこと」
.
19)「調査せば僻遠の地には色 の美風がある」
100∙한국문화인류학 39-2(2006)
외로 알려지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이 주제에서 보듯이 조선의 사회계급
료한: 식민지화 과정에 보이는 일본인의 조선 양반 표상양식에 관한 지식인류학적 연구 ∙101
국이나 한국인에 우호적인 것이라고는 말하기는 어렵다. 이마무라의 표
20)
이다(今村 1914: 17). (밑줄: 인용자)
상과 공통적인 기호는 학부차관으로 봉직했던 다와라 마고이치(俵 孫一),
다시 말해서 행정관의 한국 문화 표상에서도 똑같이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장에서 이마무라는 재지사족층의 관습을 기술하는 데 집중
하였고, 이마무라가 기타 사회계급으로 언급한‘중인’
‘상민’
‘천민’
은물
조선의 각 계급 모두가 신문명을 향하는 과정에 있는 것은 분명한 추세인
론 재경사족층에 관한 언급은『조선풍속집』
의 마지막 한 페이지에 이르기
데, 그것과 함께 조심해야 할 점은 그 문명이 뚜렷하게 부화경조의 방향으로
까지 일절 등장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표상하지 않는 이유를 설
흐르고 있다는 점이다.
명하지도 않았다.
이 책은 그 후의 일본인 한국 연구자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원래 조선은 유교로 으뜸 선 나라이고 오륜의 길이 사회도덕을 유지하는
힘이 되어 왔다. (중략) 이는 조선인의 사초를 시도하는 데 있어 우리나라 사
21)
예를 들어 보통 일본에서 한국에 관한 인류학적 연구의 기점이라고 여겨
람들이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이라 여겨진다(俵 1910).
지는 아키바도 이 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할 정도였다.
서울로 대표되는 도회지는 단지 그곳에 살던 명문 재경사족층과 같은
조선에 오기 전까지 조선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던 나에게 조선민속 공부
를 시작하게 한 것은 이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秋葉 1940).
료한이 그로테스크한 귀신처럼 불려 낙인찍혔을 뿐만 아니라 그 전체적
품기마저도 낙인찍혀 있었다. 이런 경위로 식민지기의 도시문화는 치안
상의 목적을 제외하면 일본인 전문가에 의한 문화표상 대상에서 빠지게
『조선풍속집』
이 후대 한국 연구자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은 단지 그 내
되었다.
용에 그치지 않는다. 이 책은 폭넓은 한국의 문화적 현상을 장과 절로 구
그렇다면 이마무라는 왜‘벽원’
의 일반인들이 아니라 재지사족층을 중
성하고 체계화하여 일본 한국학의 틀을 만들어 냈다고 할 수 있다. 개별적
요시하게 된 것인가? 안타깝게도 이 수수께끼를 풀 증거는 충분하지 않다.
주장 이상의 매우 중요한 영향력을 끼친 것이다.
다만, 이 당시의 사람들이 관심을 갖던 문화라는 것이 현재 우리가 쓰는
이마무라는 당시 일본인으로서 한국 문화를 높이 평가하는 글도 쓰고
용어로 말하면‘전통’
이나‘고급문화’
였다는 점, 이마무라 자신이 아무리
일본인들의 편견을 바로잡고자 하는 취지의 강연회를 여러 지역에서 개
학자 이상으로‘박학’
(飯島 1940)이라고 평가되었다고 하더라도 연구자로
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한국의 독립운동에까지 경애를 표할 정도
서의 학문적 훈련까지 받은 것은 아니었다는 점, 그리고 그가 나중에 스스
의 인물이었다(今村 1928). 그런데 이마무라의 문화표상은 본인이 속한 근
대사회에서 보아 타자인‘벽원’
사람들만을 사랑한다는 점에서 특별히 한
21)「朝鮮の各階級を通じて新文明に向かひつ あることは明らかな趨勢であるが、
��に最
も注意を要するのは其の文明が徒らかに浮華輕�に流る ことである�
古來朝鮮は儒敎を以て建つて居る國で�卽ち五倫の道を以て社會道德は維持されて居
20)「常に朝鮮人に接 觸する內地人として最もよく知って居らねばならぬ事で案外心得て
.
居ない事がある」
る�(中略) 朝鮮人の思潮を指導する上に於て吾人の最も注意を拂ふべき點だらうと信
.
ず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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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한: 식민지화 과정에 보이는 일본인의 조선 양반 표상양식에 관한 지식인류학적 연구 ∙103
로 반성했던 것처럼‘젊은 날의 실수’
로 기록한 부분도 많았다(秋葉 1940)
다만 조선사를 연구하는 이들은 동양사 연구가 중에서도 매우 소수파
는 점 등 각종 사정들을 고려한다면 이 수수께끼도 더 이상의 의문을 가
였으며, 그 등장은 천천히 진행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 근거가 되는 증언
질 필요는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으로서 20세기 후반 일본의 조선사학을 이끌었던 하타다 다카시(旗田巍;
이마무라처럼 외교상의 입장에서 거리를 두고 문화를 표상하겠다는 전
문가들이 등장한 시기를 경계로 료한이라는 개념 또는 존재가 외교상의
1908~1994)가 1920년대 후반 동경제국대학 문학부 동양사학과의 상황에
대하여 구술한 이하의 글을 참고할 수 있다.
논의뿐이 아닌 한국 문화를 논할 때의 키워드로서도 중요해졌다. 그것과
동시에 명문 재경사족층을 대신하여 재지사족층이나‘유림’
이 논제에 떠
오르게 되었다.
당시 동양사 학생들 중에 조선사를 전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략)
동양사 출신으로 조선사를 연구한 사람은 극히 소수였던 것이 아닌가 싶다.
(중략) 이케우치 선생님이 조선사 강의를 하셨는데, 조선사를 전공하는 학생
2) 미믹리 아카데미
이 적었다는 것은 이상할 수도 있지만 조선에 대한 관심이 희박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동경에서 조선사 연구자는 이케우치 선생님 단 한 분이었다(旗
한국 연구의 발생 과정에는 위에서 본 것과 같은 비학문적인 문화표상
田 1997<1983>: 19).
전문가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후에 그들과 함께 학문적 문화표상의 전문
가들이 등장하였다.
일본인들이 근대적 학문 형태를 바탕으로 한국 연구를 시작한 출발점
은 19세기 말 일본에서 말하는‘東洋學’
연구가 탄생한 시점에서 찾을 수
22)
게다가 그 이케우치마저도 조선사가 아니라 만선사를 전공하는 학자였
고 연구업적도 중국 동북 지방에 관한 것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민속학적 조사연구의 발달은 더 지체되어 있었다. 이 글에서 말하는
동양사 연구는 중일전쟁(1894~1895)을 계기로 활발해졌고, 러일
‘민속학’
은 게재된 잡지가 민족학의 전문지였다는 사실에서 나온 것으로,
전쟁(1904~1905) 이후에는 그 내부에‘滿鮮史’
라는 하위범주까지 갖추게
실제로는 당시의 민속학은 물론, 민족지학이나 인류학에 관해서 서술한
되었다. 그리고 한일합방(1910년)에 이른 것이다. 동경제국대학에서는 전
것으로 받아들여도 문제는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있다.
국의 다른 대학에 앞서 1916년에 조선사 강좌를 설치, 이케우치 히로시
(池內 宏; 1878~1952) 교수 밑에서 본격적인 연구 및 교육이 이루어졌다고
23)
한다.
원래 조선에서는 민속학의 출발점이 될 학문적 훈련이 빠져 있었기에 일부
분에 불과한 역사가들의 취미 수준의 관심사로 간주되고 그 풍요로운 처녀림
에 손을 대는 일은 너무나도 없었다. 그러므로 요즘(1933년 당시—인용자 주
석) 민속학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홍수처럼 그 처녀림에 밀려들고 앞으로 더
22) 동경제국대학 사학과 출신인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 1865~1942) 등을 중심
으로 1880년대 후반 일본의 고등사범학교에서 동양사 교육이 시작되었다. 일반적 인
식에 따르면 이것이 동양사 연구라는 일본의 독자적 학문체계의 기원이라고 한다.
23) 동경대학 문학부 및 대학원 인문사회계연구과 인터넷 웹사이트에 근거한다.
더욱 큰 열매를 맺으리라는 것은 약속되어 있는 셈이다(岩崎 1933).
일본의 식민지배가 확립된 시기를 전후하여 구미 연구자들은 한국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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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한: 식민지화 과정에 보이는 일본인의 조선 양반 표상양식에 관한 지식인류학적 연구 ∙105
구에서 손을 뗐다. 반대로 일본인 연구자들은 조선총독부와 그 산하기관
국인 학자들의 진단학회가 조선사 연구를 이끌고 있었던 것이다(旗田
에서 촉탁이라는 신분을 얻어 한국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 촉탁들 중에는
1997<1983>).
후일 경성제대에 속하게 된 연구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총독부는 당시
한국 연구자들의 거의 전체를 차지하던 역사학자들만이 아니라, 농경사
이 글에서 사용하는 단어를 이용하자면,“아마추어 혹은 半 - 아마추어
회학자인 젠쇼 에이스케(善生榮助; 1885~ ? )를 비롯한 다양한 학문분야의
아카데미였던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나 청구학회와 그를 기원으로 한
인재를 촉탁으로 기용하여 구관제도 조사 등 사회∙문화 연구사업을 담
경성제대, 그리고 한국인 학자들에 의한 진단학회가 한국사 연구를 이끌
당시켰다. 이러한 까닭에 한국 연구의 폭은 조금씩이나마 넓어져 갔다.
고 있었다”
(旗田 1997)라고 한다. 즉 20세기 전반 일본의 학자들은 아마추
1924년 예과 개강에 이어 1926년 경성제대에는 본과 개강과 동시에
어 연구가의 연구 배경 하에서 한국 연구를 발전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宗敎及社會學敎室’
이 설치되었고, 종교학자 아카마쓰 지조(赤松智城,
20세기 전반의 일본인 한국 연구자들은 서구에서 수입된‘연구자’
라는 직
1886~1960)와 사회학자이자 인류학자인 아키바가 부임하였다(全 2004:
업으로 갑자기 출현한 것은 아니고, 앞에서 언급했듯이 아마추어들과의
80). 상황이 이 정도에 이르면 더 이상 아마추어라는 표현과는 어울리지
관계에서 서서히 발생한 것이다.
않는, 충분한 학문적 배경까지 갖춘 문화표상 전문가가 등장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한국 연구자들이 가진 이러한 계보는 재지사족층에 대한 관심
24)
도에도 나타났다. 예건대 무라야마(村山 1938: 31) 와 젠쇼가 그렇다. 결
그러나 촉탁제도가 완벽히 학문적인 것이었다고는 말할 수는 없다. 촉
과적으로 말하면‘료한처분’전야에 그로테스크한 귀신이라고까지 비유
탁 중에는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 1891~1968)처럼 학문적 전문가와 비
된 명문 재경사족층 속에서 문화적 가치를 재발견하고자 하는 시도는 없
학문적 문화표상 전문가의 중간쯤에 위치하는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다.
었다. 많게 봐도 전 인구의 10%에도 미치지 않았다(도이힐러 2003: 26)고
무라야마 지준은 설사 학부 졸업논문에서는 일본인의 국민성을 연구했다
하는 舊 사족층에 관한 연구가 각종 학문에서 상당히 축적되고, 기타의
하더라도 철학과 출신이었고, 조선에서도 잡지『조선』
의 편집요원과 같은
사회계층에 관한 연구에는 현재까지도‘착수조차 하지 않은 영역’
으로 남
비연구직을 맡았다.
았다(桑野 2002: 96-99). 또 재경사족층의 생활세계에 관한 연구도 완전히
1920년대 후반 이후의 한국 문화표상행위 역시 완전히 아마추어리즘
에서 독립한 것도 아니었다. 경성제대 창립 이후에도 아마추어들이 한국
빠진 상황이었는데, 사족층 연구로 유명한 조선 사학자 미야지마 히로시
(宮嶋博史)는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그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문화 표상행위를 활발히 진행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아키바의 경우에 분
명히 나타나듯 학문적 연구의 기본적 틀에는 이마무라 등의 영향력이 남
25)
양반층 가운데에서도 특히 재지양반층(在地�班層) 이 농촌부에서 널리
아 있었다. 하타다의 회고록에 의하면 1930년대에 이르렀을 때도 동경제
대 동양사학과에는 한국사 연구자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이 한
국을 식민통치하던 시대 조선사 연구의 중심지는 경성이었다. 조선총독
부 조선사편수회와 청구학회, 그리고 그 와중에서 생겨난 경성제대와 한
24) 무라야마는 조선 사회의 지배층을‘유림’
으로 규정하였다.
25) 여기에서‘재지양반층’
이라고 부르는 것은 앞서 소개한‘시골의 양반’
에 대한 학문
적 환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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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한: 식민지화 과정에 보이는 일본인의 조선 양반 표상양식에 관한 지식인류학적 연구 ∙107
사회적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중략) 조선의 전통사회가 가진 제
반 특징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전국적으로 널리 분포된 재지양반
층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서론에서 말했듯이 오늘날까지도 계속 살
아 숨쉬는 유교적 전통이나 친족∙가족제도의 소재 등의 문제들도 재지양반
층의 형성과 별도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宮嶋 1995: 25).
3) 현대 일본에 무엇이 보이는가
즉료한을 재지사족층으로 대표하는 경향은 현재도 마찬가지로 계속되
[그림 2] 안동시 관광안내 포스터
고 있다. 학문적인 기술만이 아
니다. 료한은 현대 일본의 일반
어 표기로‘얀반’
이라고 읽는 방식을 특별히 지정하는 것도 많았지만, 중
인들이 하는 구술 속에서도 자
년 이상의 사람들은 대개‘료한’
으로 발음하였다. 저자가 일본 사람들에게
주 등장한다. 그리고 그 구술에
한국에서 온 문화 연구 전문가라고 자기소개를 하면, 료한에 대해 공부해
등장하는 료한은 이상과 같은
봤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고 한국의 시골에 가서 료한 집도 많이 보았겠다
지식의 유통 과정을 반영한 것
며 특별한 관심을 보여 준 적도 있었다.
으로 생각된다.
[그림 1] 요리점의 포스터
료한은 현재 일본에서 판매되는 한국 여행 안내서에도 등장한다. 그것
저자가 1990년대 후반 일본에
을 살펴보면 전통문화에 관련된 항목에‘얀반’
혹은‘료한’
이라는 말이 자
있었던 당시에도 주위 사람들과
주 나오는데 그 의미에 대해서는 지방사회에서 세력을 가진 사람들이라
한국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는 식의 설명이 첨부돼 있다.
보면 특히 어른들이 료한이라는
한국이나 한국 문화라고 하면 읽는 방법이‘얀반’
이든‘료한’
이든 양반
말을 자주 사용하는 것을 알았
에 대한 언급이 자주 등장하는 것이다. 구체적 사례를 조금 더 들자면, 오
다. 책에 등장하는‘�班’
이라는
사카 중심부에 있는 한 고기요리전문점에는“얀반이란 … 고려, 이조 시
글자에도 옛날에 출판된 것이나
대의 귀족계층”
이라는 왼쪽의 사진과 같은 포스터가 붙어 있는데 이런 경
나이가 많은 필자가 쓴 것일수
우 양반이 차지하는 위치는 중인, 아전, 이반, 통신사, 무당 등의 용어가 대
록 일본식의‘료한’
이라는 표기
신할 수 없는 것이다. 일본의 이러한 상황을 보면 일본인들이 한국에 대해
음이 함께 붙어 있었다. 한국식
언급할 경우, 료한 또는 얀반이라는 말이 무엇인가 특별한 중요성을 지니
발음에 가능한 한 가까운 일본
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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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한: 식민지화 과정에 보이는 일본인의 조선 양반 표상양식에 관한 지식인류학적 연구 ∙109
물론 1988년의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한국 여행이 일본에서 활발해지
문의 논의와 관계가 깊은 지적도 이미 발표되었다.
고, 그 이후 한국은‘가장 편하게 갈 수 있는 외국’
으로 인기를 얻게 되었
이 정도만 언급해도 지금까지 소개한 료한의 표상양식이 탈식민주의
으며, 보다 최근에는 한류 열풍이 불면서 이러한 상황에 다소 변화가 생겼
(post-colonialism) 시대에 한국 문화가 걷고 있는 길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다. 일본 젊은이들이 한국 문화를 얘기할 경우에 가장 먼저 한국 요리와
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저자는 이 중요한 문제들을 또 다른 기회에 단독
연예 콘텐츠를 이야기하게 된 데에는 주지하다시피 이런 변화의 영향이
적 논문으로 검토할 과제로 남겨두겠다.
큰 것이다. 그러나 한국 문화에 대한 권위 있는 해설에는 요즈음에도 여전
26)
히‘�班’
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일본의 상황을 반영하여 한국의 舊 사족층에 대한 인식을 해체
4. 역전의 배경
(deconstruction)하고자 하는 연구도 일부에서는 이미 시작되었다. 안동이나
영남 지방을 중심으로 진행된 연구를 보완하려는 목적으로 충청북도의
여기까지의 논의로 저자는 처음에 명문 재경사족층을 의미하던 료한이
舊 사족층을 다루겠다는 연구(岡田 2001)가 그것에 해당된다. 그러나 그러
라는 말이‘일종의 오리엔탈리즘’
이 보급됨에 따라 짧은 사이에 재지사족
한 경우에도 연구대상으로 삼는 사람들이 영남학파가 아닌 기호학파이며
층을 가리키게 됐음을 밝혔다. 이 논문의 첫 부분에서 소개한‘역전’
은바
소론파가 아닌 노론파라는 점이 연구의 의의로서 제시될 뿐, 왜 사족층인
로 이 료한의 의미상 변화와 겹친 것으로 보인다. 또 그 과정에서 한국 문
지, 왜 재지사족층인지는 깊은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고 있다.
화의 표상자, 즉 한국 문화에 관한 지식의 발신자가 아마추어에서 서서히
물론 양반이 한국 문화의 대표상징(icon)이 되고 그것이 재지사족층을
가리킨다는 것을 반드시 일본만의 현상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현대 한국
프로페셔널로 이행된 양상을 가리키며, 두 가지 문화표상 사이에 연속된
부분이 있었음을 제시하였다.
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이 부분은 똑같이 확인될 경우가 있다. 서울
그렇다면 이‘일종의 오리엔탈리즘’
이란 어떤 것이었는가? 또 이 현상
시 지하철에 붙여 있는“한국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
을 캐치프레이즈로
을‘역전’
이라고 부를 정도로 일본 사회는 료한의 인식을 완전히 전환시
한 광고물([그림 2] 참조)은 재지사족층의 삶을 한국 문화의 중심에 둔다는
켰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왜 20세기 일본의 한국 연구자들은 아
점에서 어느 정도 이를 반영하는 예라고 할 수 있겠다. 또 현행 한국 가족
마추어에서 료한 개념을 계승하였는가?
법이 식민지 시기에 실시된 구관 조사에 근거한 것으로 일본인의 시점에
서 본 료한이 한국 가족의 규범으로 되어 있다는 것(양현아 1995) 등, 이 논
1) 오리엔탈리즘
26) 예를 들면 질 높은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일본방송협회
(NHK)에서도 최근의 한류 열풍과 관련된 한 교양 프로그램 중에서“한국에서는 안
경을 낀 남자가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라는 일본과 다른 한국의 사정에 대
해 한국 미디어 연구가를 자칭하는 한 30대 여성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그것은 얀
라는 글자가 크게 떴다.
반문화라고 하구요…”그 순간 화면에는‘얀반문화’
20세기 후반 인류학자들은 이전에 대부분 문화표상이 빠져 있던 문제
를 본질주의(essentialism)와 민족지적 현재(ethnographic present)라는 두 개
념을 이용하여 비판했다. 료한에 관한 본질주의 비판에 따라 말한다면 사
족층의 문화적 특징을 발생시킨 내재적 조건을 하나의 핵에 연결시켜 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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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한: 식민지화 과정에 보이는 일본인의 조선 양반 표상양식에 관한 지식인류학적 연구 ∙111
하였다는 무리한 표상행위가 인류학자들 사이에서 비판 대상이 되고, 민
있어 결과론적으로는 다 똑같이‘조선 정체론’
을 일본 사회에 축적하고
족지적 현재 비판에 따르면 료한을 표상하는 기술이 언제 관찰한 것인지
있었던 것이다.
여부에 상관없이 현재시제로 쓰였다는 것이 문제시될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개념은 유럽 사회가 이슬람 사회를 타자화하고 조
이 민족지적 현재 비판에 대하여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자. 민족지
작 대상으로서 객체화하고 재창조해 나가는 양식을 논하는 것으로 시작
적 현재란 로살도 말로‘~한다’
‘~이다’
,
라는 현재시제를 사용하고“마
되었다(Said 1978). 이에 대하여 카스텀 연구자 중 한 명인 요시오카 마사
치 그것이 한 집단 안에서 모두에게 같은 방법으로 항상 반복되고 있는
노리(吉岡政德)는 이문화에 접한 유럽 사람들의 구술을 원래의 뜻으로서
것처럼 기술”
(Rosaldo 1989: 42)하는 글쓰기 방법이다. 이러한 기술에서는
의 오리엔탈리즘으로 포괄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고 하며, 특히‘서구측
대상사회가 비역사적이고 무시간적인 순간에 고정되며, 인류학자가 사는
시점의 다양성’
을 논하면서 다음과 같은 선행 연구를 소개하고 있다.
사회와의 동시대성이 거부되며, 연구대상을 시간적으로 떨어진 타자로
날조한다(Fabian 1983: 86). 그뿐 아니라 그러한 민족지에서는“현재에 관한
아프리카 사회가 완전히 보수적(생략)이라는 백인들의 주장은 절대로 아
민족지가 아니라, 민족지적 현재를 만들어 내기 위하여 주위에서 실제로
프리카의 후진성 또는 근대화에 적극적이지 않은 태도를 고발하는 의도는 아
일어나고 있는 것은 의도적으로 제외된다”
(Sanjek 1991: 613)라는 문제도
지적할 수 있다. 또한 민족지적 현재의 문제는 본질주의적 문제와는 직접
니었다. 비록 그것이 전혀 어울리지 않은 칭찬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전통
의 훌륭한 특질에 대한 칭찬을 의도했던 경우가 많았다(レンジャ─ 1992: 377378)
적으로 상관없다 할지라도 개별 문화의 전형을 가장하는 인류학자들의
경향(Keesing 1976)과도 다른 것이다.
유럽 사회에게 이슬람 사회는 적으로서의 협위를 가지고 있던 것이며
앞에 인용한 글에는 과거시제나 미래시제가 포함된 부분도 있지만, 대
그 점에서는 아프리카 사회와 달랐다. 그러므로 정치적 강자가 약자에게
부분은 연구대상자들의 모습을 현재시제로 표상한 것이었다. 과거시제를
구술한 내용을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개념으로 다 포괄해서 분석한다면
사용했을 경우에도 그것이 수백 년 전 이야기인지 한 시간 전 이야기인지
“구술의 내용이나 주체의 다양성을 숨겨버리게 마련”
이라고 한다(吉岡
분명하지 않은 것이 많다.
2005: 155-156).
지금까지의 민족지적 현재 비판과는 달리 저자가 오히려 여기에서 논
한일합방은 일본인들에게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다는 것을 의미
의하고 싶은 것은 그러한 민족지적 현재의 기술이 예의 그‘벽원’
에 대한
하였는데, 그것과 함께 일본인이 한국 문화에 대해 가지는 시각도 변화되
‘일종의 오리엔탈리즘’
과 겹치며‘조선 정체론’
에 이용되었다는 근대 일
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일본인들의 주장은 침략의 여부를 의도한 것부터
본의 한 모습이다. 각 필자의 직업이나 사명과는 관계없이 단순히 인간이
‘전통의 훌륭한 특질에 대한 칭찬’
으로 변화한 것이다.
다른 문화를 표상한다는 행위의 문제점만을 생각하면 다음과 같이 이야
그 위에 일본의 한국 지배와 서구에 의한 식민지배 사이에는 많은 차이
기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료한의 사례로는 명문 재경사족층을 표상한
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아마 가장 단순하면서도 큰 차이점은 백인이 유색
경우라도 재지사족층을 표상한 경우에도,‘글쟁이’
라도 비학문적 전문가
인종을 지배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한일 양국의 노인들이 식민지 시
라도 연구자라도, 현재시제를 사용하면서 기술하고 있던 그 순간순간에
기의 경성이나 부산을 되돌아볼 때 누가 한국인이고 누가 일본인인지 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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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한: 식민지화 과정에 보이는 일본인의 조선 양반 표상양식에 관한 지식인류학적 연구 ∙113
게 알 수는 없었다고 구술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으로도 분명하듯이 그토
의 지식에 따라서는 명문 재경사족층이 아닌 사람들에 대해서도 언급이
록 한국인과 일본인은 닮았던 것이다. 이‘너무나도 닮은 타자’
라는 감각
될 때가 있던 것이다. 다음은“가볍게 두세 달 정도 놀러 한국에 갔습니다
을 어떻게 할지는 한일합방 전야부터 이미 한국을 표상하고자 하는 일본
만, 조금씩 길어져서 이번에 11개월째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라고 말하는
인들에게 큰 고민거리가 되는 논점이었다.
한‘글쟁이’
가 정치가 오쿠마가 참석한 동경경제학협회의 1907년 2월 회
의에서 강연한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료한과의 대화를 바탕으로 한 일상
원래 뿌리를 살펴보면 일한 양 국민은 누가 형이고 동생인지 알 수 없을 정
적인 기술을 살펴볼 수 있다.
도이지만 각각의 건국 연혁이 다르고 몇 천 년의 역사가 다르고, 따라서 풍속,
인정, 언어가 다르다. 말하자면 국민성을 달리 하기에 渾然融和를 기대한다는
27)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것도 원래 당연하다고 말해야 한다(加藤 1909: 7).
조선의 사회조직과 한국인이 어떤 사람들인가 하면 먼저 숫자 등은 놓아두
고 계급부터 말하면 상류와 하류가 있습니다. 즉 사회의 중견이라 할 수 있는
중류 사람들이 거의 없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시 말해서 상류와 하류, 환언
28)
한국은 과연 정말로 일본에 동화할 수 있는가?(匿名 1909b)
하면 노는 자와 일하는 자의 두 가지밖에 없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노는 자
란, 즉 관리 혹은 사족이라 하는 자들인데, (생략) 신사는 당연히 무직이어야
‘글쟁이’
든 연구자든 한국의 고유한 문화를 명백히 기술한 일본인들의
29)
하며 본인은 직업을 가진 하등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峯岸 1907).
심층심리에는 문화적으로 한국인을 타자화해야 한다는 관념이 서구인들
의 경우 이상으로 강하게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한 사정으로‘전통의 훌륭한 특질에 대한 칭찬’
은 고민하는 일본인
들에게 오히려 복음이었을 것이다.
즉 무직인 것을 바람직하다고 하는‘상류’계층 사람들에 대해서도 똑
같이‘사족’
이라는 말로 표상하는‘글쟁이’
도 실제로는 매우 적었지만 있
기는 있었던 것이다.
또 다른 예로는 여러번 한국을 여행하고 당시 일본에서 가장 빈번히 한
2) 전지와 위지의 역전
국에 대해 논하던 전문가로서 吟月生(가명)이라는 인물의 글을 들 수도
있다. 그는 명문 재경사족층과 더불어 재지사족층에게도 료한이라는 용
‘구술의 내용과 주체의 다양성’
이라는 요시오카의 지적은 료한에 관한
어를 사용하는 흔치 않은 기록을 보여 준다.
일본인들의 문화표상과 사실은 무관하지 않다. 1900년대 일본의 잡지기
사에는 료한에 관한 다른 견해도 약간이나마 찾을 수 있다. 표상하는 사람
27)「元來根源を質すと�日韓の�國民は�孰れが兄か弟か分らぬ位であるが�而も各の建
國の沿革が異り�數千年の歷史が異り�隨つて風俗�人情�言語が異りて�謂は?其の
國民性を異にして居るから�渾然融和を望むと云ふ事は�非常に困難なるも�固より
.
當然と云はねばならぬ」
.
28)「韓國は本當に日本に同化できるのか」
29)「朝鮮の社會組織 一體韓人といふもの 先づ數とか何とかいふことは拔に致しまして、
階級から申すと上流と下級�倂して社會の中堅たるべき中流といふものが殆ど無い樣
に思はれます�詰り上流と�下流�言葉を換へて言ふと遊民と く者との二つの外無
い樣に思はれます�それで其遊民といふのは卽ち役人とか�或は士族といふ者であつ
て�(中略) 紳士たるものは當然無職業であるべき�で�職業を有するやうな下等のも
.
ので無いと申し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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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한: 식민지화 과정에 보이는 일본인의 조선 양반 표상양식에 관한 지식인류학적 연구 ∙115
한국의 료한이란 예부터 계통적으로 관록을 먹는 자라든가 혹은 높은 직책
료한이 명문 재경사족층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재지사족층을 가리키는
에 있던 자가 지방에 할거해서 권위를 가지게 된 것이다. 또 같은 료한이라 하
지라는 문제에 관해 당시 일본인들의 지식은 일부에서는 착종한 것이었
더라도 각기 다른 등급이 매겨져 있어서, 예컨대 대대로 군수를 맡고 있는 자
는 대대로 관찰사를 맡고 있는 자의 아래에 있고, 정삼품이라는 직급은 정이
품 아래 있는 것처럼, 그들 사이에도 계급에 따라 권위의 높고 낮음이 있다는
다고 할 수 있다.
한국 문화의 대표상징으로서 료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것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료한이라는 이름만 가지고도 그들의 권위는 대
단하다. 그들은 지방의 주권을 대부분 쥐고 있기 때문에 마음대로 土人에 대
한 제재를 가하고 있으며, 살리는 것도 죽이는 것도 그들의 몫일 정도로 어마
료한은 료한, 조선은 조선이다. (생략) 요컨대 조선은 료한이 아니다. 또 경
32)
성도 아니다(池邊 1910: 65).
어마한 거대 세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를 보면 노예제도와 같은 제도도
30)
자기들 멋대로 만들어 냈을 것이다(吟月生 1909a: 44).
이 글의 필자 이케베 기치타로(池邊吉太郞; 1864~1912)는 아사히신문
(朝日新聞)에서 1896년부터 1911년까지 주필을 맡은 저널리스트이며, 그
그러나 吟月生은 특권계급으로서의 료한이 가지는 특징은 관직에 있
신문을 일본의 일류신문으로 키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료한을 포함한
한국인의 균질표상이 등장한 1890년대 중반에는 이미 당대 최고의 지식
다고 지적한 다음과 같은 글도 발표하였다.
인 및 집필자로 이름을 날리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새롭게 글쓰기를 시작
한국의 소위 료한이라고 하는 지위가 료한이라는 계급에만 기대어 지방에
그 패권을 펼칠 것이라는 생각은 단지 표면적 관찰에 불과하다. 물론 료한이
한 집필자들, 특히 인기가 없었던 한국 연구의 필자들을 이러한 인물이 어
떻게 보고 있었는지는 이제 알 수 없는 문제가 되었다.
라는 계급이 일반적으로 존경을 받고 있는 것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러한 특
또 20세기 말 일본의 지식 유통 상황을 보면 료한이 이미 주로 재지사
별한 세력을 지니는 원인은 세력권과 돈 덕분이다. 가령 불가능도 가능으로
족층을 의미하게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명문 재경사족층에 관한 기술
만들 만큼 우세한 료한의 후손이라 해도 지금 가난에 시달리는 자들은 어느
도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31)
누구도 상대해 주지 않을 것이다(吟月生 1909b: 35).
조선 시대 정치권력을 쥐고 있던 �班이라는 특권신분의 문관 관료들은
30)「韓國の�班とは昔から系統的に官祿を食みし者とか或は大職に就いた者が地方に割
據して權威を振つたものである�亦同じ�班と云ふ者の中でも等級が設けられてある�
토지 소유자 등의 지위를 지녔으며 그 사회적 권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양반
タトヒば代 郡守を勤むる者は代 觀察使を勤むる者に及ばず正三品は正二品の下
位にある如く�彼等が階級によりて權威の高低あるも是非なきことと云はねばならぬ�
得るものと我點するものあらば之も皮想の觀察に過ぎぬ�尤も�班と云ふ偕級は一般
然れども�班と云ふ名さいあれば�彼等の權威勢力は大したものである�殆ど地方の
に尊敬を拂はれ居るには違い無きも�其の特別の勢力を有するの原因は矢張り�黃白
主權を握つて居るので土人に對する制裁は意の�に行はれ�活すも殺すも彼の掌中に
のお陰である�▤令昔は飛ぶ鳥も落せる優勢の�班の末裔でも�當今貧困の境遇に頻
あると云ふ素敵滅法界の大勢力を持つて居るだから�たまらない�例の奴隷制度の如
.
せるものは誰あつて取り合ふ者もないのである」
.
きも自分勝手都合の好いやうにコシライたものであらう」
31)「韓國の所謂�班なるものは單に�班と云ふ偕級のみに依りて地方に其の覇權を振ひ
32)「�班は�班, 朝鮮は朝鮮である. (中略) 要するに朝鮮は�班ではない�又京城ではな
.
い」
116∙한국문화인류학 39-2(2006)
은 후일 왕위를 둘러싼 싸움에도 가담했으며, 유학 당파간의 싸움과 결합되어
료한: 식민지화 과정에 보이는 일본인의 조선 양반 표상양식에 관한 지식인류학적 연구 ∙117
3) 문화의 감사
당쟁을 되풀이하고 정치를 흩뜨리게 하였다(村上∙江上∙山本∙林 1987:
33)
205-206)
그렇다면 사회에서는 어떻게 복수의 지식이 존재하고 그중 하나가 주
류가 되는 것인가? 이 문제는 20세기 일본의 한국 연구자들이 아마추어에
이상은 19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일본 고등학교에서 일반적으로 사용
서 료한 개념을 계승한 이유와 관계가 깊다.
되던 교과서의 일부이다. 특히‘�班’
이라는 단어에는 빨간 밑줄까지 그
스트래선과 그 동료들이 제창하는‘문화의 감사(auditing)’개념에는 주
어져 있었으며 시험에 대비해 중요하다고 가르쳤던 것으로 알 수 있다. 또
목할 만한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실로 근대 이후 문화표상의 전문가들은
한 유사한 내용이 중학교의 세계사 교과서에도 등장한다. 그러나 당시 교
회계사들이 회계보고(audit)를 만드는 듯 문화표상을 하고 있다. 회계사들
과서에는‘�班’
이
에 관한 더 이상의 언급이 없었으며 부교재에도‘�班’
이 회계의 방법을 정리하거나 해설하듯이 문화표상의 방법론을 논하기도
라는 말에 관해서는 이 이상의 내용을 담고 있지 않았다.
한다. 그리고 마치 회계사들이 회계보고를 감사(역시 audit)하는 것처럼 교
과서나 사전, 그리고 법전에서부터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다
료한은 서울에도 있나요? 아니, 있었어요? 그런 얘기는 학교에서 배운 것
같기도 하고“대장금”
에도 료한은 등장하잖아요.
양한 문화표상을 직접 감수하고 있다. 혹은 학문적 근거나 전문가의 권위
를 빌려줌으로써 일반 사람들이 문화에 대하여 가지는 담론이나 인식에
간접적으로 관여하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문화를 표상하고 문화의 표
1970년대 초에 태어난 한 일본인 여성이 저자에게 질문한 내용이다. 이
상방법을 논하고 문화표상을 검사하는 일을 하는 이러한 문화표상 전문
러한 상황을 보니 일본인이 표상하는 료한은 지금까지 보아 온 시대적 변
가들의 존재 그 자체가 사회에서 또 하나의 문화요소이기도 하다. 환언하
천을 주류로 하면서도 그것과는 다른 지식이 항상 표상으로 연결돼 있다
면‘문화의 감사’
라는 발상은 문화표상을 감사한다는 행위에 대해 주목한
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사회에서 주류가 되는‘전지’
가 있는가 하면 반드
것과 동시에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전문가들의 감사라는 문화까지 나타내
시 잘 알려지지 않은‘위지’
가 있다는 것이며, 그‘위지’
는‘僞’
라는 한자로
고자 하는 것이며, 문화표상 전문가들과 일반사회와의 관계에 대해 인류
표현되어야만 하는 거짓말도 아닐 수 있는 것이다.
학적으로 연구하거나 문화표상 전문가들과 우리들 자체를 상대화시키고
자 하는 발상인 것이다. 이러한 발상에서는 일반 잡지기사 중에 있는 문화
표상과 전문지논문 중에 있는 민족지기술의 차이는 특별한 의미를 지닐
34)
수 없다(太田 2003).
33)「李朝の政治を動かしたのは��班(ヤンバン)という特權身分の文官の官僚であるが�
かれらはまた土地所有者などとして社會でも權力をふるっていた.この兩班は�やが
て王位をめぐる爭いに加わり�儒學上の學派の爭いともむすびついて黨爭(とうそう)を
.
くり返し�政治を�すようになった」
34) 실제로 현대사회에서는 일반인들과 연구자들 사이에서 문화표상이나 그에 관한 지
식이 재귀적으로 서로 연관되어 있어‘지식의 주객’
은 이미 크게 흔들리고 있는 것
이다.
118∙한국문화인류학 39-2(2006)
그런데 펠즈에 따르면‘문화의 감사’
에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고 한
료한: 식민지화 과정에 보이는 일본인의 조선 양반 표상양식에 관한 지식인류학적 연구 ∙119
■ 참고문헌
다(Pels 2000). 어떤 감사도 일반사회의, 즉 비전문가들의 예상과 기대에 어
긋나지 않게 진행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문화표상의 전문가들은
일반인들의 상식을 부정하거나 그 상식과 지나치게 다른 말은 하지 않다
는 것이다.
만약 인류학자를 비롯한 문화표상 전문가들의 직무와 활동과 역할이
불명한 것을 밝히는 데에 있는 것과 더불어 이 감사에 있다고 한다면,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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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면 기성 지식은 주류 지식으로서 든든한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지식
이라는 것은 그것이 얼마나 공유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일
반적으로 공유되고 있다고 믿어지고 있는지가 그 사용 효과를 결정(Chw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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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밝히는 것으로 새로운 지식을 창조할 때도 있지만, 사회변동이 일어
나는 데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대항담론의 내용 자체는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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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한: 식민지화 과정에 보이는 일본인의 조선 양반 표상양식에 관한 지식인류학적 연구 ∙127
Abstract
intelligentsia held the ryohans’ tyranny and self-interests accountable for inhibiting
Korean development. In approximately 1910, when Japan annexed Korea, one of the
〈key concepts〉
: Japanese colonialism, yangban, invention of culture, Otherness,
auditing of culture
issues that generated much debate in Japan was how to punish the ryohans and how
to deprive most of them of their occupations and worth.
The meaning and the image of ryohan underwent a change in the colonial period
from 1910-1945. Ryohan began to imply the Korean rural noblesse that did not have
Ryohan:
any occupation. This was because many members of the Japanese intelligentsia
Anthropology of Knowledge and the Japanese Representation of
Korean Yangban under Colonialization
visited Korea to represent Korean culture as committed officers of the Japanese
government, or as free journalists. The Japanese intelligentsia continued from a
certain kind of Orientalist perspective to represent ryohans as the polite and
Ota, Shimpei*
pedigreed exponents of Korean society.
To this day, the higher educated Japanese continue to regard ryohans as the idle
rich in rural Korea. Even Japanese anthropologists in the present day rarely refer to
the other traditional classes, nor do they mention the ryohans living in Seoul or its
suburbs; on the other hand, they are still amassing various reports on rural ryohans.
The anthropologists’ professional representations of ryohans are largely built upon
Ryohan is recognized by the Japanese people as one of the key concepts of
their predecessors’ amateur representations of ryohans.
Korean culture since the last decade of the 19th century. This word is the translation of
Apart from issues related to the change in meaning or Orientalism, the Japanese
yangban, meaning“aristocrats”in Korean. Two questions arise in this case: (1) how
representation of ryohans entails a problem of modern cultural representation.
did the Japanese people determine the meaning and features of ryohan? and (2) how
Korean culture is portrayed as existing in an“ethnographic present,”in which it
has this word influenced the cultural relationship between Korea and Japan? This
remains static and unchanging. Like other colonialist states, the modern Japanese
paper argues these problems referring to the discipline of anthropology of
justified their colonial regime by assuming that Korean culture was stagnated.
knowledge, especially on kastom studies in Oceanian studies, minzokuchishikiron
Contemporary anthropologists mainly criticize government officers, economists, and
(folk knowledge studies) in Okinawan studies, and the studies of auditing of culture.
missionaries for acting as colonial agents. However, because the colonial agents’
In the 1900s, when Korea was under Japanese colonization, the word ryohan was
used to refer to Korean aristocrats living either in Seoul or its suburbs, and most of
asserted that Korean culture was stagnant, they were in fact the forefathers of
contemporary anthropologists.
the Japanese people considered these aristocrats to have a steady influence on Korean
Anthropologists have often been in consensus with regard to the relationship of
national politics. A little later, ryohan was used to denote the main Korean hereditary
Self and Other in the modern era, which concerns the Western European way of
bureaucrats from the higher echelon and their families. Members of the Japanese
representing Otherness. However, in case of the colonizing Japanese, they had to
represent those who were much more similar to themselves physically and culturally,
* Research Associate, Osaka University.
so it was necessary for them to define the cultural difference clearly. They achieved
128∙한국문화인류학 39-2(2006)
this through their imagining of the ryohans as representatives of Korean cultural
stag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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